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6
546화. 악교를 멸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방팔방에서 각종 영기의 빛이 번뜩이며 소동이 벌어졌다.
주위가 시끄러워졌지만 한립은 요사스런 붉은 구름 앞에 떠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보라색 빙염으로 온몸이 둘러져 있었고 주위는 붉은 불길로 가득했다.
수십 장 밖에서 반인반수의 교룡이 인간의 형상을 하고 불기둥 속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요수는 전신이 투명한 붉은 비늘로 덮여 있었고 붉은 화염을 내뿜었다.
“과연 적화교로구나! 괜히 시간만 버린 게 아니었어. 팔급 적화교라면 칠급 보다 훨씬 낫겠지.”
“날 노리고 온 것이냐?”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적화교가 기다란 입을 벌렸다. 하얀 송곳니가 번뜩이며 그를 둘러싼 불기둥이 한층 기세를 높였다. 그러나 사실 적화교는 속으로 무척 불안했다.
단숨에 여기까지 날아온 인간 수사는 원영 중기인데다 온 몸에 얼음 속성의 보라색 화염까지 두르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오랜 세월 제련한 요화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눈치니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또한 한립의 덤덤한 표정을 보자마자 적화교는 이유모를 한기를 느꼈다.
“칠급 적화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온 것이었는데 당신이 나타난 것이오. 이미 수련을 통해 인간의 형상을 했으니 나도 아무 이유 없이 도륙할 생각은 없소!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소? 스스로 목에 붙은 본명 비늘 몇 개만 떼어주고 다른 교룡들과 함께 물러나시오. 그럼 나도 당신을 살려 보내 주리다.”
“본명 비늘을 넘기라고? 겨우 원영 중기 수사 주제에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내 너를 죽여 더는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게 하겠다.”
적화교가 한립의 말에 열분을 토했다.
본명 비늘은 교룡류의 요수가 태어나면서 지니는 비늘로 세월이 흐르면서 적잖은 원기와 법력이 모이게 된다. 요단과 비슷한 것으로 본명 비늘을 잃으면 수행이 크게 떨어지게 되니 격분할 만했다.
펑!
화가 치민 교룡이 불기둥 속에서 한 바퀴 돌더니 화염을 뚫고 나타났다. 요수는 본체를 들어내자마자 입을 벌려 용암처럼 새빨간 액체를 토해냈다.
“요화를 액화시키다니, 제련하느라 공을 좀 드렸겠군.”
한립은 요족을 보면서 즉시 입에서 새하얀 구슬을 뿜어냈다. 바로 한기를 지닌 법보 설정주였다. 구슬은 입을 빠져 나와 바로 크기를 키우더니 주먹만 해져서는 곧바로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한립이 구슬을 향해 손가락을 뻗자 맑은 울림이 들리면서 대량의 보라색 화염이 일어났다. 보라색 화염은 단숨에 화룡으로 변해 여의주처럼 구슬을 물고 앞으로 뻗어 나갔다.
그러자 보라색 화룡이 붉은 액체와 맞부딪혔다.
촤륵!
주변으로 수증기가 번지며 시야를 가렸는데, 희미하게 보라색 화룡이 붉은 액체를 조금씩 밀어 붙이는 모습이 보였다. 적화교가 그것을 보고 놀라 눈빛이 흉악해 지더니 전신에서 붉은 기운을 일으키며 포효했다.
한립 주변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그 소리와 함께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그것을 본 한립은 냉소하고는 두 팔을 펼쳤다.
손바닥에서 보랏빛이 번뜩이더니 그의 좌우로 이, 삼십 장의 얼음벽이 생겨났다. 보라색 한기가 번뜩이는 빙벽이 몰아치는 불길을 막아낸 것이다.
그 순간 멀리 있던 적화교가 갑자기 몸집을 키우더니 ‘쉭’ 하는 소리와 함께 빛줄기로 변해 한립을 향해 쇄도하더니 눈 깜짝 할 사이에 한립의 코앞에 이르렀다.
요화가 소용이 없자 날카로운 발톱으로 단숨에 한립을 죽이기로 한 것이다.
순식간에 다가온 적화교를 보면서 한립은 도리어 미소를 지었다. 그가 한쪽 소매를 펄럭이니 등 뒤로 천둥소리가 울리며 은색 날개가 나타났다.
그리고 은빛이 번지며 당장이라도 날카로운 요수의 발톱에 조각날 것 같던 그의 몸이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져 적화교의 발톱은 허공을 갈랐다.
