# 549
549화. 뇌화궁(雷火弓)
의식으로 미리 차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한 한립은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려 수사께서는 차를 즐기시지 않으십니까?”
꼭두각시가 자리에 앉아 무표정하게 찻잔을 내려다보기만 하자 고죽 노인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곡기를 끊은 뒤로는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습니다.”
“그러셨군요. 제가 실례를 할 뻔했습니다.”
고죽 노인의 얼굴에 불쾌함이 스쳤지만 표정관리를 잘 하는 편인지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실 차를 대접하는 주인의 면전에서 이렇게 말하는 수사는 굉장히 드물었다. 그렇다는 것은 상대가 원영 후기의 수사일 수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이에 고죽 노인은 려 수사를 향한 경계심을 높였다.
“저희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이미 들으셨겠지요. 제 거래 조건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한립이 차가 마음에 들었는지 두세 모금 하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조금 난감합니다. 오붕이 진화를 하기 직전이라 아무리 많은 요단을 제시하셔도 거래를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만일 지금 털을 뽑아 원기가 상하면 다시 진화할 기회가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고죽 노인이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는 것은 거래를 원치 않으신다는 뜻입니까?”
“제가 거절한다고 두 분께서 그냥 돌아가시지는 않겠지요. 이렇게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수도계는 실력으로 모든 것을 결정짓지 않습니까! 법술을 겨루어 두 분께 제가 지면 이번 거래를 하겠습니다. 만일…….”
“만일 저희가 진다면 저와 려 형은 바로 섬을 떠나 다시는 이 일에 대해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좋습니다. 노부도 벌써 백 년 가까이 다른 수사와 실력을 겨뤄 본 적이 없어 이런 기회가 필요했습니다. 그럼 두 분 중 누가 저와 손속을 겨뤄 보시겠습니까?”
고죽 노인은 한립과 려 수사를 동시에 살폈다.
“괜찮으시다면 저와 겨루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한립은 무표정하게 꼭두각시를 조종해 답했다.
“저도 려 형의 공법이 어떠할지 아주 궁금하던 차입니다. 산 정상으로 가시지요.”
고죽 노인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립과 꼭두각시도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그때 한쪽에서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결단기 노인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한 기색을 드러냈다.
원영기 수사들의 결투는 보고 싶다고 아무 때나 구경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한립은 산정상 백여 장 위에 떠 있었고 수십 장 밖에 꼭두각시와 고죽 노인이 대치중이었다. 인근에는 결단기 수사 일고여덟 명이 소식을 듣고 모여 들었다.
“가라!”
고죽 노인의 일갈에 동시에 백여 개의 녹색 빛이 튀어 나와 백 개가 넘은 녹색 비검으로 변했다.
빛으로 변한 비검들이 괴이한 배열을 만들어 내며 고죽 노인의 머리 위를 선회했는데 그 안에 깃든 기운이 강대했다. 그것을 보고 담담하던 한립도 얼굴빛이 달라졌다.
‘검진! 고죽 노인이 수많은 비검을 제련해 냈다더니 역시 검진을 익히고 있었구나.’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보니 무척 놀라웠다.
“상대의 실력이 나쁘지 않아 보이니 꼭두각시의 위력을 알아보기 좋겠구나. 일단 꼭두각시의 방어능력부터 살펴보자!”
대연 신군이 신이 나서 말했다. 그는 꼭두각시의 능력을 완전히 신뢰하는 눈치였다.
“예, 알겠습니다.”
진귀한 재료들을 모아 힘겹게 만든 꼭두각시니 거는 기대가 높은 것은 당연했다. 꼭두각시가 입을 벌리더니 손바닥 크기의 방패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빛을 번뜩이던 은색 방패가 커지며 그 앞을 막아섰다.
이어 꼭두각시가 수결을 맺으니 눈앞에 오색찬란한 보호막이 생겨나 전신을 감쌌다.
“음? 수사께서는 혹시 남강의 독성문(毒聖門) 출신이십니까? 공법이 독성문의 유명한 영문술(靈紋術)과 비슷한데요.”
고죽 노인이 꼭두각시 얼굴에 나타난 이상한 주술을 보고는 놀라 물었다.
“아닙니다.”
한립도 그 말에 놀랐지만 꼭두각시를 조종해 냉랭히 답했다.
