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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542화 (299/2,000)

# 542

542화. 세차게 흐르는 마염(魔炎)

고마는 새로 등장한 수사에게 관심을 표하지는 않았지만 살기를 거두고 무표정하게 변했다.

겨우 이, 삼십 리 거리는 엄청난 속도의 빛줄기에겐 지척이나 다름없었다. 빛이 가시고 몇 십 장 밖에 멈춘 수사는 머리를 산발한 행각승이었다.

누런 얼굴에 한 손에는 붉은 사발을 들고 다른 손에는 청록색 지팡이를 들고 있는 그는 한립과 고마가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보더니 둘의 얼굴이 비슷한 것에 놀랐다.

“어느 분이 방금 교역회에서 나선 수사이신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탁발승은 돌연 미소를 지었다. 한립은 입 꼬리를 올리며 그를 보기는 했으나 입을 열기는 귀찮았다.

원영 중기의 수사는 손에 들고 있는 보물들이 제법 쓸 만해 보였다. 게다가 홀로 그를 쫓아올 정도면 실력이 상당할 것이다.

그러나 상대의 의도를 짐작한 한립은 상대해 주기도 성가셨다. 고마 역시 뒷짐을 지고 하늘을 쳐다보며 행각승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다.

그 모습에 행각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원영기 수사가 되고 동급 수사에게 이렇게 무시를 당하기는 처음이었다.

한립과 고마는 각각 원영 중기와 초기의 수행으로 용모가 아주 흡사했다. 이렇게 1대 2로 싸우면 반드시 질 거라 생각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이길 가능성도 적어지기 마련이었다. 그가 화를 억누르고 이 상황을 어떻게 할지 머리를 굴렸다.

그가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멀리서 세 개의 빛줄기가 나타나 이쪽으로 날아왔다. 행각승은 둔술에 자신이 있어 이렇게 빨리 한립을 쫓아온 것이었는데, 저 수사는 어떤 신통을 부렸기에 추적을 해낸 것인지 의아했다.

문제는 저들이 오면 그가 하려던 일에 방해가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행각승이 음산한 눈빛으로 고마와 한립을 쳐다보았다. 그의 불순한 시선을 느낀 고마가 돌연 행각승과 점점 다가오는 수사들을 쳐다보고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정말 성가시구나. 이렇게 죽여 달라고 찾아오는 것들이 많아서야! 기왕 이렇게 된 거 너부터 보내줘야겠구나.”

서늘하게 중얼거린 고마가 검은빛을 번뜩이며 행각승 쪽으로 사라졌다.

“죽고 싶으냐.”

행각승이 소리치며 수중의 사발을 발동해 핏빛의 화염으로 몸을 둘렀다. 그는 다른 손으로 청록색 지팡이를 던져, 청록색 교룡으로 변한 고보로 검은 빛을 상대했다.

청록색 교룡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고마가 변한 검은빛을 갈랐고 검은빛이 진동을 하며 허공에서 소실되었다.

행각승은 그 모습에 놀라 수결을 맺으며 화염에 법결을 날려댔다. 그러자 화염이 몇 배로 늘어났고 푸르고 붉은 화염이 선회하며 2, 30장 높이까지 치솟았다.

이에 안심한 행각승은 다른 손으로 저물대를 스쳐 또 다른 호신용 보물을 꺼내려고 했다.

그 순간 이변이 일어났다.

몇 장 밖에서 검은 빛이 번뜩이더니 어두운 보라색을 띄는 팔뚝이 전광석화처럼 화염을 찔러 들어온 것이다.

“헛!”

행각승은 가슴이 서늘해져 입에서 대량의 금빛 안개를 분출해 방패를 형성했다.

펑!

가벼운 충돌음과 함께 금빛 방패가 모래처럼 고마의 손톱에 잘려나갔다. 행각승은 달아날 기회도 얻지 못하고 단전에 두 개의 커다란 구멍이 뚫리고 말았다.

곧 고마가 양팔에 힘을 주어 벌리자 두 갈래로 몸이 찢겨나가 주변에 핏방울과 살점들이 난무했다.

시체 속에서 붉은 원영이 소리를 지르며 솟아올라 이십 장 밖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순간이동을 해서 멀리 달아나려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보라색 실 같은 것이 원영의 뒤에서 반짝이더니 머리가 뜨거워졌던 것이다. 무언가가 행각승 원영의 머리를 뚫었고 정신을 잃은 그것을 휘감아 화염 속으로 사라졌다.

세 개의 빛줄기는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는 혼비백산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선회해 달아나려 했다.

