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6
536화. 한 장로
한립은 옥접시 위의 은색구슬을 다시 병 안으로 돌려놓고 다섯 손가락을 펼쳤다. 그러자 보라색 화염이 피어올라 얇은 막을 만들더니 병의 입구를 막았다.
이후 그가 수결을 맺으며 주술을 외워대자 보랏빛이 번뜩이며 보라색 막 위에서 화염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은빛 찬란한 한기가 병의 입구에서 서서히 흘러나와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한립이 푸른 법결을 뿜어내자 보라색 막이 그것을 흡수하고는 다시 주먹 크기의 불덩이로 변해 한기를 꽁꽁 감싸 휘감았다.
병뚜껑을 닫은 그가 보라색 화염을 가리키자 불덩이가 번뜩이며 한립에게로 날아왔다. 한립이 입을 벌려 그것을 삼키고는 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았다.
단전에 있는 원영은 맑은 눈을 부릅뜨고 그 앞에 은빛을 품은 보라색 불덩이가 회전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눈을 깜빡거려 수결을 맺더니 온 몸에서 푸른 기운을 일으켰다.
원영이 날린 법결에 보라색 불덩이가 활활 타올랐고 은빛도 화염으로 변해 섞여 들었다.
* * *
한립은 방 안에서 꼬박 하루를 보냈다. 도관의 관주는 범인이었지만 도문(道門)에 있었기에 수도자들의 사정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다. 그는 한립의 정체를 추측하고 그를 방해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한립이 눈을 떴을 때 그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수 속의 한기를 자라극화와 용합할 수 없다니. 그저 재료로만 써야 하는 것인가?”
그가 입을 벌리자 수정처럼 투명한 구슬이 입안에서 튀어나와 허공에 떠올랐다. 눈앞의 설정주를 보며 손을 뻗으니 한수가 담긴 작은 병이 그의 손바닥 위에 나타났다.
그리고 다른 손을 이용해 병을 내리치니 은색 구슬 하나가 흘러나와 설정주 속으로 사라졌다. 이에 한립은 수결을 맺으며 영화를 분출했다. 불길이 구슬을 감고 활활 타올랐다.
조용히 그것을 지켜보던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 * *
진경 북부 황성, 웅장한 관저 안.
얇은 청삼을 걸친 젊은이가 정자에 앉아 주변의 기이한 화초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청년의 모습은 한립과 무척 비슷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감정이 담기지 않은 차가운 눈빛뿐이었다.
그때 화원 입구에서 걸음소리가 들리더니 검은 관모에 비단 장포를 걸친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고개를 들어 청년의 서늘한 눈을 보고 가슴이 서늘해졌다.
다행히 청년이 먼저 서늘한 기운을 거두고 담담히 말했다.
“운일 수사 아니십니까. 저는 또 누군가 했습니다.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한 장로, 최근 시장에 정탐을 보내놓은 제자들에게서 흥미로운 소식을 들어 이리 오게 되었구려.”
검은 관모의 노인은 헛웃음을 흘리며 다가왔다.
“제가 바깥일에는 크게 관심도 없고 맡고 있는 직무도 없다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나설 일이 있다면 엽 장로님께 말씀하십시오.”
청년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정자 주변의 꽃나무를 바라보며 서늘하게 답했다.
“다른 일이었다면 저도 한 형을 방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은 수사와 연관된 것이라서요.”
“저와 연관된 소식이요? 설마 그 자를 찾은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그 자에 대한 소식입니다. 귀라종 수사들이 갑자기 성 내의 시장을 돌며 은밀히 누군가를 찾아다닌다고 하는데 그들이 지닌 초상화가 한 장로께서 말씀하시던 자와 동일인 같습니다. 한번 확인해 보시지요.”
노인의 소매에서 하얀 옥간이 쏟아졌고, 푸른 장삼의 청년은 옥간을 받아서는 굳은 얼굴로 의식을 불어 넣었다.
“바로 이 자입니다. 음라종에서는 어째서 이 자를 뒤쫓는 겁니까?”
“음라종이 갑자기 성 내의 모든 원영기 장로들을 소집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것이 이 자와 관련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한 장로와 동명의 수사가 집안의 원수라고 하셨기에 처리를 맡기기로 했지만 어떻게 하시든 경매회 만은 지장이 가지 않게 해주십시오.
엽 가에서도 꼭 얻어내야 할 물건들이 있어 엽 장로께서도 차질이 생기길 원치 않으실 테고요.”
“이게 정확한 소식이라면 그 자는 곧 내 손에 사라질 겁니다. 그런데 찾아달라는 마기(魔器)들은 몇 개나 손에 넣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황족과 엽 가를 위해 일하는 조건에는 이것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한 장로는 상대의 말에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마기의 행방에 대해 각지에서 수소문을 하고 있으니 안심하십시오. 게다가 이미 수사를 도와 하나를 찾아드렸지 않습니까? 나머지 것들은 찾는데 어려움이 있어 시간이 좀 걸릴 것입니다.”