“제 착각이었나 보군요. 그런데 정말 비슷하군요.”
고죽 노인은 대답을 하면서도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꼭두각시는 방어막을 펼치고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고죽 노인은 상대가 은근히 자신을 얕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가 주술을 읊자 머리 위의 비검들이 대답을 하듯 진동을 했고 동시에 검진 속에서 백 개가 넘는 검기가 분출되어 빽빽하게 날아오르다 하나로 합쳐져 엄청난 영기의 빛을 발산했다.
꼭두각시는 검기들이 다가오는데도 별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다만 은색 방패를 가리켜 크기를 키울 뿐이었다.
한립의 주시 속에 거대한 검빛과 은색 방패가 충돌했다.
쿵!
폭음이 울려 퍼지고 빛이 요란하게 번쩍이는데 은색 방패가 꿈쩍 않고 검빛을 막아 냈다. 고죽 노인은 물론이고 한립의 표정도 달라졌다.
“보아하니 원강순(元罡盾)의 위력이 예상보다 강한 것 같구나. 제련은 해놨지만 배양할 시간이 없었는데도 저 정도이니 말이야. 하지만 방패의 방어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게 하는 것은 꼭두각시라서 가능한 것이겠지. 만일 네가 조종했다면 저 절반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겠지요. 수사들은 법보 자체의 위력과 주입할 수 있는 법력의 양 그리고 조종하는 의식의 영향을 모두 받지 않습니까. 하지만 꼭두각시처럼 각종 진귀한 재료로 제련해 한 번에 일반 수사보다 세 배까지 법력을 뿜어낼 수는 없으니까요.”
그간 대연 신군에게 괴뢰술에 대해 배우며 그의 경지도 최상위로 올라간 것이다. 아마 대연 신군만큼은 아니겠지만 인계에 그만큼 괴뢰술에 능한 이들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원강순(元罡盾)을 제련해서 꼭두각시에게 넘겨주었지만 꼭두각시의 신체적 특성을 고려해 특수 제작하지 않았더냐. 만일 네가 같은 양의 법력을 주입해도 방패가 완전한 위력을 선보이지는 못할 것이다.”
대연 신군의 말에 한립도 고개를 끄덕이고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멀리서 고죽 노인이 법력을 더 불어 넣어 공격해도 실패하자 진법의 최상위 공격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허공의 비검들을 가리키자 검들이 웅웅거리며 한 곳으로 모여들었고, 비검들이 빛으로 변해 직경 한 장의 거대한 바퀴 모양을 만들어 돌기 시작했다.
고죽 노인이 법결들을 던져 넣자 그 속도가 더욱 빨라져 중심에서 눈부신 빛이 일었다. 결국 중간에서 녹색의 빛기둥이 생성되어 은색 방패를 향해 쏘아져 나간 것이다.
쿵!
둔중한 울림이 들리고 녹색 빛기둥이 공처럼 뭉쳐져 은색 방패의 중심을 움푹 들어가게 만들었다.
그때 인간형 꼭두각시가 손을 뻗었다. 은색 방패가 빛을 흩날리며 다시 작은 방패의 원형으로 돌아간 것이다.
녹색 빛덩이가 방패의 원형과 부딪쳤지만 방패를 깨트리지는 못했다. 은색 방패는 빛을 방출해 녹색 빛덩이를 튕겨냈다.
펑.
주변으로 튕겨나간 녹색 빛이 허공에서 터지며 사라졌다. 고죽 노인이 헛바람을 들이키며 꼭두각시를 응시했다.
그도 검진을 최대의 위력으로 발동한 것은 아니었지만 상대는 방패 하나로 모든 공격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원강순의 위력은 충분히 확인했으니 오행조(五行罩)는 넘어가자. 오행옥을 이용해 발동한 보호막이니 당연히 방패보다 낫겠지. 그럼 이제 공격 능력을 확인해 봄이 어떠냐?”
“알겠습니다.”
한립이 대답을 하자 인간형 꼭두각시가 바로 보라색을 반짝이며 수결을 맺었다. 그의 손에서 보일 듯 말 듯 붉은 빛이 번뜩이더니 작은 활이 나타났다.
수 촌 크기의 세밀한 세공이 돋보이는 활이었다. 활은 교룡의 형상을 띠고 있었는데 비늘까지 생생하게 새겨져 있었다.
