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548화 (305/2,000)
  • # 548

    548화. 고죽도(苦竹島)

    한립이 손목을 털어내자 핏빛 부적이 빛으로 변해 난쟁이 꼭두각시에 흡수되었다.

    “오, 훨씬 낫구나! 그런데 네 녀석이 이런 부적을 내게 쓰다니 뭐라도 얻어 낼 심산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그저 선배님께서 그간 도와주신 것에 대한 감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한립은 잠시 침묵하다가 담담히 답했다.

    쉭! 쉭!

    대연 신군이 콧방귀를 뀌더니 두 조각이 난 죽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동시에 죽통 조각이 난쟁이를 사이에 두고 붙어 원래의 모양을 찾고는 한립 앞에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한립은 신경 쓰지 않고 거대한 얼음덩이를 녹이고 있었다. 보라색 얼음덩이는 인간형 꼭두각시를 둘러싼 채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한립이 가부좌를 하고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내려치자 푸른빛이 크게 번지며 푸르딩딩한 그의 원영이 나타나 꼭두각시를 향해 날아갔다.

    세 달 후, 한립이 머물던 작은 섬에서 푸른 빛줄기가 하늘로 솟아올라 날아갔다.

    * * *

    고죽도는 대진 해역의 작은 섬으로 1년 내내 남색안개로 덮여 있는 곳이었다.

    그 섬의 주인인 고죽 노인은 내륙 수도자들에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몇몇 원영 중기 수사들은 그를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다 너머의 수사들 중에서도 고죽 노인의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원영 중기의 수행이었지만 365개의 한죽(寒竹) 비검과 고죽도(苦竹島)의 천상신수(天桑神樹)를 지녀, 해외삼선(海外三仙)에 맞먹는 존재감을 자랑했다.

    게다가 고죽도에는 만목대진(万木大陣)이 펼쳐져 있어 원영 후기 수사라도 이 진법에 걸려들면 위력이 한층 떨어지고 말았다.

    * * *

    어느 날, 이 섬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날아들었다.

    멀리서 빛이 번뜩이더니 기다란 빛줄기가 전광석화처럼 안개 위로 날아들었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청년 수사는 문생 복장을 한 한립이었다.

    그는 죽통을 메고 안개 속을 살폈다.

    하얀 안개 말고는 별 다른 것이 보이지 않자 한립이 눈썹을 끌어 올리며 눈동자에서 남색빛을 일렁였다.

    “고죽도라는 곳이 소문대로입니다. 명청령안을 사용해도 완전히 금제를 꿰뚫어 볼 수 없으니까요. 만목대진의 명성이 거짓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고죽도에 있는 오풍의 깃털은 삼염선의 위력을 한층 끌어 올려 줄 것이다. 게다가 고죽 노인 정도면 새로 제작한 꼭두각시의 위력을 시험해 보기에 적절한 상대겠지.”

    죽통 속에서 대연 신군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압니다. 그래서 꼭두각시 제련이 끝나자마자 이곳으로 온 것이지요. 그런데 선배님께서는 얼마나 더 버티실 수 있겠습니까?”

    “네 진혼부 덕분에 꼭두각시의 위력을 볼 만큼은 버틸 수 있다.”

    대연 신군이 조용히 웃자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 안개를 바라보았다. 한립의 손이 저물대를 스치자 푸른 기운이 흘러 나와 그와 비슷한 체격의 창백한 중년 수사의 모습으로 변했다.

    노란 장삼에 옥처럼 고운 피부를 지닌 중년인은 자세히 보면 대연 신군이 깃든 난쟁이와 얼굴이 똑같았다.

    대연 신군이 알려준 방식으로 제련을 하자 질령연옥이 정말 사람의 피부처럼 변한 것이다. 질령연옥이 자유롭게 모양을 바꾸고 한립이 자신의 의식을 분신에 주입해 조종하자 진짜 사람과 한 치도 다를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영석이었다. 고계 꼭두각시가 전력을 다하려면 고계 영석이 필요했는데 고계 영석은 정말 귀했다. 안 그래도 대진에 도착해 시장에 들를 때마다 될 수 있는 대로 고계 영석을 매입했지만 몇 덩이 구하지 못했다.

    아마 전력을 다해 공격하려면 고계 영석 한 개로 일각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갑니다.”

    이제 진짜 위력을 시험해 볼 차례였다. 꼭두각시가 양손을 들어 올리자 푸른 기운이 손바닥에 응결되어 사람 머리만 한 빛덩이가 나타났다.

    푹! 푹!

    꼭두각시가 손목을 털어내자 두 줄기의 빛기둥이 뻗어 나가 안개를 가르며 사라졌다.

    콰쾅! 쾅!

