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5
535화. 회양수(回陽水)와 태양정화(太陽情火)
“우리 음라종 장로를 죽이고 보물을 빼앗아간 자라면 원영 후기 수사라 해도 마땅히 죽여야겠지요! 하지만 그 자와 천란초원도 원한이 깊은 듯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임 수사가 일족의 성녀의 신분으로 대진에 몇 년이나 머물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갈천호가 헛웃음을 지으며 무언가를 암시했다.
“그 자를 죽일 수만 있다면 천란성전이 귀 종에 약속한 조건의 이 할(割)을 더 보장하지요. 물론 먼저 그 자에게서 저희가 되찾아야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삼 할로 합시다. 저런 실력자를 죽이는 것은 우리도 위험부담이 크니까요. 다만 보물에 관해서는 미리 성전에 약속한대로 하겠습니다.”
“그 조건을 수락하지요.”
갈천호의 말에 임은병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돌올 성녀인 수사가 나중에 말을 바꾸지는 않으시겠지요. 호 사제, 바로 전음부를 날려 진경의 모든 장로와 제자들로 하여금 그 자를 수색하도록 하게! 시장에 나타났으니 이번 경매회에 반드시 참석할 것이야. 허나 은밀히 움직여서 다른 세력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해야 한다. 또한 저계 제자들은 물론 장로들도 단독으로 교전하는 것을 삼가라 이르게. 이런 자를 잡으려면 결계로 유인해 한 번에 공격해야 할 것이야.”
갈천호가 또 다른 음라종 사내에게 말했다.
“방 종주 쪽에도 소식을 전할까요? 넷째 장로도 종주가 파견했다 당한 것 아닙니까.”
“저번 귀라번 보수 계획이 틀어지고 넷째 장로 일까지 겹쳐 대장로 등이 방 종주에게 크게 불만을 표하고 있다더군. 폐관을 하며 중요한 보물을 제련중이라 들었고 당장 달려와도 경매회까지는 당도하지 못할 텐데……. 그래도 일단 소식을 보내 놓게. 혹시 우리가 실패한다면 그들과 힘을 합쳐 상대해야 할 테니까.”
사내의 물음에 잠시 주저하던 갈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같은 시각, 한립은 인적이 드문 길에서 의식을 이용해 깡마른 늙은이의 저물대를 살피고 있었다. 그가 돌연 걸음을 멈추자 대연 신군의 나른한 목소리가 머리에 울렸다.
“왜 그러느냐?”
“이게 뭘까요? 아무래도 처음 보는 물건 같습니다.”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가늘고 기다란 옥병을 꺼냈다. 전체가 청록색 옥으로 된 병은 아주 세밀하게 가공되어 있었다.
손가락 끝으로 병을 쓸어본 한립이 바늘처럼 날카롭게 파고드는 한기(寒氣)에 놀라고 말았다. 그는 병을 잡고 흔들어 보았는데 안에서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병 안에 든 액체가 이상합니다. 의식으로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고요.”
한립은 신중하게 병을 살폈다.
“나중에 천천히 알아보면 될 것이다. 이곳은 범인들이 지나다니는 골목이니 함부로 병을 열지는 말고! 괜히 시선을 끌게야.”
“네.”
한립이 조용히 손을 털어 병을 회수했다.
“이미 신분이 노출 되었으니 진경에서 더욱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된다. 음라종과 천란 성녀가 너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야. 게다가 이미 네가 경매회에 참가할 것을 알고 노리고 있겠지.”
“상관없습니다. 설마 진경에 환술을 꿰뚫어 보는 변이영수가 또 있을까요. 원영 후기 수사만 피하면 괜찮을 겁니다. 이번 경매회는 나머지 재료들을 모을 유일한 기회이니 약간의 위험은 감수해야겠지요.”
“꼭두각시의 재료를 모으기 위한 것이니 위험한 상황이 되면 나도 대연결의 경신자(驚神刺)를 이용해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저야 안심이지요.”
한립으로서는 반가운 소리였다.
* * *
한 시진 후 한립은 범인들 틈에 섞여 도관으로 돌아왔고 도관의 도사와 한담을 나누다가 차분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어 방 곳곳에 임시 결계를 펼친 한립은 그제야 청록색 병을 꺼내 세밀하게 관찰하였다. 한참 후 그가 손을 들어 병의 뚜껑을 잡아당기니 영기의 빛이 반짝이며 쉽게 열렸다.
동시에 서늘한 빛이 뿜어져 나오니 방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한립은 자라극화를 다루는 한공(寒功)에 능한 수사였지만 그래도 서늘함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놀란 그는 전신에 보라색 화염을 일으켜 한기의 빛을 밀어냈다. 방 안은 한기의 빛 때문에 두꺼운 얼음층이 생겼는데 미리 결계를 설치하지 않았다면 방 바깥에서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보아하니 한기의 빛이 자라극화에는 미치지 못해도 건람빙염과는 비슷한 정도의 위력을 지닌 것 같았다. 한립이 보라색 화염을 두른 손으로 병을 잡고 흔들자 또 다시 한기의 빛 한 줄기가 새어나왔다.
다시 방 안의 얼음은 더욱 두꺼워졌고 한립은 푸른빛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병에서 새어나오는 하얀 기운을 살펴보았다.
“이건 마치……! 한 방울만 꺼내 옥쟁반에 담아서 내게 보여 보거라.”