“저는 오직 엽 가가 20년을 채운 후에는 약속한 마기들을 주면 됩니다.”
한 장로의 눈빛이 다시 서늘해졌다.
“한 장로에게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킬 것입니다. 그럼 이제 그만 쉬시지요. 그 자에 대한 소식이 더 들어오면 바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노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포권을 하고 물러났다. 청년은 그가 화원을 나가는 것을 보고 소매를 털어 금빛 찬란한 작은 검을 꺼냈다.
검의 표면에는 검은 기운이 휘감고 있었지만 여전히 영성이 사라지지 않고 당장이라도 달아나고 싶은 듯 부들거렸다. 검은 기운의 정체가 그런 검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청년이 미간을 좁히다가 입을 벌려 검붉은 피를 검에 뿌렸다.
웅!
금빛 검은 잠시 울부짖더니 바로 영기가 어두워졌지만 여전히 반항하듯 낮게 웅웅 거렸다.
“정말 성가시단 말이지. 겨우 인계의 물건 주제에 이렇게 영성을 지우기가 어렵다니. 금뢰죽으로 제련한 것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공들이지 않았을 텐데.
허나 검의 주인이 진경에 있다니 기회가 아닌가. 그 자만 없애면 원수도 갚고 비검도 내 수중에 떨어지겠지.”
살기를 드러내자 청년의 동공이 검은색과 보라색으로 번들거렸다.
* * *
같은 시각, 관저의 또 다른 누각에는 사내 둘과 여인 하나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청년을 만나고 돌아온 검은 관모의 노인이었고 다른 사내는 위엄 있는 얼굴에 허리에 옥대를 찬 중년인이었다. 여인은 황청관 도관에 나타났었던 미녀였는데 그녀는 숙연한 얼굴로 노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한 장로가 수락을 했다는 것이로군.”
각진 얼굴의 중년인이 검은 관모 노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말했다.
“그렇지요. 게다가 그 동명수사의 소식을 듣자마자 드러낸 살기는 진짜였습니다. 보아하니 원수라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더군요.”
“하지만 두 사람이 이름뿐만 아니라 용모까지 비슷하고, 그 자가 황족 수사들이 기거하는 황천관에도 잠입하지 않았습니까. 목적은 모르겠지만 우리 엽 가를 겨냥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 자를 음라종 수사들이 추적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름다운 여인이 눈썹을 끌어올렸다.
“사정은 모르겠지만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한 장로가 불문(佛門)이나 도문(道門)에서 보낸 첩자가 아니고 우리 엽 가의 대업에 도움을 줄 수만 있다면 다른 일들은 우리가 상관할 것 없다.
한 장로는 수행이 높은데다 상고 시대에 관련해 아는 바가 많으니 몇 년 후 거사에 꼭 필요한 자다. 그러니 한 장로와 동명 수사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지. 음라종에서 추적하는 것을 보면 뭔가가 있을 게야. 우리 엽 가를 노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장로를 도와 없애는 편이 나을 것이다.”
각진 얼굴의 중년인이 의자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장로님들의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장로라는 자도 왠지 불안합니다. 진정한 수행을 속이는 것 같기도 하고, 마기와 같은 위험한 살상 법기를 모으는 것도 걸립니다. 속을 알 수 없는 자이니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검은 관모의 노인이 돌연 입을 열어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건 내게 생각이 있네. 우리 엽 가 출신의 장로들을 제외한 누구도 완전히 믿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아직 우리의 계획을 공유한 것도 아니니 운일 아우님께서는 마음 놓으시게. 지금 중요한 것은 이번 경매회에서 원하던 물건들을 넣으면서 다른 세력들이 눈치 채지 못 하게 하는 것이야! 방해할 수도 있고 우리의 계획을 알아낼 수도 있으니까.”
각진 얼굴의 중년인이 신중하게 말했다.
“둘째 숙부님, 이번 경매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준비해놓았으니 걱정 마십시오. 눈에 띄지 않는 산수들을 매수해 물건을 구입할 예정이니 우리 엽 가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모를 것입니다.
경매가 끝나고 그들마저 없앤다면 정보가 새어나갈 일은 더더욱 없겠지요. 헌데 황실 쪽은 어찌 되어가고 있습니까? 태일문(太一門)과 천마종(天魔宗)이 궁으로 현칠과 칠묘를 보내다니요.”
아름다운 여인이 의문을 드러냈다. 검은 관모 노인도 그 일을 알고 있는 듯 걱정스런 기색이었다.
