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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545화 (302/2,000)
  • # 545

    545화. 악교(惡蛟)

    한립은 천부문(天符門)의 제안에 입 꼬리를 올렸다.

    “너희 세 가문의 객경장로(客卿長老)를 맡아 달라니. 내가 제안을 수락할 듯싶은가?”

    “저희 같은 작은 종문에서 선배님을 봉양할 능력이 안 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저 저희가 처한 작은 어려움을 선배님이 나서서 해결해 주시면 앞으로는 이름만 객경장로로 모시고 더는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온 노인은 불안해하다 한립이 크게 불쾌해하지 않자 재빨리 설명했다.

    “한 번만 도와주면 앞으로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물론 저희 세 문파도 선배님에게 그냥 부탁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 천부문에서 화령부의 비술을 바칠 것이고, 금하산(金霞山)과 명양곡(明暘谷)에서도 전승되는 비술 중 최고의 것을 선배님께 드릴 것입니다. 또한 영석 몇 만 개를 준비했으니 보잘 것 없는 성의지만 받아주시기를 간청 드립니다.”

    이야기가 여기까지 나왔으니 온 노인이 조건을 바로 제시했다. 괜히 말장난을 하다가 상대의 심기를 건드릴 수도 있었다.

    “영석 몇 만 개?”

    “또한 세 문파가 매년 일정한 영석을 바칠 것입니다. 그리고 본 문을 창립하신 조사(祖師)께서 친히 제련하신 화령부도 드리겠습니다. 아마 선배님의 수행이면 충분히 제련하셔서 유용하게 쓰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온 노인이 이를 악물고 최후의 조건을 덧붙였다.

    “천부문을 창립하신 조사라면 천부 진인을 말하는 것이더냐?”

    “예, 바로 그분의 보물입니다. 조사님께서는 신통력이 대단하셨지만 완배들의 능력이 그에 따라주지 못해 줄곧 어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오랜 세월 전승되며 점점 영성을 잃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지요. 선배님께서 제대로 써주신다면 저희에게도 감사한 일이지요.”

    이번에는 장문인인 악진이 나서서 말했다.

    “그런 보물이 있다면 어디 구경이라도 하고 싶네만.”

    “악 사질, 어서 화령부를 꺼내 선배님께 보여드리시게.”

    한립이 관심을 드러내자 온 노인은 크게 기뻐하게 분부했다. 그가 천부문에서 가장 수행이 높은 수사였지만 천부 진인이 사용했던 부적은 오직 역대 장문인만 계승할 수 있었다.

    “예, 사숙님!”

    악진이 즉시 저물대를 스치자 푸른빛이 번뜩이는 노란 목함이 나타났다. 목함의 표면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았지만 고풍스러웠고 그 위에 금빛이 흩날리는 부적이 붙어 있었다.

    한립이 한 손으로 목함의 뚜껑을 쓰다듬자 부적이 소리 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온 노인 등 결단기 장로들은 깜짝 놀랐다.

    영기를 이용해 금제 부적을 가볍게 제거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수행이 높은 것도 중요하지만 법력을 자유자재로 아주 미세하게 운용해야 했다.

    옥함이 열리고 푸른빛의 나타나자 정순한 나무 속성의 영기가 물씬 풍겼다. 한립은 내심 놀라고 말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부적의 영성이 크게 줄었을 텐데도 아직도 이런 위세를 뿜어내다니 확실히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다.

    거기다 화령부가 뜻밖에도 나무 속성 영부(靈符)라는 사실이었다. 그의 공법과 서로 도우면 배양하기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그는 부적을 꼼꼼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손바닥만 한 부적은 푸른 물이 떨어질 듯 맑았고 금색과 은색으로 적힌 주술도 신묘했다.

    그러나 그의 눈길을 끄는 것은 부적 중앙의 작은 보라색 점이 서서히 이동하며 반짝인다는 것이었다.

    한립이 푸른 기운이 감도는 손으로 목함 속의 부적을 꺼내려 했다. 부적은 부르르 몸을 떨더니 돌연 푸른빛으로 변해 옥함 속에서 뛰쳐나왔다.