그 순간 요수의 귓가에 뾰족한 파공음이 들리며 붉고 투명한 침이 그의 얼굴을 노리고 날카롭게 찔러 들어왔다.
적화교의 전신을 둘러싸고 있던 붉은 기운을 순식간에 뚫은 것은 요단으로 제련한 침이었다. 요수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한쪽 발톱으로 거대한 얼굴을 부여잡았다.
푹!
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동안 비침은 악교의 한쪽 볼을 뚫고 다른 볼로 튀어나왔다.
불 속성 요단으로 만들었기에 적화교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기는 무리였지만 볼을 꿰뚫는 순간 붉은 침이 몇 배로 불어나 손가락만한 구멍을 뚫어놓았기에 요수가 이렇게 고통스러워하게 된 것이다.
꽈광!
적화교가 미쳐 날뛰기도 전에 뒤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고 한립의 신형이 나타나 팔을 휘둘렀다. 그리고 금색의 검이 흉흉한 기세로 요수를 내리쳤다.
깜짝 놀란 적화교는 극심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꼬리를 휘둘렀다. 한립을 단숨에 으깨버릴 기세였다. 한립은 교룡의 빠른 반응에 흠칫 놀랐다.
이에 그도 멈추지 않고 금색 검을 꺾어 먼저 교룡의 꼬리를 자르려 했다. 결국 금빛의 검이 적화교의 꼬리와 충돌했고 금빛이 붉은 육체를 천천히 파고 들었다.
적화교가 서둘러 전신의 요력을 꼬리로 모으자 꼬리 부분의 비늘들이 투명한 붉은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쿵!
금빛과 붉은 빛이 서로 힘겨루기를 시작하자 눈부신 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한립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남색빛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상황을 주시했다.
몇 개의 비검을 합쳐 만들어낸 검이 뜻밖에도 한 번에 교룡의 꼬리를 자르지 못하고 단단한 뼈에 박혀 버렸다.
한립은 즉시 수결을 맺어 비검을 회수한 후 다시 내리치려했으나 교룡의 꼬리는 금빛 검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제 법보도 없이 어찌 날 상대할 테냐!”
적화교가 광소를 하며 입을 벌리자 주먹만 한 붉은 구슬이 나타났다.
‘요단!’
남색빛이 일렁이는 한립의 두 눈에 붉은 요단이 분명히 보였다. 정면 승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니 본명 법보를 잡아 두고 요단으로 그 틈을 노린 것이다.
순간 안색이 달라진 한립의 신형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세 명의 한립이 허공에 나타났다.
그 모습에 당황한 적화교는 어느 것이 진짜인지 분간해내지 못했다. 세 한립은 동시에 소매를 털며 기다란 금빛을 분출했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날아드는 세 줄기 금빛에 적화교는 식겁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요단의 방향을 틀어 중간 금빛을 향하게 하고 양 발톱을 휘둘러 붉은 빛을 좌우로 흩날렸다.
한립의 비검이 날카롭긴 하지만 셋 다 진짜일 수는 없다고 여긴 것이다. 셋 중 하나는 요단이 막아줄 것이고, 나머지는 강력한 발톱이 막아낼 것이다.
쾅!
안타깝게도 거대한 소리가 울리고 붉은 요단이 금빛에 튕겨나갔고 금빛 속에 있던 비검도 원형을 드러냈다.
“중간에 있던 비검이 진짜였구나!”
적화교가 안심한 순간, 양 발톱이 서늘해지며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양 발톱을 대부분 잘라낸 금빛이 순식간에 교룡에게 쇄도한 것이다.
“헛!”
요수는 놀라 빛을 번뜩이며 뒤로 물러 나려했다.
그러나 그때 밑에서 보라색 연꽃이 피어났다. 연꽃의 그림자가 번뜩이는 곳마다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한기가 터져 나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 짧은 머뭇거림은 금빛 검이 교룡의 머리를 잘라낼 시간을 내주고 말았다.
스륵.
거대한 교룡의 머리가 목에서 떨어져 내렸다.
한립은 소매 속으로 몰래 수결을 맺어 전신의 영력을 좌우로 날아가는 비검에 몰아준 것이다. 덕분에 경정이 들어간 비검은 완전히 위력을 발휘해 두꺼운 교룡의 비늘을 가를 수 있었다.
이때 두 명의 한립이 푸른빛을 번뜩이며 사라졌다.
가운데 서 있던 한립은 요수의 머리가 분리되는 순간에도 손을 쉼 없이 움직이며 비검을 향해 손짓했다.
꽈광!
