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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544화 (301/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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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4화. 밀부와 팔급 악교(惡蛟)

    노인은 웃음을 잃지 않고 공손히 물러났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한립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연 선배님, 저 자의 수행을 파악하실 수 있겠습니까?  가장 강력한 의식으로 살펴보니 연기기 수행이 환술에 불과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진정한 수행은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아래가 텅 비어있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이었어요.”

    “나도 마찬가지다. 내 강력한 의식에도 똑같았어.”

    “그런다면 저 자의 의식이 선배님의 의식보다 훨씬 강하다는 뜻일까요?”

    “그럴 리가. 나보다 의식이 강력한 자가 있을 수는 있어도 그렇게 큰 차이가 나기는 어렵다. 특수한 비술을 익혔거나 진귀한 보물을 지니고 있어 이런 수행이 노출되는 것을 막아 주는 것일 수도 있으나….…”

    대연 신군이 확실히 말하기를 꺼렸다.

    “그것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상대가 이미 화신기에 이르러 전신의 영력이 체내의 경맥을 타고 흩어져 있을 수도 있지. 원영조차 잠시 무형으로 만들 수 있고 말이야.”

    “화신기 수사라니!”

    한립은 대경실색했다.

    “직접 화신기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들은 바에 따르면 그것이 화신기의 가장 기본이 되는 능력 중 하나이다.”

    “하지만 화신기 수사가 어째서 인계에 머물고 있겠습니까?  벌써 영계로 승천하지 않고요.”

    “나도 천하를 떠돌며 한 번도 화신기 수사를 만나 본적은 없지만 인계에 남아 있는 화신기 수사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닐 테지. 능력이 된다고 해서 모두 영계로 승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흥, 아직 원영 후기에도 이르지 못한 녀석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서 무엇 하겠느냐?  구체적인 이유는 직접 화신기에 이르면 알게 되겠지.”

    “그건 그렇습니다. 그럼 아래층의 노인이 정말 화신기 수사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군요.”

    대연 신군의 말에 한립은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한 가지 가능성일 뿐이지만, 저자에게서 얼핏 두려운 느낌을 받았다.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을 게야.”

    “저도 위기감을 느꼈는데 역시 착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까 갑자기 말을 바꾼 것이지요. 저계 제자의 신분으로 천남과 대진을 오가며 나타났을 때에는 분명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굴어야 겠지요.”

    “그래야겠지. 그럼 어서 천부문을 떠나는 것이 어떻겠느냐?  화신기 수사가 살인멸구라도 하려 들면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텐데.”

    “그런 생각도 해보았지만 지금 급히 떠나면 괜히 상대의 의심을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척 며칠을 보내는 것이 낫겠지요. 게다가 이름과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는 것을 보면 무슨 사정이 있겠지요. 그렇지 않고서야 높은 수행으로 숨어 살 이유가 없지요.”

    “일 리가 있구나. 노부가 생각이 짧았어.”

    대연 신군이 헛웃음을 짓다가 말을 이었다.

    “혈영둔을 사용하느라 허비한 원기를 거의 다 회복했겠지?  이제 꼭두각시 제련에 슬슬 들어가자꾸나.”

    “예, 선배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아도 악룡들을 처리하고 바로 꼭두각시 제련에 들어갈 생각이었습니다. 적화교의 내단은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니까요.”

    “드디어 죽기 전에 꼭두각시들이 완성되는 것을 볼 수 있겠구나! 그나마 여한이 줄겠어.”

    대연 신군이 만족스럽게 웃어 댔다. 한립도 미소를 짓다가 소매를 털자 진법 법기 한 벌이 튀어나와 주변으로 사라졌다. 주위에 몇 층의 결계를 친 것이다.

    * * *

    한립은 천부문 서고에서 삼일 밤낮을 보냈다. 그 동안 2층과 3층에 소장된 부적 관련 서적은 전부 살펴볼 수 있었는데 독특한 부적 제련 방법이 적지 않았다. 한립은 거침없이 필요한 내용을 복제해 나중에 한가할 때 살펴볼 수 있도록 해두었다.

    그는 경전 속에서 천부문의 비밀 부적에 대한 기록을 찾고는 내심 놀랐다.