    얼굴을 굳힌 그가 다른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자 환영처럼 나타난 빛의 손이 부적을 쥐고 돌아왔다. 지켜보던 수사들은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이게 바로 화령부로구나. 과연 남달라. 천부 진인이 당시 원영 후기의 수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화령부에 남아 있는 천부 진인의 원기가 너무 강력해 일반적인 수사들은 연화(煉化)에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야. 반드시 자신의 원신을 이용해 새롭게 배양을 해야 하는데 몇 십 년 내로 가능한 일이 아니니, 일을 그르치면 백 년이 넘는 고생이 허사로 돌아갈 수도 있겠구나.”

    손가락 사이로 살아 있는 물고기처럼 꿈틀거리는 영부(靈符)를 보며 한립이 웃음을 흘렸다.

    “그럼 선배님께서는…….”

    한립의 말에 온 노인과 다른 수사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그건 원영 초기의 수사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이고. 난 중기에 이른데다 나무 속성 공법을 주로 수련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쓸모가 있겠어.”

    “저희의 청을 들어 주신다는 말씀이시군요!”

    “일단 내가 해결해줘야 할 일에 대해서나 이야기해 보거라. 크게 성가신 일이 아니라면 바로 나서줄 수도 있으니 말이야.”

    한립이 바로 손을 털자 영기를 발산하는 부적이 다시 목함으로 돌아갔고 뚜껑이 스스로 닫혔다.

    “당연히 말씀 드려야지요. 사실 저희 세 문파가 관리하고 있는 시장과 관련된 일입니다. 며칠 전…….”

    온 노인이 서둘러 시장과 살양종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일각이 지나고 한립은 푸른빛줄기로 변해 백죽산(白竹山)을 떠났다.

    * * *

    며칠 후 화운주(華云州) 일대의 수도자들 사이에서 소문이 돌았다.

    스스로 천부문의 객경장로라는 한 씨 성의 수사가 돌연 마도 살양종의 산문에 나타나 실력을 겨뤄 본다는 구실로 살양종의 유일한 원영기 장로를 패배 시킨 후 홀연히 떠났다는 이야기였다.

    그리하여 이튿날 살양종의 지원을 받던 영풍문(靈風門)이 개강진(開江鎭) 인근의 시장에서 세력을 철수해 만 리 밖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그 소식을 들은 다른 작은 종문들은 깜짝 놀라 곧바로 세력을 철수했고 결국 그 넓은 지역은 천부문 등 세 문파의 수중에 떨어졌다.

    천부문, 금하산, 명양곡은 원영 중기 객경장로의 위세를 빌려 하루아침에 위상이 달라진 것이다. 앞으로 백년 내로 세 문파의 세력이 훨씬 커질 것은 분명했다.

    이때 화운주 제1의 종문인 남해문(南海門)은 악교를 도륙하자는 의미로 도교대회를 열었는데 며칠 만에 결단기 이상의 수사가 이백여 명, 원영기 수사들만 해도 열 명이나 모여들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남쪽 해변을 수색하며 악교들이 숨어 있는 곳을 찾아내려 했다. 그리하여 저계 요수들은 발각되자마자 죽임을 당했고 수사들의 기세가 드높아 아무도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악교들은 교활하기 그지없어 시종일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수사들은 몇 개월을 뒤져도 그들의 종적을 찾지 못했고 일부 수사들은 참지 못하고 떠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몇 개월 후, 남은 수사들은 백여 명 정도 되었고 원영기 수사들은 남해문(南海門)을 위주로 한 일곱 명이 다였다.

    이렇게 되니 해안을 수색할 인원이 부족해졌고 악교들은 이 기회를 틈타 다시 빈번하게 홀로 다니는 수사들을 공격했다. 심지어 팔급 남색 교룡은 인원수가 적은 수사들의 무리를 몇 번이나 노리기도 했다.

    비록 각 무리에 원영기 수사들이 배치되어 있었지만 남색의 팔급 교룡의 신통력이 만만치 않고 수둔술(水遁術)을 사용해 공격하고는 해저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그래서 교룡들을 처단하기는커녕 거꾸로 결단기 수사들 몇 명만 잡아 먹히고 말았다.

    이에 인간 수사들은 겁을 집어먹기 시작했지만 남해문(南海門)은 이미 시작한 일을 돌이킬 수 없어 남은 인원으로 무리를 유지하며 계속 수색을 이어나갔다.

    어느 날 열댓 명으로 이뤄진 무리가 원영기 수사의 지휘를 받아 해수면 위를 비행하며 바닷속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 뒤에 한립이 중년 수사의 모습으로 얼굴을 바꿔 따라가고 있었다. 그는 차분한 얼굴이었지만 속으로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도교대회가 시작되자마자 바로 결단기 수행으로 위장해 무리에 합류했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수확이 없었던 것이다.

