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537화 (294/2,000)

# 537

537화. 묵금(墨金)

한립은 이전의 그 거대한 석전 앞에 서 있었다.

보광전은 이제 오색찬란한 보호막이 드리워져 있어서 신비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러나 한립을 놀라게 한 것은 보광전 위쪽 허공에 백석을 깎아 만든 단층 건물이 생겨났다는 사실이었다.

면적은 석전의 3분의 1이었지만 그래도 허공에 떠있기에 커다란 물체였다.

그의 앞에서는 노란 장삼을 걸친 축기기 수사가 공손히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고 있었는데 한립은 이미 원영기 수행을 드러내고 있었다.

전각 앞에는 비슷한 차림의 수사들이 원영기 수사들을 상대로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고, 결단기 수사들은 각자 전각 앞의 비석을 보고 있었다.

“원영기급 경매회는 저 위의 구소전에서 열리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결단기급 경매회는 여전히 보광전에서 진행된다. 원영기급 경매회는 1인 당 영석 천개, 결단기급 경매회는 1인 당 영석 백 개를 지불해야 들어갈 수 있다. 내 말이 맞느냐?”

한립은 시선을 거두고 눈앞의 수사에게 담담히 말했다.

“맞습니다. 이번에 참석하시는 수사 분들이 다른 때에 비해 많아 어쩔 수 없이 천기각에서 구소전을 급히 빌려 온 것이지요. 영석을 받는 것은 인원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무나 들어올 수 있다면 이곳의 10배가 넘는 곳이라도 수용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래도 선배님들께는 별 것 아닌 금액이 아닙니까?”

“영석 일천 개가 말이야?  너희는 입장료만으로도 거액을 챙기겠구나. 허나 네 말대로 원하는 것만 얻을 수 있다면 충분히 지불할 수 있는 양이지. 결단기급 경매회는 되었고 원영기급 경매회만 참석하겠다.”

한립은 한 손을 뒤집어 중계 영석 10개를 노란 장삼의 수사에게 던져주었다.

“들어가시지요. 원영기급 경매회는 오전에 열립니다. 이것이 경매회 팻말이온데 이것만 지니고 계시면 원하시는 원영기급 경매회에 모두 참석하실 수 있습니다.”

노란 장삼의 수사는 영석을 품에 넣고는 숫자가 적힌 옥패를 소매에서 꺼내 공손히 내주었다. 한립은 옥패를 쥐고 바로 푸른 빛줄기로 변해 공중의 전각으로 향했다.

다른 원영기 수사들도 설명을 듣고 그곳으로 향했다.

구소전 대문에는 입구에 하얀 빛의 장막을 제외하면 아무도 지키고 있지 않았다. 그가 영력을 불어넣자 손에 들고 있던 옥패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와 보호막을 흐트러뜨렸다.

고민할 것도 없이 그는 다시 푸른빛줄기가 되어 그 안으로 사라졌고 보호막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두 시진 동안 이렇게 수백 명의 원영기 수사들이 구소전 안으로 들어갔고, 세 번의 커다란 종소리가 울렸다.

드디어 경매회가 시작된 것이다.

* * *

한립은 백여 장에 이르는 전각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냉정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에서는 미색의 장포를 걸친 중년인이 노란 수정을 들고 그것에 대해 소개하고 있었다.

“강황정(姜黃晶)은 남쪽 국경 서쪽의 대사막 천 자(尺) 아래에서나 구할 수 있는 물건입니다. 재질이 단단하고 대량의 흙 속성 영기를 함유하고 있어 흙 속성 법보를 제련하는데 좋은 재료이지요. 최저가 영석 팔천 개로 시작하고, 가격을 올리실 때는 천개 이상만 가능합니다.”

앞에서 안내를 맡고 있는 수사는 원영 중기 수사로 차분하게 물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를 자세히 살펴보니 원영 중기 최고봉에 이른 자로 이 자리에서 가장 수행이 높은 수사였다.

강황정도 흙 속성 법보 제련에 좋은 재료였지만 가격이 급등하지는 않았고, 겨우 서너 명이 몇 번 가격을 부르다가 이름 모를 수사가 영석 일만 이천에 가져갔다.

이후의 경매도  별 다를 것 없이 똑같이 진행되었다. 한립은 의자에 않아 평온하게 상황을 주시했다.

