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3
543화. 이 사질
잠시 후 제자들 뒤의 결계가 흔들거리더니 열댓 장에 이르는 산문이 드러났다. 몇몇 수사들이 나타나 한립을 훑더니 안색이 급변해 다가왔다.
노란 비단 장포를 걸친 노인이 급히 한립을 향해 예를 올렸다.
“천부문의 장문인인 악진이라 하옵니다. 선배님께서 이런 누추한 곳을 찾아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는 몇 번 원영기 수사들을 보았었기에 그들과 비슷한 강대한 기운을 풍기는 상대를 보면 겁에 질렸다. 원영기 수사라면 그들 전부를 죽이는 것도 한 순간이었다.
“당황할 것 없다. 부탁을 받아 온 것이니.”
한립은 그들이 불안해하는 것을 보며 미소 지었다.
“부탁이요? 완배가 어리석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으나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 하시지요. 모시겠습니다.”
악진은 조금 마음을 놓으며 한립을 안으로 청했다.
“그래, 그러자꾸나. 이 일은 확실히 몇 마디로 설명되지 않을 테니까.”
“예, 이쪽으로 가시지요.”
악진이 기뻐하며 안내하자 한립도 산문을 통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백죽산은 그다지 높지 않았고 문내의 건물들도 많지 않았다. 대전 하나와 누각 몇 개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제자들이 머무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악진은 한립을 대전 건물로 안내했다.
안에서 천부문 복색이 아닌 중년 수사 둘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수사는 한립을 보고 안색이 급변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예를 올렸다.
한립은 차분히 팔을 젓고는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나머지 수사들이 감히 동석하지 못하고 서 있는데 악진이 두 수사에게 말했다.
“저희 문중에 귀한 손님이 찾아와 주셔서 두 분과는 다음번에 상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선배님이 찾아 오셨는데 당연히 그러셔야지요.”
“그래요. 저와 노 형은 먼저 물러나겠습니다.”
두 수사가 서둘러 대답을 하고는 한립에게 예를 취한 후 대전에서 물러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바깥에서 하얀빛이 대전 안으로 들어왔는데 하얀 장포를 입은 노인이었다.
악진과 다른 수사들이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고 ‘온 사숙’ 혹은 ‘온 사백’ 등의 호칭으로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노인은 한립을 보고는 대번에 안색이 변해 서둘러 포권을 했다.
“사질들에게 누군가 본 문을 찾아 주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원영기 선배님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직접 나가 맞이하지 못하였으니 큰 실례를 범하였습니다.”
천부문의 유일한 장로는 더없이 공손했다.
악진 등 축기기 수사들이 온 노인의 말에 확신을 갖고 경외감이 어린 눈빛으로 한립을 쳐다보았다. 원영기 수사는 천부문에서 만나기 어려운 존재였다.
“부탁을 받아 전해줄 물건이 있어 찾아 왔으니 그리 심각하게 굴 것 없네. 내가 지니고 있은 지 꽤 오래된 물건인데 화운주(華云州)에 들를 일이 있어 그 김에 돌려주러 온 것이지. 이 물건은 꼭 귀문의 문주에게 전해주라는 부탁을 받았네.”
한립이 허리춤을 스쳐 네모난 뼈로 만든 함을 꺼냈다. 온 노인은 의아했지만 눈치 있게 고개를 돌려 악진을 바라보았다.
“악 사질, 선배님 말씀을 들었겠지. 어서 어떤 물건인지 확인하게. 만일 본문이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게 된다면 당연히 선배님께 감사를 표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 사숙님.”
악진이 공손히 답하고 앞으로 나서 뼈로 만든 함을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아주 작은 글자가 빽빽하게 적힌 뼛조각들이 가득했다.
“이것은…….”
악진은 놀라 그 중 하나를 들고 자세히 살폈다.
“강령부, 이것은 강령부 제련법입니다. 필적이 운 사백님의 것과 일치합니다.”
“운 사형의 필적이라고? 틀림없더냐.”
온 노인이 멍해져서는 표정이 신중하게 변했다.