    화령부(化靈符)는 부적을 체내로 주입해 단전에서 배양하면 나중에 활용방법이 무궁무진했다. 법보처럼 제련을 거쳐 위력을 늘리면서도 마도의 대법처럼 공법의 반사를 당할 일도 없었다.

    육정천갑부(六丁天甲符)는 주변의 천지영기를 모아 여섯 겹의 보호막을 펼칠 수 있는 비술이었는데, 주변의 영기가 충분하다면 여섯 겹의 보호막이 계속 재생되어 마치 화신기 수사처럼 천지영기를 끌어다 쓸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비술 중 하나였다.

    3대 부적 중 하나인 화령부(化靈符)는 그나마 결단기 수사 이상만이 단전을 이용해 배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화령부의 위력은 배양하는 수사의 수행과 기간에도 영향을 받았지만 본 재료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졌다.

    육정천갑부(六丁天甲符)의 경우는 일단 제련만하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었는데 부적의 위력도 주변 영기에 따라 달라졌다. 영기가 농밀한 지역이라면 다른 곳보다 엄청난 위력을 자랑하게 된다.

    하지만 역대 천부문 장로가 기록한 것에 따르면 육정천갑부를 제련할 방법이 기록된 옥간이 천부 진인 사후에 사라졌다고 한다. 몇 대에 걸쳐 그것을 찾아 왔지만 실마리조차 잡아내지 못했다.

    이제 천부문이 거의 몰락해 그 일에 대해 알아보려는 이도 남지 않았다. 다만 강령부는 재료를 구하는 것이 문제라 이전에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이렇다 보니 천부문의 3대 부적이라고 말만 거창하지 실제 사용되는 것은 화령부(化靈符) 뿐이었다.

    한립은 나머지 부적에 대해서도 흥미가 생겼다. 무엇이든 그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 * *

    사흘 후 한립은 마지막 옥간까지 확인하고는 기지개를 펴며 의식으로 1층을 살펴보았다. 향지례는 아직도 1층에 머물고 있었다.

    이전의 향 사형은 아주 성실해서 가부좌를 틀고 수련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우스운 일은 그가 경전을 살피기 시작한 첫날부터 누각 바깥에 축기기 수사들이 서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치 그가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날까 걱정하는 눈치였다.

    생각을 정리한 그가 누각을 내려갔다.

    “선배님, 서책들을 전부 보셨는지요.”

    노인이 한립이 나오는 것을 보고 손에 들고 있던 옥간을 치웠다.

    “봐야 할 것은 충분히 살펴보았네. 그럼 수고하게.”

    한립은 미소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마지막 말을 하고는 누각을 걸어 나왔다. 그의 뒤에서 노인의 눈빛에 이채가 돌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나오자 그를 데려다 주었던 양 씨 성의 축기기 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양 수사는 그를 향해 예를 취하고는 공손히 대전으로 모시겠다고 말했다.

    이에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를 따라갔다. 중년 수사가 신이 나서 전음부를 날려 보냈다.

    대전 안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천부문 고위층 몇 명 말고도 낯선 얼굴의 결단기 수사 둘이 더 있었는데, 낯선 얼굴의 사내와 여인은 사십 대 정도로 보였다.

    온 노인 등이 한립을 향해 인사를 하고는 바로 소개에 들어갔다.

    “이쪽은 금하산의 상 수사와 명양곡의 사 수사입니다. 두 수사께서 선배님이 찾아오신 것을 듣고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하여 며칠 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부적 관련 서책을 찾아보느라 두 수사를 오래 기다리게 했구만.”

    “아닙니다. 선배님을 뵐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희의 영광이지요.”

    사내와 여인은 한립의 수행을 보고 기뻐하는 티가 났다. 사실 원영기 수사가 나타났다는 말에 반신반의했던 것이다.

    세 가문이 비록 약소하지만 힘을 합쳐 근근이 버티는 중이었으니 원영기 수사와 관련을 맺으면 이로운 점이 많을 것이다.

    한립이 자리에 앉고 다들 앉으라는 손짓을 하자 결단기 수사 셋과 악진이 그제야 자리를 잡았고 다른 축기기 수사들은 고개를 숙이고 옆에서 대기했다.

    “며칠 동안 수확은 있으셨는지요. 저희 명양곡도 부적에 능하지는 않지만 관련 경전이 꽤 있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다면 언제는 찾아오셔도 좋습니다.”