“천교궁(穿蛟弓)!”
고죽 노인이 그것을 보고 아연실색했다.
“천교궁이 아니라 그것을 모방한 뇌화궁(雷火弓)입니다. 미리 말씀 드리면 이것은 진짜 교룡의 뼈와 힘줄을 이용해 만든 것이라 천교궁 이상의 위력을 낼 것입니다.”
꼭두각시가 한 손으로 활을 잡자 다른 손에서 천둥소리가 나며 녹색의 작은 화살이 등장했다.
주술을 읊는 소리가 울리자 활에선 붉은 화염이 흘러내렸고 녹색의 화살에서는 금빛이 번뜩이며 뇌전이 튀었는데 그 소리가 쩌렁쩌렁 했다.
쿠콰쾅!
꼭두각시가 능숙하게 화살을 당기니 붉은 화염과 금색 뇌전이 합쳐지며 엄청난 기운을 일으켰다.
하늘을 찌를 듯한 흉포한 기세에 거대한 파동이 생겨 퍼져 나갔는데 곁에서 지켜보던 결단기 수사들은 영기의 파동만으로 보호막이 흔들렸고 법력이 부족한 자들은 뒤로 밀려났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지요! 더 겨룰 것도 없이 노부가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고죽 노인이 그것을 보고는 큰 소리로 소리쳤다. 그러면서 한손으로 삼각형의 영패를 방출해 녹색, 붉은색, 노란색이 섞인 빛으로 몸을 보호했다. 또한 백 개가 넘는 비검들이 그를 보호하듯 주위를 날아다녔다.
한립은 고죽 노인의 신중한 태도가 무척 의외였다.
“뇌화궁의 위력이 정말 대단한지 상대가 크게 긴장했습니다.”
“원영 후기 수사의 일격에 맞먹는 영력이 담겼으니 그럴 만하지. 게다가 뇌화궁이 평범한 물건은 아니지 않느냐. 적화교의 뼈와 힘줄로 만든 활에 금뢰죽을 개량한 화살인 것을. 이런 보물을 앞두고 위기를 느끼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지. 상대를 죽일 심산이 아니라면 그만 두자꾸나!”
“알겠습니다. 어차피 저도 살육을 즐기는 성미는 아니니까요. 다만 그렇게 되면 꼭두각시의 능력을 시험해 볼 기회는 놓치겠습니다.”
한립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별 수 없지. 그래도 원영 중기의 최고봉에 이른 수사를 간단히 압도하는 것을 보았으니 여한은 없구나. 반평생의 노력이 헛수고는 아니었어!”
대연 신군이 탄식하듯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한립의 기색이 어두워졌다.
동시에 꼭두각시가 뿜어내는 엄청난 영기가 점점 흩어졌고 상대를 겨누고 있던 활도 내려갔다.
화염과 금빛 뇌전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고죽 노인도 한 시름 놓았는데 등 뒤로 땀이 주르륵 흘렀다.
화살이 자신을 겨냥한 순간 죽을 수도 있겠다고 느낀 것이다. 그는 이제 상대가 원영 후기 수사라는 것을 확신했다.
자신이 폐관을 파하고 나왔으니 망정이지 만목대진이 있다 하더라도 이들을 적으로 돌렸다가는 큰일 날 뻔했다.
그 후 세 수사는 다시 산 정상의 나무 대전으로 돌아갔다.
대결이 끝나고 고죽 노인은 더없이 공손해져서 당장 결단 후기 노인을 시켜 오붕의 깃털을 취하게 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두 수사와 함께 담소를 나누었는데 꼭두각시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한립은 미소를 흘리며 이리저리 말을 돌려 신분에 대해서는 전혀 노출하지 않았다.
고죽 노인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각 후, 노인이 옥함을 가지고 들어와 사부 앞에 공손이 올려놓았다. 고죽 노인이 한립과 려 수사를 보면서 옥함을 밀어주었다. 한립이 옥함을 받아 열어보니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려 수사가 다른 수사들과 교류하기를 꺼려하는 성격이라고 생각해 한립과만 이야기를 했다.
반나절 후, 한립은 꼭두각시와 함께 고죽도를 날아올라 순식간에 하늘 끝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