경매회 첫날에 굉장한 물건이 나올 가능성은 많지 않았기에 꼭 필요한 수사들이 아니면 잘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은 귀한 것이긴 하지만 시간을 들이면 구할 만한 것들이었다.

이에 한립도 경매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전각 내부의 원영기 수사들을 둘러보았다. 이들이 대진의 최상위 수사들은 아니었지만 각 세력에서 모인 이들은 맞았다.

가장 그의 시선을 끄는 것은 중간에 앉은 이마가 번쩍이는 승려들이었다.

장작개비처럼 마른 자, 피둥피둥 살이 찐 자 그리고 자비로운 얼굴에 새하얗게 수염을 기른 자까지, 생김새는 달랐지만 전부 회색의 승려복을 입고 눈을 내리깔고 있는 것이 고승의 풍모가 풍겼다.

한립은 처음으로 불교 종파의 고계 수사들을 만난 것으로 자세히 봐두고 싶었다. 그런데 가장 연배가 높은 노승이 즉시 그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비록 따사로운 눈빛이었지만 한립은 흠칫 놀랐다.

의식이 이렇게 민감하다니 불문(佛門)이 대진에서 유교 문파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유가 있었다. 한립은 괜히 적을 만들고 싶지 않아 바로 의식을 회수하고 모르는 척 했다. 그러자 노승의 시선은 그를 지나 자연스럽게 다시 돌아갔다.

전각 내부에는 그들 말고도 복색을 통해 신분을 특정 지을 수 있는 이들이 많았다. 한립은 지금까지 얻은 대진 세력들의 정보와 일일이 대조해 가며 최선을 다해 그들의 얼굴을 익혀 두었다.

한립의 예상대로 막바지가 되어서야 진귀한 보물들이 몇 점 등장했다. 그러자 고요했던 전각 내에 파문이 일 듯 수사들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연달아 보물들이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에 낙찰 되자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사실 원영기 수사 쯤 되면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위해 영석 정도는 기꺼이 내놓을 만했다.

“묵금(墨金) 한 덩이. 최저가 영석 삼만 개로 시작해 가격을 올릴 때는 이천 개 이상만 가능합니다.”

진귀한 보물일수록 진행하는 중년인의 설명은 더욱 간단해졌다. 그가 들고 있던 옥쟁반 위에는 묵처럼 새까맣지만 은은하게 금빛이 도는 기괴한 금속이 놓여 있었다.

이렇게 빨리 필요로 하는 재료가 나오다니, 예상 밖의 일이었다. 한립도 묵금을 찾아다닌 지 오래였으니 이번에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다

“삼만 육천.”

“사만!”

“영석 사만 오천 개.”

한립이 아직 값을 부르지 않았는데도 벌써 몇 사람이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

한립은 미간을 좁혔지만 올라가는 가격에 당황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꼭 필요한 것이었으니 가격이 올라갈 때까지 올라간 후 찾아오면 그만이었다.

이름 모를 수사가 영석 육만 개라는 높은 가격을 부르자 계속 가격을 제시하던 다른 이들이 떨어져 나갔다.

“육만 오천.”

한립이 옥패를 가리키자 영기의 빛이 반짝였고 가격을 제시했다. 그러나 상대도 꼭 필요한 재료인지 조금 주저하더니 가격을 올렸다.

“영석 육만 칠천 개.”

“칠만.”

이번에는 상대도 더는 가격을 지시하지 않았다. 아무리 묵금이 진귀해도 영석 칠만 개는 너무 높은 가격이었다. 그것을 보고 한립이 미소 지었다.

앞에서 있던 중년 수사는 높은 가격에 만족했지만 관례대로 가격을 두 번 반복해 외치고 마지막으로 더 나설 이가 없는지 물었다.

그때 갑자기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칠만 오천.”

한립과 중년인이 모두 어안이 벙벙해 졌고 다른 참석자들도 이상하게 생각했다.

“팔만.”

바로 평정을 되찾은 한립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팔만 이천.”

상대는 표정변화도 없이 다시 가격을 높였다. 이번에는 한립의 안색이 미미하게 달라졌을 뿐 아니라 다른 수사들도 참지 못하고 그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뒤쪽에 검은 기운에 휩싸인 수사가 조용히 앉아있었는데 희미하게 보이는 윤곽으로 보아 노인 같았다.

한립은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안색을 굳히고 놀라운 가격을 제시했다.