“틀림없습니다. 장문인의 서재에 운 사백님이 남기신 서책과 서한들이 가득한데 몰라 볼 리가 있겠습니까.”
다른 제자들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렇네. 이것은 운 수사라는 이가 내게 맡긴 것이지. 강령부가 귀 문의 삼대 비밀 부적 중 하나라던데.”
“그렇습니다. 다만 선배님께서 운 사형을 어디에서 뵈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아직 제가 금단을 이루기 전, 사형은 바다 밖으로 임무를 나갔다가 실종 된지 수십 년 째입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온 노인이 걱정스레 물었다.
“사실 나와 운 수사가 만난 것도 우연이 겹친 것이라 할 수 있겠지. 몇 십 년 전, 나도 운 수사와 동일한 일을 당했었네. 당시의 나는…….”
한립은 귀무와 음명의 땅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물론 그의 신분과 음영수의 수정에 관련한 일은 대충 넘겼지만.
“세상에 그런 곳도 있었군요. 어쩐지 해안에서 이유 없이 실종 되는 수사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귀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니.”
“나도 간신히 그곳을 탈출했는데 그때 귀 문의 장로가 내게 맡긴 물건이네. 부적 제련에 관심이 있어 그간 강령부 제련법을 연구해 보았는데 나를 나무라지는 않겠지.”
“친히 강령부 제련법을 본 문에 돌려주러 오셨는데 그 은혜를 어찌 다 갚겠습니까. 강령부는 본래 본 문의 장문인만이 제련법을 익힐 수 있지만 선배님이 돌려주시지 않았다면 이대로 실전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온 노인이 예의 바르게 답했고 악진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넓게 이해해 준다니 다행이군. 그럼 할 일을 마쳤으니 이만 나는 가보겠네.”
“물건을 전해 주시러 먼 길을 와주셨는데 이틀만 더 머무르다 가시지요. 정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온 노인은 갑자기 돌아온 강령부 제련법도 반가웠지만 원영기 수사와 관계를 맺어 두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머물다 가라?”
“부적에 관심이 있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희가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분야 대해서만큼은 오래 연구를 하며 관련 경전을 많이 모아 두었습니다. 괜찮으시다면 한번 살펴보시고 저희에게도 가르침을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한립도 마음이 동했다.
“그렇게 하지. 이곳에 며칠 머물겠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희의 영광입니다. 그럼, 잠시 쉬시다 내일부터…….”
온 노인이 희색이 만연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휴식은 되었네. 바로 서고로 가지.”
한립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수행이면 서책을 살피며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법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아, 그러시군요. 양 사질이 한 선배님을 서고로 모시고 갈 것입니다. 무엇이든 분부만 내리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온 노인은 중년 수사 하나를 불렀다.
“예, 온 사숙님! 한 선배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중년인의 예의 바른 모습에 한립이 그를 따라 대전을 나섰다.
“운 사형이 그런 이상한 곳에 갇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구나. 그래도 강령부의 비술을 되찾아 다행이군.”
온 노인은 한립이 대전을 나서자 탄식했다.
“한 선배님이 와계시는 동안 소문만 잘 내면 본 문에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 시장과 관련한 일도 쉽게 해결될지 모르고요.”
시종일관 입을 다물고 있던 수사 하나가 말했다.
“원영기 수사가 연관된 문파라면 영풍문도 함부로 굴 수 없겠지요. 살양종도 작은 시장을 차지하려고 원영기 수사를 불쾌하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허나 한 선배님의 말투로 보아 운 사형과 그리 관계가 깊지 않은 것 같은데 어찌 우리를 도와주시겠습니까. 보물을 드리고 모시고자 해도 문중에 그런 것이 있을 리 없고요.”
“쉬운 일은 아닐 것이야.”
악진이 쓴웃음을 짓자 온 노인도 미간을 좁혔다. 그때 한립이 중년인을 따라 작은 누각으로 향했다.
누각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1층에 푸른 금제가 펼쳐져 있었다. 한립이 중년인을 따라 1층으로 들어가자 옥간을 하나 들고 가부좌를 하고 있는 노인이 보였다.
