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538화 (295/2,000)

# 538

538화. 구유종(九幽宗)

천란 성녀는 은빛이 번뜩이는 작은 거울을 들고 시장을 드나드는 수사들을 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울의 은빛은 더욱 강하게 번뜩였지만 여인은 시종일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곁에서 지켜보던 갈천호와 다른 장로들의 안색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없습니다. 몇몇이 화술을 이용해 용모를 바꾸기는 했지만 전부 그 자는 아니었어요. 설마 경매회에 참석하지 않은 걸까요?”

한참 후에야 천란 성녀 임은병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진경에 있는 고계 수사라면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지요. 게다가 며칠 전 보광전(寶光殿) 앞에서 그 자를 만나지 않았습니까. 분명 이번 경매에 참석했을 겁니다.”

“묘음진경이 듣던 대로 위력이 강하지 않거나, 제련한 시간이 부족해 제 위력을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묘음진경은 칠묘 진인의 보물 중 하나로 수도계에 명성이 자자한 것을요. 게다가 고보는 본래 발동하는 것에는 제련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며칠간 능숙하게 다루게 된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용모를 바꾼 다른 수사들을 찾아내지도 못했을 테지요.”

“그렇다면 그 자의 비술이 묘음진경 이상이거나 다른 길로 시장을 빠져 나갔을 가능성도 있겠습니다. 아니면 아직 시장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고요.”

갈천호가 눈을 빛내며 상황을 정리했다.

“묘음진경이 명성이 자자한 것은 묘음진경이 꿰뚫어 보지 못할 환술은 세상에 손에 꼽힐 정도로 적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무리 대단해도 그런 환술을 부릴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시장 곳곳에는 도문(道門)의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어 누군가 소리 없이 빠져 나가는 것은 어렵습니다. 십중팔구 아직 시장에 남아있는 것이겠지요.”

“임 수사의 말씀은…….”

“계속 이곳을 지키지요. 그 자가 아직 시장에 있다면 반드시 이곳을 지나갈 테니까요. 그리고 기민한 제자들을 보내 시장 곳곳을 돌게 하면 될 것입니다.”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수사의 말대로 오늘 밤까지 지켜봅시다. 그 자가 시장에 머물고 있다면 그 안에는 나타나겠지요.”

갈천호가 생각 끝에 임은병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들은 전음부를 보내 몇몇 음라종 저계 수사들을 불러 모은 후 분부를 내렸다.

음라종 제자들이 수색을 하고 다닐 때, 한립은 천기옥(天機屋)에서 옥 장로와 재회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때는 다시 원래의 얼굴을 한 채였다.

옥 장로는 한립과 부 노인이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무척 반가워하며 그를 귀빈실로 모셨다. 한립은 그와 한담을 나누다 수련 상의 경험과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 했고 서로 약간이나마 도움을 받았다.

* * *

한참 후 천기각에 도착한 부 노인이 거침없이 그들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세 수사의 교류는 거의 반나절 동안 이어졌고 해가 넘어가고 하늘이 어두워 질 무렵에서야 웃으며 이야기를 마쳤다.

* * *

부 노인과 한립은 천기각을 나섰다.

누각을 나오자마자 한립의 얼굴이 모호해지더니 누런 얼굴의 낯선 사내로 변했다. 부 노인은 흠칫 놀랐지만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부 노인은 뜻밖에도 시장 바깥쪽이 아니라 그를 천기각 인근의 수령재(漱靈齋)라는 작은 누각으로 이끌었다.

“부 형, 이곳은?”

“이곳 수령재는 개인이 운영하는 상점인데 주인과 오래 알고 지냈습니다. 최근 임시로 전송진을 설치해 지하 교역회가 있는 곳과 가까운 곳으로 바로 갈 수 있습니다. 이미 얘기를 해놓았으니 전송진을 이용하시면 될 것입니다.”

“전송진은 시장 내에서 엄히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이 전송진은 시장 배후세력에게 이미 허가를 받은 것입니다. 임시로 설치되어 몇 달만 사용할 수 있고 아는 사람도 손에 꼽지요.”

“그랬군요.”

수령재의 주인은 평범하게 생긴 말쑥한 노인으로 말과 행동거지가 남달랐고 처음 보는 데도 상대를 기분 좋아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립을 더욱 놀라게 한 것은 상대가 유명한 진법대사라는 점이었다. 이에 한립은 노인과 교분을 쌓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빨리 지하 교역회에 참석해야 해서 오래 대화를 나눌 시간이 없었다. 그는 누각 지하 밀실에 설치된 소형 전송진을 이용해 시장을 나섰다.