모두 원영 초기 수사로 본래 세 명이 합심하여 한립을 처리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악화(惡火)로 명성이 있는 행각승이 처참하게 도륙당하고 원영마저 잡히고 나자 크게 놀랐다.

별안간 세 개의 빛줄기가 멀어져갔다.

한립은 고마가 순식간에 행각승을 죽이는 것을 보고 등골이 서늘해져 멀리 보이는 화염 속을 주시했다.

화염 속에서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들리고 순식간에 불이 꺼지더니 고마가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상대는 이미 반인반마의 모습으로 마화를 한 상태였다. 아직 얼굴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푸른 소매 속에 드러난 팔뚝과 두 다리는 어두운 보라색으로 두 배는 커져 있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입 안에서 날름거리는 보라색의 기다란 혀였다. 혀끝으로 날카롭게 행각승의 원영을 꿰뚫은 고마가 무표정하게 한립을 응시했다.

한립도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여기서 고마와 오래 머뭇거릴 생각 말거라. 교역회 장소와 멀지 않아 더 많은 수사들이 나타날 것이야.”

대연 신군이 걱정스럽게 그를 일깨웠다.

“주혼과 얼마나 실력 차이가 나는지 확인만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너무 위험한 생각이었군요.”

한립이 차분히 답하고는 소매를 털어 비검들을 회수했다. 동시에 입에서는 피를 뿜어냈고 핏방울들이 짙은 안개로 변해 그를 휘감았다.

“달아나고 싶다고 놔둘 둘 성 싶더냐.”

고마가 보라색 눈을 번뜩이며 긴 혀를 수축해 원영을 삼켰다. 그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다시 제 자리에서 사라진 것이다.

한립은 상대의 행동에 개의치 않고 수결을 맺었다.

꽈광.

은색 날개가 등 뒤에 돋아나고 그의 신형이 핏빛 안개 속에서 모호해졌다.

그러나 순식간에 한립 앞에 고마가 공포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행각승을 죽일 때는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었다.

막 사라지려던 한립의 안색이 달라졌다.

고마는 교활하게 웃으며 보라색 혀를 내뿜었다. 단숨에 핏빛 안개 속의 한립을 꿰뚫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의 머릿속에서 갑자기 오싹한 울림이 들렸다. 아무리 고마의 육체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단단해도 머릿속을 울리는 찌르는 듯한 극통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순간 기회를 틈타 한립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고마가 놀라 의식을 방출해 한립을 추적했으나 백 리 밖에서 그를 감지하자마자 다시 혈영둔을 펼쳐 사라졌다.

“화영둔(化影遁)?  철시마(鐵翅魔)의 비술이 아닌가?  어찌 인간 수사가 이것을 펼칠 수 있는 것이지. 그런데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고마는 홀로 중얼거리며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멀리 서 예닐곱 개의 빛줄기들이 날아왔다.

고마가 그것을 감지하고는 흉흉하게 눈을 빛냈다.

“잘 됐구나, 잘 됐어. 몇 년 전에 잡아먹은 원영들을 이미 다 소화한 참이니 말이야.”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그의 입에서 어두운 보라색 기운이 뿜어져 나와 그를 휘감았다.

이어 엄청난 포효 소리와 흉흉한 마기의 흐름이 이어지더니 머리가 둘에 팔이 넷 달린 거대한 마물이 등장했다. 어두운 보랏빛의 눈을 네 개나 번뜩이며 고마는 멀리서 다가오는 수사들을 응시했다.

* * *

화운주(華云州)는 대진 동쪽의 연안에 위치했다. 항구와 바다를 낀 마을들이 많았기에 바다 밖 수사들이 이곳 시장에 나타나 각종 요수의 재료와 내륙의 물건을 교환해 가곤 했다.

그래서 시장은 찾는 손님들이 끊이지 않았고 몇몇 종문은 이곳을 관리하며 넉넉한 자금을 조달받았다. 멀리 떨어진 작은 시장들도 수익이 꽤 괜찮았다.

개강진(開江鎭)은 해안가에서 이백 리 떨어진 작은 곳이었는데 수십리 밖에 산이 하나 있었다. 이삼백 장 높이에 십여 리 정도의 작은 규모로 큰 종문에서는 신경도 쓰지 않는 작은 산이었다.

그 속에 천부문(天符門)이라는 가장 저급에 속하는 문파가 위치해 있었는데 장문과 장로 문하의 제자들을 합쳐도 백 명이 넘지 않았다. 그러나 천부문은 지금은 위상이 많이 떨어졌지만 매우 긴 역사를 지닌 문파였다.