    사 여인은 용모는 평범했지만 목소리가 맑고 좋았다.

    “그럴 필요까지야. 해야 할 일이 있어 임강부에 다녀와야 하네.”

    “임강부라면 악교(惡蛟)들 때문에 가시는 것입니까?”

    상 씨 성의 사내가 놀라 물었다.

    “그 일에 대해 아는가?”

    “최근 임강부의 수사들이 전부 그 악교들 때문에 난리지요. 아마 선배님께서 들으신 소식이 최근 소식이 아닐까 염려가 됩니다.”

    “반년 전에 어느 시장에서 얼핏 들은 소식이긴 하네만. 악교들이 칠급 정도의 수행이라고 하니 이리 빨리 토벌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러기는커녕 대대적인 매복 작전을 벌여 겨우 한 마리를 처리하고 잡아먹히거나 다친 수사들이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 원영기 수사께서도 한분 다치셨다 들었습니다.”

    “원영기 수사가 부상을 당하다니 어쩌다 그런 거지?”

    “악교 무리 중에 팔급 화형기 교룡이 섞여 있었다는 군요. 그 남색 교룡 때문에 매복하고 있던 수사들이 크게 당했습니다. 나중에는 남해문 몇몇 장로들이 나서서 물리치려 했지만 그들을 죽이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그 후 악교들이 해변의 몇몇 섬에 숨어 홀로 돌아다니는 수사들이나 범인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원영기 수사들이 나타나면 즉시 깊은 바다 속으로 수둔술을 펼쳐 달아나고요. 최근 점점 흉흉해지고 있어 해남도에서 여러 고계 수사들을 경영도에 모아 대대적으로 교룡을 도살한다고 하더군요. 어쨌든 팔급 교룡은 귀하니까요.”

    “팔급 교룡?”

    한립은 별 말은 안 했지만 이전에 그가 죽인 팔급 독교를 떠올렸다.

    팔급 요수는 천지영수로 태어나 수행을 쌓았기에 원영기 중급 수사를 상회했다. 게다가 바다에서 싸운다면 그들이 더욱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팔급 남색 교룡이 아니라 다른 것을 위해 그곳에 가는 것이었다.

    “악교 무리 중에 적화교와 비슷한 붉은 화교가 있다던데. 그것도 섬에 있는 가?”

    “적화교……. 아, 붉은 교룡이 한 마리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적화교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럼 되었네.”

    한립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전에 모인 수사들은 한립의 표정이 풀어지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그때 온 노인이 다른 두 수사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물었다.

    “한 선배님처럼 뛰어난 수행을 지니신 분이면 분명 어느 큰 문파의 장로시겠지요?”

    “워낙 구석진 곳 출신이라 대진 종문의 장로직은 맡지 못했네.”

    한립이 세 수사들을 훑으며 답했다. 그의 시선에 온 노인 등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대답을 듣고는 기뻐하는 기색이 확연했다.

    “이미 강령부를 연구해 보셨다니 선배님이 보시기에는 어떠십니까?”

    “온 수사,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하시게. 설마 내가 천부문에 들어가길 기다리는 건가?”

    “오해십니다. 그런 생각을 할 리가요! 그저 저희 세 가문이 공동으로 모시는 객경장로가 되어 주실 수는 없을지 여쭤보고 싶었습니다.”

    불쾌한 기색을 읽은 온 노인이 놀라 바로 생각하고 있던 바를 내뱉었다.

    객경장로는 대진 특유의 장로제도로 중소문파에서 고계 산수를 위해 마련한 특수한 직책이었다.

    객경장로는 일반장로와는 달리 그냥 이름만 걸어 놓은 자리로 종문의 문규에 구속을 받지도 장문인이나 다른 고위층의 명령을 받지도 않는다. 그저 종문이 어려운 일에 처하면 약간 도와주는 정도로 충분했다.

    게다가 이것도 객경장로의 마음에 따라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었다.

    대진에는 작은 종문들이 너무 많아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이었는데, 원영기 수사들의 수가 문파의 수보다 턱없이 부족한 것이 원인이었다. 중소 문파들은 몇몇 원영기 산수들을 객경장로로 삼아 잠시 문파의 안녕을 유지할 수 있었다.

    고계산수들 중에도 문파의 구속은 싫고 대우는 받고 싶은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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