    이전 몇 개월은 그렇다고 치고 최근 악교들이 다시 활동을 시작해 다른 무리들은 한두 번씩 기습받았다는데 유독 한립이 속해 있는 무리만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지금 그들은 경영도 서쪽 해역을 탐색하는 중이었다. 며칠 전 수사들이 이곳에서 팔급 남색 악교의 기습을 받고 돌아왔기에 남해문(南海門)에서 그들을 파견해 살피게 한 것이다.

    한립은 원영기 수사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방원 십 리 정도만 파악하고 있었다.

    이 정도 범위면 충분히 먼저 악교들의 행적을 확인해 기습당할 걱정은 없었다. 열댓 명의 수사들이 해역을 전부 돌았지만 예상한대로 악교들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저게 뭐지?”

    앞쪽에서 날던 수사 하나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닷속을 살피던 한립은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잠시 후, 하늘 끝에서 요사스런 회색 구름이 생겨나 머리위를 뒤덮으며 날아오고 있었다.

    “드디어! 안에 분명 고계 요수가 있을 겁니다.”

    “이상합니다. 이전에 악교들은 우리를 보면 달아나기 바쁘지 않았습니까?  어찌 스스로 찾아든단 말입니까?  무슨 간계를 부리려는 것은 아닌지.”

    수사들이 웅성거리며 기뻐하자 또 다른 수사가 의구심을 드러냈다. 무리를 이끄는 원영기 수사도 그들의 말을 듣고는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의식을 퍼트려 살피고는 안색이 변해 재빨리 소리쳤다.

    “경계를 강화하라! 또 다른 요수도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다.”

    그 말에 다들 깜짝 놀라 법보를 꺼내들었지만 주변 어디에도 요수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시선을 교환하며 원영기 수사를 바라보는데 순간 날카로운 교룡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강력한 요기가 풍기는 구름이 하나 더 등장했다.

    이제 구름 속에서 교룡의 거대한 육체와 반짝이는 비늘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동쪽과 서쪽에서 다가오는 구름은 다른 것들에 비해 확실히 거대했는데 각각 남색과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말도 안 돼! 팔급 요수가 두 마리나!”

    의식으로 요수들을 확인한 수사들의 안색이 바뀌었다.

    팔급 요수가 기습에 만족하지 못하고 동급의 요수를 불러 수사들을 함정에 빠트린 것이다.

    “다들 멍하니 뭐하는 것이냐. 어서 다른 무리에 전음부를 보내 도움을 청하고 응전한다. 악교들이 한데 모일 때까지 기다리면 상황은 더 나빠질 게야.”

    원영기 거한은 평정을 유지하며 다른 수사들에게 일갈했다. 그 말을 듣고 결단기 수사들도 정신을 차렸는지 서둘러 전음부를 날려 보냈다.

    “내가 팔급 악교를 한 마리 맡을 테니 나머지 한 마리는 둔술이 빠른 수사 두 명이 맡는다. 요수를 피하면서 시간만 끌면 된다. 나머지 수사들은 흩어져 칠급 악교를 상대한다.”

    거한이 빠르게 계획을 밝히자 결단기 수사들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칠급 악교와 싸워 목숨을 부지할 자신은 있었지만 단 두 명이서 팔급 악교와 싸우라니 무리였다.

    “두 명이 안 되면, 세 명이 가면 되지 않느냐!”

    원영기 수사가 상황을 파악하고 급히 말을 바꾸었다. 그런데 그 순간 엄청난 파공음이 들리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평범한 용모의 수사 하나가 갑자기 엄청난 기세를 일으키고는 푸른 빛줄기로 변해 붉은 구름 쪽으로 날아간 것이다.

    “원영기 수사, 게다가 원영 중기!”

    수사들은 놀라면서도 다들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원영기 거한도 순간 멈칫했지만 기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남해문(南海門)에서 이번 원정에 함정이 있을것을 눈치 채고 원영기 수사를 몰래 딸려 보낸 것이 아닌가 짐작했다.

    이에 거한은 남색 빛줄기로 변해 남색 구름을 향해 몸을 날렸고, 결단기 수사들도 원영기 수사들이 팔급 요수 한 마리씩 맡아 사라지자 내심 안심하며 몰려드는 요수의 구름을 향해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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