잠시 후 한립과 부 노인은 작은 동굴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을 나서자 한립은 그곳이 진경성 남쪽의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머지않은 곳에 진경의 거대한 성곽이 보였던 것이다.

한립이 시장을 떠났을 때 입구를 지키고 있던 갈천호가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말했다.

“임 수사, 지하 교역회가 곧 시작할 시각입니다. 아직까지 그 자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무슨 방법을 썼는지 모르겠지만 이미 빠져나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저와 함께 지하 교역회에 참석하는 것이 어떠십니까?  그 자가 그곳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좋은 물건을 얻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상황을 보아하니 이곳에서 기다려봐야 아무런 소득이 없을 듯하군요. 좋습니다. 같이 가시지요.”

임은병이 입술을 깨물고 시장을 살피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

이후 갈천호와 다른 수사들은 상의 끝에 둘만 남고 나머지 한 명은 갈천호와 같이 지하 교역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머지 수사들은 볼 일이 있다며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한립을 찾아내기도 전에 음라종 장로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음라종 수사들이 흩어지고 인근의 누각에서 두 명의 수사가 걸어 나왔다. 그들은 입구를 살피고는 전음으로 대화를 주고받더니 시장을 나섰다.

한 명은 작은 깃발을 펄럭이며 보라색 기운에 휩싸여 갈천호 등이 향한 방향으로 은밀히 날아갔고, 다른 한 명은 빛줄기로 변해 황성 방향으로 향했다.

* * *

같은 시각 진경 인근의 이름 모를 산에서 부 노인이 한립에게 말했다.

“전송진을 이용해 여기까지 왔는데 물어 볼 것이 없습니까?”

“그럴 필요 있겠습니까. 부 형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요.”

전송진에서 나오는 순간 한립은 이미 주변을 의식으로 훑어 이상한 점이 없나 살폈다. 그의 조심스런 행동을 부 노인이 모를 리 없었지만 거슬려 하기 보다는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사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노부가 얻은 소식에 의하면 시장 입구에 음라종 수사들이 누군가를 찾고 있다고 하더군요. 한 수사가 그들을 만나기 꺼려할 것 같아 전송진을 이용한 겁니다. 노부가 쓸데없는 일을 했다고 여기지는 않겠지요.”

부 노인은 눈을 빛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음라종 수사들이요?  저는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만일 제가 수사께 무슨 짓을 할 작정이었다면 벌써 이곳에 무슨 수를 써 놓았겠지요. 한 형께서 바로 보광전 앞에서 갈천호와 충돌했다는 그 수사가 아닙니까?”

“부 형이 알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저를 돕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겨우 약조를 지키고자 음라종과 척을 지다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한립은 침묵하다 결국 선선히 인정했다.

“음라종이 뭐라고 두려워한단 말입니까! 한 형께서는 제 출신을 모르고 계시는군요. 모자란 늙은이지만 구유종 집법장로 직을 맡고 있습니다. 본 종은 본래 음라종과는 곡절이 있어, 갈천호 그 자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물론 수사를 도운 또 다른 이유는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이기도 합니다.”

“구유종이요?  제가 알아 뵙지 못하고 실례를 범할 뻔 했습니다. 구유종의 명성을 들은 지 오래인데, 제가 귀 종을 위해 도울 일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상대도 마도십종 중 하나인 구유종 장로라고 하니 경계심이 저절로 일었다.

“이 일은 사적인 일이니 급할 것 없습니다. 일단 같이 교역회에 참가하신 후에 자세히 설명 드리지요. 한 형에게도 득이 될 일이고, 원하지 않으신다면 강요하지는 않을 테니 걱정 놓으십시오!”

“그럼 알겠습니다.”

부 노인이 미소 짓자 한립도 생각을 해보다가 빙그레 웃었다. 이미 음라종과 척을 졌는데 또 다른 마도 종파와 원수를 질 수야 없었다. 상대의 부탁을 들어줄지 말지는 들어본 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았다.

“역시 화통한 성격이실 줄 알았습니다. 그럼 가실까요?  교역회가 열리는 곳이 멀지 않습니다.”

부 노인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한립의 대답에 이미 충분히 만족한 듯했다.

둘은 빛줄기로 변해 날아올랐다. 쾌속으로 질주하다보니 진경성에서 삼 천 리 밖의 어두컴컴한 산에 도착했다. 노인은 한립을 데리고 평범해 보이는 석벽 앞에 내려섰다.

석벽에서 희미하게 초록색이 돌고 흙과 이끼가 대부분을 덮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특이한 점은 없었다.