    잠시 후 경천동지할 폭음이 들리고 안개들이 출렁이더니 바람기둥이 나타나 안개를 헤집었다.

    마치 용처럼 꿈틀거리며 안개를 흩어놓자 섬을 뒤덮은 녹색 보호막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그 속에서 열댓 개의 빛들이 나타났다.

    방금 일격에 놀란 섬의 수사들이었다. 한립은 한눈에 그들의 수행이 축기기나 결단기 정도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두 분은 대체 누구시기에……. 헛! 선배님들이셨군요. 고죽도에는 어인 일로 오셨는지요?”

    한립을 보고 노기를 드러내던 결단 후기 수사가 의식으로 그와 꼭두각시를 훑어보고는 바로 말투를 공손하게 바꾸었다.

    “고죽 수사의 명성을 흠모하던 터에 기회가 되어 방문하게 되었네. 고죽 수사에게 만나 뵙기를 청한다 전해 주시게.”

    “일이 공교롭게 되었습니다. 사부님께서 몇 년 전에 막 폐관에 들어가셔서 손님을 맞기 어려우신데……. 그간 고죽도의 일은 제가 관리를 하고 있으니 용건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면 최대한 도와드리겠습니다.”

    “폐관에 들어갔다니 아쉽구만. 그럼 바로 용건을 말하겠네. 듣기로 이 섬에 상고 영수인 오붕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는가?”

    “오붕이요?  어찌 오붕을 찾으십니까?”

    “별 건 아니고 내가 보물을 하나 제련 중인데 오붕의 꼬리 깃털 세 개가 필요해서 말이네. 칠급 요단 하나와 육급 요단 세 개로 교환을 하고자 하니 제안을 수락할지 말지 대답해주게.”

    한립이 바로 소매 속에서 네 개의 옥함을 꺼내 허공에 띄웠다. 그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옥함들이 동시에 열리며 각양각색의 요단이 등장했다.

    “오붕의 깃털과 거래를요?”

    “이곳에 있는 오붕은 칠급 영수라 들었네. 이렇게 많은 요단을 조건으로 내민 것은 내 성의를 보이는 것일세.”

    “오붕이 상고 영수이기는 하나 요단을 4개씩이나 주신다니 충분히 거래할 만합니다. 하지만 제가 이 일을 결정하기 어렵겠습니다.”

    결단기 노인이 주저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한립의 눈이 서늘해졌고 그것을 본 노인은 가슴이 철렁해서 서둘러 해명했다.

    “선배님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희 섬의 오붕이 막 진화를 하려는 참이라 수행에 손상을 주기가 어려워 그렇습니다.”

    “그랬구만. 하지만 오붕의 깃털이 꼭 필요한데……. 이렇게 하지. 내 칠급 요단 하나를 더 주겠네. 그럼 되겠지?”

    한립도 그 말에 잠시 생각을 하다 옥함을 하나 더 꺼냈다. 그 말에 고죽도 수사들은 당황스러웠다.

    “어찌, 이래도 안 된단 말인가?”

    “아닙니다. 사안이 중대하니 저로서는 결정을 내릴 수 없으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벌을 받더라도 사부님께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노인이 한립의 싸늘한 시선 속에 고민하다 그 옆의 인간형 꼭두각시를 슬쩍 보더니 이를 악물었다.

    “그럼세. 잠시 기다릴 수야 있지.”

    그제야 한립이 표정이 풀었다.

    노인은 바로 전음부를 꺼내 한립이 제안한 거래조건을 담아 날려 보냈다. 그 안에는 엄청난 수행의 두 수사로 인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립이 얼마 기다리지 않아 섬에서 어떤 노인의 목소리가 유유히 들려왔다.

    “원영기 수사들이 오셨는데 직접 맞이하지도 못했습니다. 두 분을 영봉각으로 모시거라. 바로 출관하여 뵈러 갈 것이다.”

    고죽 노인은 한립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문하의 제자들에게 명했다.

    “존명! 선배님들 저를 따라 가시지요. 사부님께서 곧 나오실 겁니다.”

    “안 그래도 고죽도의 명성이 자자해서 한번 살펴보고 싶었네.”

    한립이 곁의 꼭두각시를 힐끗 보고는 대답했다. 원영 후기의 꼭두각시가 있었기에 만목대진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별안간 녹색이 갈라지며 섬으로 내려가는 통로가 뚫렸고 한립은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그는 들어가자마자 풍부한 영기를 느낄 수 있었고, 거대한 수목들과 푸르른 이파리들을 보았다. 나무들이 어찌나 큰 지 대부분 서너 장은 넘게 자라 있었고 바깥에서 보기 드문 다양한 나무들이 섞여 있었다.

    그 중에서도 열댓 그루가 다른 나무들보다 확실히 거대하고 신기한 기운을 풍겼다.