“영석 십이만 개.”

이 정도 영석이면 쓸 만한 고보를 살 수 있었으니 높아도 너무 높았다. 장 내에 있는 수사들은 웅성거리며 한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또 용모를 바꾼 한립은 누런 얼굴의 병약한 수사로 보였을 뿐이었다. 한립은 다른 이들의 시선에는 관심 없었고 검은 기운에 둘러싸인 노인의 행동에만 정신을 집중했다.

노인도 가격을 듣고 화들짝 놀랐다. 가능만 하다면 더욱 높은 가격을 제시해 묵금을 손에 넣고 싶었지만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이후 더욱 중요한 재료가 나올 예정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많은 영석을 소비하면 나중것을 낙찰 받을 가능성이 떨어지게 된다. 게다가 한 번에 이렇게 높은 가격을 제시한 상대가 더 가격을 높이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속으로 계산해보던 노인은 결국 가격을 부르지 않았다. 묵금은 결국 한립의 손에 떨어졌다. 이렇게 되니 한립과 그 노인은 몇몇 수사들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그나마 한립은 의자에 앉아 두 눈을 감고 묵금 외에는 다른 물건에는 관심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노인은 이화사(離火沙)가 나오자 다른 이들과 가격 경쟁을 하며 영석 이십 만개에 그것을 차지했다.

그리하여 노인은 더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물론 노인이 가장 많은 영석을 지불하고 경매에서 물건을 낙찰 받은 수사는 아니었다.

고계 고보나 수행을 늘려주는 단약과 같은 보물들은 거의 영석 2, 30만 개에도 거래가 되었으니 말이다. 다만 겨우 제련을 위한 재료 하나를 영석 이십만 개를 주고 사는 것은 일개 산수가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경매회가 끝나고 한립은 다른 수사들과 섞여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시장 출구에는 음라종 수사들이 보이지 않았다.

한립은 미소 지으며 거리낌 없이 시장을 나섰고, 검은 기운에 둘러싸인 노인은 홀연히 진경의 어느 저택으로 향했다. 엽 가의 검은 관모를 쓴 노인이 저택의 방 안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관모의 노인을 본 수사는 말없이 이화사(離火沙)를 넘겨주었다.

“묵금에 대해서는 들었습니다. 그렇게 높은 가격을 제시할 줄은 알았다면 영석을 더 준비했을 텐데요. 그래도 며칠 후 지하 경매회에서 누군가 묵금을 거래할 거라니 다행입니다. 거래를 원하는 물건은 확인해 두었으니 다시 한 번 수고해 주십시오.”

“이런 의외의 상황만 아니었다면 운일 형이 준비해 주신 영석도 넉넉했겠지요. 며칠 후 지하 경매회는 걱정 마십시오.”

“고 수사께서 가주신다니 안심입니다. 이것은 수사를 위해 준비한 영석입니다. 이번 일이 마무리 되면 두 배를 더 드리겠습니다.”

검은 관모 노인이 저물대에서 옥함을 꺼내 상대에게 주었다. 고 수사는 신이 나서 옥함 내의 영석을 확인하고는 만족해했다.

…….

이후 밤이 되자 검은 관모 노인의 방에는 또 다른 결단기 산수 두 명이 찾아와 재료를 주고 영석을 받아 그곳을 떠났다.

* * *

그 후 며칠 간, 한립은 오전마다 구소전(九霄殿)의 경매회에 참석했다. 뜻밖에도 첫날 원하는 물건을 얻어 다른 날도 그럴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그러나 며칠 동안 원하는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적정지로 거래를 했던 부 노인 말대로 한립이 원하는 진귀한 재료는 마지막 날 원영기 수사들을 대상으로 한 거래에나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이렇게 한립은 지하 경매회에 대해서는 잠시 마음을 놓고 매일 구소전을 들락거렸다.

* * *

며칠 후 마지막 경매가 있던 날, 그는 필요한 재료를 발견해 영석 십여 만 개를 주고 그것을 차지했다. 이후 경매회가 끝나자 참석했던 수사들이 몰려나왔고 한립도 그들과 섞여 시장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는 바로 시장으로 가지 않고 급히 천기각(天機閣)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덕분에 한립은 잠시 화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시장 입구에 다시 나타난 음라종 장로들 무리에 면사로 얼굴을 가린 천란 성녀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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