태일문이나 엄월종처럼 상고시대부터 전승되어 내려오는 상고종문은 아니지만 수만 년 전에 천부 진인이 만들어 3개의 비밀 부적으로 대진에서 명성이 자자했었다. 그때만 해도 거의 십대종문과 비견될 정도였다.

천부문은 오직 부적뿐이었다. 그들이 주로 수련하는 공법은 너무 평이해서 몇 대에 걸쳐 급속도로 세가 기울었고 몇 만 년이 흐른 지금은 부적 제련과 관련한 몇 가지 특수한 비술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곳에 고계수사가 나타나는 일도 드물었고 천부문을 지키는 당직 제자들도 늘 한가로웠다.

오늘도 연기기 제자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이 사형, 시장을 정말 닫는 건가요?  제가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삼원시장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이 본 문 수익의 절반에 달한다는 것은 압니다. 그곳에서 들어오던 영석이 끊기면 못 버티지 않을까요?”

“시장을 닫든 아니든 본 문이 어찌 할 수 있겠어. 며칠 전 영풍문에서 최후 통첩을 했잖아. 그들과 합작을 하던지 아니면 3개월 내로 시장 문을 닫으라고 말이야. 세력이 있다고 우리를 무시하는 거지!”

예닐곱 살 소년과 반대로 스무살 중반의 청년은 조금 살집이 있어보였다.

“합작이요?  듣기에는 나쁘지 않은데요?”

“나쁘지 않기는. 사숙께 들으니 합작을 하면 이후 우리는 시장 일에 간섭할 수 없고 매년 영석 천 개를 받는 조건에 동의해야 한다고 하더라. 영석 천 개라니, 이전 수입의 3분의 1도 되지 않아!”

“그렇게 적으면 당연히 동의하면 안 되죠. 영풍문 세력이 커도 금하산과 명양곡에서 납득 하겠어요?  삼원시장은 그 두 가문과 우리 천부문이 공동으로 관리하잖아요.”

“영풍문 뿐이었으면 우리도 거리낄 것이 없지. 그런데 살양종(煞陽宗)이 연관되어 있나봐. 중등 문파와 우리 같은 약소문파는 상대가 되지 않으니까.”

“살양종이요?  그런 일이. 아무래도 이번에는 무사히 넘어가기 힘들겠네요.”

소년이 살양종이라는 소리에 낙담했다. 문파의 수입이 줄면 저계 제자들이 받는 영석도 당연히 줄어들게 되어 있다.

“됐어. 어차피 우리 같은 저계 제자들이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우리가 아무리 못해도 산수보다는 형편이 낫잖아. 산문이나 잘 지키자고. 어, 저게 뭐지?”

청년이 놀라며 하늘 위를 바라보자 소년도 따라서 고개를 드니 푸른 빛줄기가 하늘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선배님 같은데 이리로 오시는 것 같아요!”

엄청난 속도의 푸른 빛줄기를 보고 소년이 놀라서 소리쳤다. 그는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사 숙조님을 뵈러 오신 분일지도.”

청년이 그나마 차분하게 소년을 안심시켰다.

푸른 빛줄기는 백죽산 인근에 도착해 천부문 제자 둘을 발견하고는 떨어져 내렸다. 빛이 가시고 푸른 장포의 청년이 뒷짐을 진 채 걸어왔다.

“여기가 백죽산 천부문이 맞더냐?”

청년은 평범해 보였지만 기운이 엄청났다. 그는 교역회 이후 순식간에 사라진 한립이었다.

벌써 고마의 수중에서 달아난 지도 네 달이 지나있었다.

“이곳이 백죽산은 맞습니다. 혹시 저희에게 시키실 일이 있으십니까?”

제자들은 한립의 진정한 수행을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빛줄기만 보고도 결단기 이상의 엄청난 고수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잘 찾아 왔다니 다행이구나. 천부문과 깊은 연관이 있는 물건을 전해야 하니 장문인에게 전하거라.”

“예, 선배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청년이 허둥지둥 품에서 전음부를 꺼내 무어라 말하고는 날려 보냈다.

부적은 불덩이로 변해 금제 속으로 사라졌고 한립은 그저 가만히 서서 의식으로 산을 훑고 있었다. 금제가 쳐져 있어도 그는 단번에 이곳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이전에도 천부문이 큰 규모는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만 수도종파의 인원이 백 명이 넘지 않는데다 결단 초기 수사 한 명 외에는 고계 수사도 없었다. 보아하니 운 노인이 말한 대로 정말 작은 문파인 듯 했다.

이번에 악교(惡蛟)들이 연안에 출몰했다는 소식을 듣지 않고 그가 강령부 제련술을 익히지 않았다면 일부러 이 일을 위해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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