한립이 주위를 살피니 두 산봉우리 사이의 골짜기는 주변에 사람 키만 한 잡초가 무성해 노인의 안내를 받지 않으면 절대 찾아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노인은 여러 번 와봤는지 익숙하게 소매를 털어 주먹만 한 원반을 내뿜었고, 원반에서 하얀 빛이 반짝이며 석벽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잠시 후, 석벽이 노란 안개에 잠겨 눈앞에서 소실되고 직경 십여 장 너비의 거대한 동굴 입구가 나타났다.

동굴 입구에는 청록색 장삼을 걸친 중년 수사 둘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결단기 수행인 중년인들 중 하나가 부 노인이 투척한 원반을 들고 있었다.

“부 선배님 오셨습니까. 이분께서는 얼굴이 낯선데 존함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원반 법기를 든 수사가 두 수사를 향해 예를 취하고는 한립을 향해 물었다.

“이 분은 바다 밖에서 오신 한 수사라고 하네. 노부가 추천해 동행하는 것인데 조사할 곳이 무엇인가! 어서 신분반(身分盤)을 하나 더 주게. 급히 들어가 봐야 하니 말이야.”

부 노인이 눈을 부릅뜨며 거침없이 쏘아붙였다.

“부 선배님께서 추천하시는 분이라면 문제가 없겠지요. 이것이 원영기급 신분반입니다. 이번 교역회 말고도 이후의 지하 교역회도 3번까지 무료로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물론 규칙을 어기시는 일이 생기면 회수하게 될 테지만요. 규칙에 따라 이 원반 법기를 발급받으시려면 영석 1만 개를 지불하셔야 합니다.”

“자, 여기 있네.”

영석의 수량을 듣고 한립은 속이 쓰렸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영석이 가득 든 주머니를 건넸다.

“여기 있습니다, 선배님.”

청록색 장삼을 입은 수사가 영석의 수량을 확인해보고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347이라고 적혀 있는 원반을 한립에게 건넸다. 한립은 그것을 보고 눈썹을 끌어 올렸다.

“347?  이렇게 많은 수사들이 참석한단 말인가?”

“아닙니다. 일부 선배님들께서는 다양한 이유로 이번 교역회에 불참하십니다. 이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대략 이백여 명 정도 참석하실 것입니다.”

“그래도 적지는 않구나.”

“시간이 다 되어 가니 우리는 일단 들어가 보겠다. 기회가 되면 네 사부님께 안부나 전해 주거라.”

부 노인이 말을 마치고는 즉시 통로로 걸어갔다.

“두 수사 모두 수행이 낮지 않던데, 같은 사부를 모시고 있는 것입니까?  아시는 분인지요?”

한립이 그 뒤를 따르며 물었다.

“저들의 사부라면 대단한 분이지요. 대진의 사대산수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당연히 들어보았지요. 설마 그 들 중 한 분이…….”

“맞습니다. 저 둘의 스승은 사대산수 중 가장 비밀에 휩싸여 있는 역세천(易洗天) 수사인데 원영 후기에 든 지 꽤 되었지요. 인연이 닿아 한번 뵌 적이 있는데, 팔급 요수 한 마리를 가볍게 죽이는 것을 보니 실력이 대단하더이다.

호사가들의 말에 따르면 대진 천년 역사에서 화신기에 오를 가능성이 가장 큰 두 명 중 하나라 합니다. 이번 교역회에서 입구에 저 둘을 세워 둔 것도 사부의 명성을 이용해 순조롭게 일을 처리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노인은 한립에게 설명을 해주며 역세천(易洗天)에 대한 선망을 감추지 않았다.

“부 형의 수행도 심후하시니 수련의 고비만 넘기시면 금방 원영 후기에 이르실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부러워하실 것도 없지요. 그런데 화신기에 이를 가능성이 큰 또 다른 수사는 누구입니까?”

“불문(佛門) 정화종(淨火宗)의 벽월 선사시죠! 겨우 사백 년 만에 원영 후기에 이른 수도계 공인 불세출의 천재가 아닙니까. 그에 비하면 저는 비교할 수도 없지요. 게다가 이미 수행에 정진이 없는 지 2, 3백 년째라 희망을 버린 지 오래입니다. 수사야 말로 중기에 이른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데 수련의 고비를 쉽게 넘길 수 있을 듯합니다.”

“그렇게 좋은 일이 있을까요.”

한립이 헛웃음을 짓고는 노인의 말에 별 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부 노인은 한립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는데 희미하게 대청의 입구가 보이기 시작하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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