“그들은 세 황관의 평산인(平山印)을 노리고 오는 것이니 안심들 하게. 며칠 전 각 도관에서 제련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우리 쪽에 고의로 퍼트렸지. 아마 우리가 무엇을 제련하고 있는지 눈치 채기 시작했을 테니 그것들을 두 가문에 팔라고 압력을 가하려 나선 것일 테야.
미끼를 물었으니 우리의 진정한 계획에 대해 들킬 일은 없을 거네. 그래도 만일을 대비해 계획에 대해 아는 장로들은 홀로 돌아다니지 않도록 했네. 괜히 그 두 노마에게 당해 의식이라도 파헤쳐지면 큰 일이 아닌가. 특히 천마종에서 온 칠묘 진인은 미혼술에 능하니 원영기 수사들이라고 해도 암습을 당하기 십상이야.”
각진 얼굴의 중년인은 눈썹을 끌어올리며 당부했다.
“그랬군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평산인도 저희가 천신만고 끝에 제련해 내는 것인데 그냥 이렇게 내줘야 하는 것입니까?”
검은 관모 노인이 아깝다는 듯 말했다.
“그럴 리가! 한쪽에서 찾아 왔다면 어쩔 수 없이 내주고 말았을지 모르겠지만. 뜻밖에도 두 가문이 나섰으니 기회는 남아 있네. 이미 안배를 해두었으니 그리 쉽게 내주지는 않을 게야.”
노인과 여인은 아는 바가 없었으나 더 캐묻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 * *
시간이 흘러 드디어 경매가 열리는 날이 다가왔다.
음라종은 여전히 한립을 찾아 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시장과 객잔 그리고 진경 내부의 산수들이 모이는 곳만 뒤졌으니 설정주를 제련하며 도관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립을 찾을 리 만무했다.
아침 일찍 한립은 용모를 바꾸었고 새까만 피부의 거한으로 변한 그는 장검을 등에 메고 도관을 나섰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수행도 결단기 수준으로 낮추었다.
예상대로 진서 시장으로 향할수록 고계 수사들의 기운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다. 결단기 수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원영기 수사들도 적지 않았다. 재물깨나 있는 수사들은 이번 경매회를 놓치지 않고 참석하는 듯 했다.
결계를 지나 시장으로 들어가니 다양한 복색의 수사들로 거리가 가득했고 그 중에는 특이한 의복을 입은 이들도 많았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새까만 의복을 입은 수사 몇이 시장 안으로 진입하는 수사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심지어 갈천호도 있었으나 천란 성녀는 보이지 않았다.
한립은 인상을 썼지만 겉으로는 전혀 개의치 않고 전각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가 몇 걸음 나아갔을 때 누군가의 의식이 그를 훑고는 아무 소득도 없자 다음 결단기 수사에게로 옮겨갔다.
음라종은 낯선 얼굴의 산수이거나 신분이 확실하지 않은 자들을 살필 뿐 다른 문파의 고계 수사들은 건들지 않았다.
그들은 의식을 이용해 수상한 자들을 살폈기에 결단기 수사들은 몰랐지만 몇몇 원영기 수사들은 기분 나빠하며 음라종 무리를 향해 눈을 부릅뜨거나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음라종에서 무슨 짓을 벌인 것도 아니고 마도의 큰 종문이라 다들 불쾌한 마음으로 그냥 가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갈 장로, 듣기로 그 자가 용모를 바꾸는 환술에 능하다던데요. 이곳에서 지키고 있어 봐야 무용지물 아니겠습니까?”
“조금만 참으십시오. 천마종이 어느 정도 교분이 있는지 림 수사가 천마종의 칠묘 수사에게 묘음보경(妙音寶鏡)을 빌려왔습니다. 현재 최선을 다해 제련 중이니 이삼 일 내로는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겠지요. 지금 바로 그 자를 찾아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발견하지 못한다고 해도 최소한 경계심을 늦추게 할 수는 있을 겁니다. 경매회 마지막 이틀 동안 거울의 힘을 빌려 수색한다면 잡히지 않을 도리가 없겠지요.”
뾰족한 눈초리의 매서운 인상을 지닌 노인이 불만을 토로하자 갈천호가 노인을 향해 담담히 설명했다.
“어쩐지 주도면밀한 갈 장로께서 이런 쓸데없는 일을 하시나 했습니다. 일이 그렇게만 풀린다면 종주님과 다른 분들이 오시기 전에 우리가 큰 공을 세울 수도 있겠어요.”
“저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갈천호는 마른 웃음을 지으며 보광전 방향을 바라보았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상대는 만만히 볼 인물이 아니었다. 원영 중기의 최고봉 이었던 넷째 장로를 죽인 자인데 어찌 쉽게 처리할 수 있겠는가?
갈천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얼굴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