두 줄기 두꺼운 금빛 뇌전이 비검에서 빠져 나와 금색 그물을 쳤다.
잠시 후 떨어져나간 교룡의 목에서 붉은 빛이 반짝이며 작은 교룡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체구가 작은 교룡은 그물에 걸려들었고 결국 새장 속의 새처럼 갇히고 말았다.
교룡의 혼백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죽을힘을 다해 새빨간 화염을 뿜어대며 그물을 뚫고 나가려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한립은 다른 수사의 원영처럼 뇌전을 터트려 교룡의 혼백을 멸하지는 않았다.
그는 곧 청록색 작은 병을 꺼내 그물을 향해 손짓했고, 그물에서 가느다란 뇌전이 흘러나와 버둥거리는 교룡의 혼백을 옭아맸다. 붉은 교룡은 어느새 주먹 크기의 금빛 구체로 변하고 말았다.
그가 병을 금빛 구체를 향해 기울이자 하얀빛이 새어나와 그것을 휘감아 돌아갔다. 그제야 한립의 표정이 편해졌다.
“영영술(靈影術)이 별 것은 아니지만 실전에서 사용하기에 나쁘지 않구나. 금하산(金霞山) 제자들이 대대손손 전승할 만 해.”
한립이 중얼거리며 교룡의 시체를 향해 손짓하자 금빛 비검이 교룡의 꼬리에서 나와 돌아왔고 분리된 머리와 육체도 미리 준비한 저물대 속으로 들어갔다.
주인을 잃은 팔급 요단도 잊지 않고 회수했다.
그러자 적화교가 만들어낸 요사스런 안개와 불바다도 자연스럽게 흩어져 사라졌다. 한립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다른 수사들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결단기 수사들은 수적으로 우세했기에 별 문제가 없었다. 압승을 거두지는 못해도 밀리지는 않았다. 그런데 또 다른 팔급 악교와 겨루고 있는 원영기 거한은 무척 위태로웠다.
“팔급 요수는 찾는다고 쉽게 찾아지는 것도 아닌데, 이참에 한 마리 더 챙겨야겠구나.”
한립이 눈을 번뜩이며 날아가려하자 조용하던 대연 신군이 그를 나무랐다.
“녀석아 너무 욕심 부리지 말거라. 이미 다른 수사들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으니 괜히 시간을 끌다가는 조용히 빠져나갈 기회를 놓칠 게다. 남해문이 이렇게 공을 들여 악교를 소탕했는데 네가 전부 챙겨간다면 가만 둘 성 싶으냐?”
“벌써 말입니까? 동작도 빠르군요. 그럼 됐습니다. 조금 아쉽기는 해도 당장 자리를 뜨는 것이 낫겠습니다.”
한립이 의식을 퍼트려 사실을 확인하고는 마지막 남은 붉은 기운이 흩어지기 전에 그 자리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그리고 그때 팔급 남색 교룡이 적화교가 죽은 것을 알고는 분노해 더욱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밀리고 있던 원영기 거한은 속으로 울상을 지으며 지금이라도 달아날까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영기의 빛이 번뜩이며 각각 열댓 명의 수사들이 이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남색의 팔급 교룡은 먼저 그것을 감지하고는 길게 포효하며 바닷속으로 피하려 했고 그 소리를 들은 다른 칠급 악교들도 놀라 분분히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하지만 거한은 물론이고 나머지 수사들이 그렇게 놔둘 리 없었다. 다시 일순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때 한립은 벌써 백 리 밖으로 물러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날아가는 중이었다. 적화교도 처리했으니 이제 영맥이 없는 섬을 찾아 대연 신군의 꼭두각시를 제련하는 일만 남았다.
* * *
한립은 인근 해역의 지도를 미리 구입해 두었기에 수사들이 잘 지나지 않는 곳을 위주로 반 개월을 돌아 이름 없는 작은 섬에 도착했다.
겨우 사십 리 정도의 섬은 보잘 것 없는 영맥이 흐르고 있었다.
내륙이었다면 이마저도 작은 세가가 차지했겠지만 이곳은 요수들이 득실거리는 바다 한가운데였다. 작은 세력의 세가는 이곳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고 규모가 큰 세력은 이런 약한 영맥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한립은 만족하며 작은 산에 터를 다지고 천기부를 방출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작은 거처가 마련되었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한립은 거처 자체의 금제 외에도 산의 모습을 감추는 진법을 설치해 대량의 안개를 불러들였다. 이제 섬은 십 리에 이르는 안개 속에 가려져 이곳을 지나는 수사가 있더라도 쉽게 발각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