“이 사질, 이리 와서 한 선배님께 인사 올리게. 이 사질은 서고를 담당하고 있어 이곳 경전들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압니다.”
중년인은 노인을 보고 분부하고는 한립을 향해 설명을 해주었다. 노인은 얼른 의식을 회수하고 재빨리 달려왔다.
“양 사백님이이셨군요. 사질이 정신이 없어 나가서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이분이 한…… 한 선배님이시군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하고 작은 눈을 가진 노인은 중년 수사에게 살살 웃으며 이야기를 하다가 한립의 얼굴을 보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이 사질?”
한립도 노인을 보고 당황했다.
“선배님이 아시는 자입니까?”
“아니네. 그저 이전에 알던 분과 비슷해서 말이야. 자세히 보니 또 아니구만.”
“그러셨군요. 그럼 이곳에서 원하시는 것을 찾아보시면 됩니다. 이 사질, 이곳은 당분간 정리할 필요가 없으니 나와 나가세.”
중년인은 그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고 이 사질을 향해 말했다.
“예, 바로…….”
“아니네. 기왕 이곳을 관리한다면 서책에 대해 잘 알 테지. 잠시 곁에 두고 도움을 받겠네.”
“아, 그러시겠습니까? 그럼 이 사질, 한 선배님의 분부에 잘 따라야 하네.”
중년인은 방금 전 일이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순식간에 원영기 수사와 며칠을 지내게 된 이 사질이 부러웠다.
“향 사형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이 사형이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세히 노인을 살핀 한립이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사람을 잘못 보신 것은 아닌 지요.”
노인이 아주 자연스럽게 웃는 낯으로 대답했다.
“향 사형, 뭘 그러십니까. 수도자들의 기억력이 얼마나 비상한지 아시면서요. 혈금시련에 참가해 황풍곡에서 살아 돌아온 제자가 몇이나 된다고 잊었겠습니까.”
노인은 혈금시련(血禁試煉)에서 한립과 만났던 향지례였다. 당시 연기기 십성으로 혈금시련에서 살아나와 모두를 놀라게 했었다. 물론 이후 한립이 나타나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지만.
당시 향지례와 자주 접촉하지는 않았지만 혈금시련 일로 경계심을 키우기는 했었다.
이후 한립은 축기에 성공하고 이화문의 문하로 들어가 노인과는 더 이상 만날 일이 없었고, 이후에는 마도육종의 침입으로 대다수 제자들의 생사가 불분명해졌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 대진의 작은 문파에서 같은 얼굴을 보게 되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노인은 황풍곡에서 보았을 때도 이미 연배가 상당했는데 연기기 수사가 아니라 축기기 수사라 해도 이미 수명이 다해 세상을 떠났어야 옳았다. 그런데 향지례의 외모는 이백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그대로였다.
“세상에 똑같이 생긴 사람들도 간혹 있다고 하던데 저와 선배님이 아시는 분이 그런 가 봅니다. 하지만 제 성은 향 씨가 아니라 이 씨입니다. 만일 선배님을 안다면 제가 어찌 거짓말을 고하겠습니까.”
노인은 고집스럽게 자신이 향지례인 것을 부인했다.
“내가 착각을 했나 보군. 그럼, 부적 관련 경전을 찾아다주게.”
“허허, 저희 천부문에 부적 관련 서적이 꽤 많습니다. 선배님이 보실 만한 것은 2층 이상에 있지요. 제가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노인도 웃는 낯을 유지하며 정말 저계 수사인 것처럼 예를 다했다.
한립은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 지켜보았다.
나이가 적지 않았는데 행동은 제법 민첩해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옥간 한 더미를 품에 안고 한립 앞에 쌓아두었다.
“선배님 3층에도 보실 만한 서책이 있으니 제가 바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럴 것 없네. 이것만 해도 다 살펴보려면 하루 이틀은 걸릴 것이니 3층의 서책은 내가 알아서 찾아보겠네. 그럼 더 도울 일이 없으니 내려가서 일을 보시게나.”
“그럼 무슨 일이든 시키실 일이 있으면 불러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