    “저것이 귀 섬의 천상신수인가?  듣기로는 단 한 그루뿐이라고 했는데 열 그루가 넘는구만.”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곁의 노인에게 물었다.

    노인은 슬쩍 꼭두각시를 보며 이 선배님은 시종일관 말도 없고 표정도 없는 것이 괴팍한 성정의 노괴가 아닐까 걱정하고 있었다.

    “아, 저 천상신수들은 전부 하나의 뿌리에서 자라난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에는 한 그루인 것이지요.”

    “삼대신목 중 하나라는 천상신수가 이런 모습이었다니. 오늘 견문을 넓혔네 그려.”

    한립이 혀를 차며 신기해했다. 그가 노인을 따라 숲의 어딘가로 향하자 주변 영기가 달라지며 풍경이 바뀌었다.

    수백 장 높이의 낮은 산이 나타났고 그 중앙에 누각 등이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너희는 물러가서 일을 보거라. 선배님들은 내가 모시겠다.”

    노인이 그곳의 다른 수사들에게 손을 저으며 분부했다. 그러자 누각을 드나들던 수사들이 곧바로 뿔뿔이 흩어져 사라졌다.

    한립과 꼭두각시는 노인을 따라 산의 꼭대기에 올라갔는데 그곳에는 나무로 만든 거대한 전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각 문 앞에는 녹색 갑옷을 입은 네 명의 수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모두 기다란 창을 들고 있었다.

    노인이 한립과 꼭두각시를 안내해 나무 전각 앞에 이렀는데도 네 명의 수사들은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네 수사는 축기기 밖에 되지 않았는데 몸에 지닌 나무 속성 영기가 굉장히 정순했고 그들의 갑옷과 창도 전부 최상급 나무 속성 영기였다.

    그를 향해 노인이 먼저 설명을 자처했다.

    “사부님께서 친히 키워내신 목령위(木靈衛)들입니다. 천상신수의 위력을 빌려 특수한 공법을 익힌 자들이라 각각의 수행은 높지 않아도 합격술에 능하지요.”

    “그렇군. 보통 수사들과는 확실히 달라 보이는구만.”

    나무 대전의 구조는 복잡하지 않아서 대청을 제외하면 그 옆의 편전 하나가 붙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한립 등은 대청에 들어가자마자 뒤돌아 서 있는 굉장히 키가 큰 수사를 볼 수 있었다.

    녹색 장포에 눈처럼 새하얀 백발을 기른 자였다. 노인이 그를 보자마자 바로 깊게 허리를 숙이고는 소리 없이 옆으로 비켜섰다.

    “수사께서 고죽 노인이십니까?”

    “예, 노부가 바로 고죽입니다. 두 분의 얼굴이 낯선데 내륙의 분들이십니까?  성함을 알 수 있을 지요?”

    녹색 장포의 수사가 미소 지으며 돌아보았다.

    순간 한립의 눈이 가늘어졌다. 상대는 하얀 백발과 어울리지 않는 청초한 얼굴의 십대 소년이었던 것이다. 고죽 노인 역시 젊음을 유지하는 비술을 익힌 듯 했다.

    고죽 노인도 미소를 머금고 돌아보다가 한립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의아한 빛이 스쳤다.

    “맞습니다. 저희는 해외 수사가 아닙니다. 저는 한 가이고, 이 분은 제 사형이신 려 수사십니다. 갑자기 찾아뵈어 폐가 되지는 않았는지요.”

    한립은 예의바르게 답했다.

    “폐라니요! 두 분 같은 수사들을 모실 수 있으니 제 영광입니다. 특히 려 수사께서는 수행이 남다르신 것 같은데 정확한 수행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고죽 노인이 한립과 그 옆의 꼭두각시를 살폈다. 그는 한립의 꼭두각시를 모종의 비술을 연마한 원영기 수사라고 믿는 듯했다.

    “겸손하십니다. 오히려 저희가 고죽 수사의 위명을 흠모한지 오래인 것을요.”

    “허허, 그러면 앉으셔서 저희 섬 고유의 상목차나 한 잔 하시지요.”

    고죽 노인이 두 수사를 탁자로 안내했다. 그러자 바로 몇 명의 여인들이 차를 담아 대청 안으로 들어와 녹색 영차를 주고 물러갔다.

    “상목차라, 천상신수와 관련이 있는 차인지요?”

    한립이 녹색 차를 내려다보니 나무 속성의 영기가 충만했다.

    “안목이 있으십니다. 바로 천상신수의 잎을 우려 만든 차입니다. 눈과 정신을 맑게 해주는 효과가 있지요. 저희 섬 말고 다른 데에서는 맛보실 수 없는 차입니다.”

    “그럼 꼭 맛을 봐야겠습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