갑자기 대연 신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주저하지 않고 저물대에서 손바닥만 한 옥접시를 꺼내 병을 살짝 기울였다.
땡그랑.
은색 액체가 떨어져 내리며 청량한 소리를 냈고 옥접시 위에서 은색 구슬로 변해 굴러다녔다. 예상 외로 은색 구슬은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맞았어! 만년 현옥에서나 얻을 수 있는 한수(寒髓)로구나!”
“만년 현옥은 들어본 것 같은데 한수는 무엇입니까?”
“한수는 단약을 제련하거나 법보를 만드는 재료인 옥수(玉髓)의 일종이다. 그러나 한수는 만년 현옥에서만 채취할 수 있지. 내 기억대로라면 대진의 서북쪽에 있는 북야소극궁(北夜小極宮)에서 대대손손 한 병만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들었는데……. 그렇지, 네가 정련한 설정주도 사실은 만년 현옥을 제련해 만든 것이다.”
“그렇게 희귀한 것이라면 특별한 용도가 있겠습니다.”
한립이 옥접시 위의 은색구슬을 주시했다.
“우리 인류 수사는 대부분이 단약을 제련하는 최상급 재료 정도로만 여기지만 요족들은 이것을 얻기 위해 목숨이라도 걸 것이야. 요수가 화형을 하기 위해 거치는 뇌겁(雷劫)을 이겨 낼 수 있게 해주니까.”
“요족이 화형을 하기 위해 뇌겁을 거친다고요?”
생전 처음 듣는 소리에 한립이 멍해졌다.
“그래. 세상에 고계 요수들은 차고 넘치지만 칠급 이상이 되어 무사히 화형뇌겁(化形雷劫)을 이겨내는 요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어쨌든 천둥의 힘은 대다수 요수들과 상극이니까 말이야. 뇌겁을 겪기 전 요수가 한수가 변한 구슬을 섭취하고 제련을 하면 일정 기간 동안 뇌전의 위력으로부터 어느 정도 몸을 보호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요수들에게 얼마나 대단한 보물이겠느냐? 수도계에 이런 사실을 아는 인류 수사는 드물지만 나는 예전에 북야소극궁의 차가운 속성의 공법을 신기하게 여겨 고계 수사들과 몇 번 싸워본 적 있다.
그때 알게 된 사실에 따르면 천여 년 마다 대진 지역 내의 고계 요수들이 북야소극궁이 위치한 북명도에 비밀리에 모여들어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인다더구나. 궁중의 수사들이 어쩔 수 없이 한수를 약간이라도 내놓기를 바라서라지.”
“그런 일이 있습니까?”
“이상한 일도 아니다. 한수 없이 화형뇌겁을 거치면 십중팔구는 죽은 목숨이니 말이야. 게다가 때가 되면 만요곡의 늙은 괴물들도 앞장서고 공격이 실패해도 요수들은 크게 손해 볼 것이 없다. 물론 북야소극궁 쪽에도 상고 시대의 수사가 남겨 놓은 위력적인 결계들이 있고, 섬에 한안이 있어 음맥이 흐르니 방원 만 리는 뼈가 시린 한기로 가득차지. 차가운 속성의 공법을 익히지 않은 요수는 대부분의 역량을 한기를 막아내는데 쓰느라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요수들이 매번 기세등등하게 몰아쳐도 한 번도 북명도를 함락시킨 적은 없는 것이겠지. 헌데 이렇게 진귀한 액체를 어떻게 그 녀석이 지니고 있었던 것일까? 병에 특수한 표식이 없는지 확인해 보거라.”
“있습니다. 병의 아래쪽에 눈꽃 문양의 표식이 있는데 이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바로 그것이 북명도의 표식이다. 정말 이 병은 북야소극궁의 한수인 듯하다. 그런데 어찌 원영 초기 수사가 지니고 있었는지! 게다가 아무렇게나 저물대 속에 넣어 두다니 이상하구나.”
대연 신군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 이상한 일이 어디 한둘 인가요. 누군가 훔쳤거나 북명도 내부에서 누군가 빼돌린 것을 나중에 손에 넣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인류 수사에게는 법기나 단약을 재련할 재료로 쓰일 뿐이라면 북야소극궁 수사들은 어째서 오랜 세월 요수들의 저항을 무릅쓰고 이것을 지킨 것일까요?”
“대진의 일부 수사들도 그것을 궁금해 했었지! 대외적으로는 수도계의 안녕을 위해 팔급 이상의 요족의 수를 억제하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한수 한 병이면 수십 명의 팔급 요족들이 탄생할 수도 있으니 그 정도면 대진 수도계와 쌍벽을 이루어 큰 혼란이 벌어질 테니까 말이야. 그러나 이런 설명은 다른 수사들을 속이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했다. 노부가 예전에 북야소극궁 부궁주쯤 되는 자와 싸울 일이 있었는데 아주 말버릇이 고약했지. 그 자를 죽이고 추혼술을 이용해 혼쭐을 내다가 무심코 한수에 관한 비밀을 알아 낼 수 있었다.”
대연 신군은 잠시 말을 멈추고 그때를 회상했다.
“비밀이라면…….”
“아마 오늘 한수를 보지 못했다면 까맣게 잊고 있었을 것이다. 이 일에 관해서는 북야소극궁의 몇몇 말고는 아무도 모를 테니까. 사실 한수를 가장 잘 활용하는 법은 상고 비약인 회양수(回陽水)를 제련하는 것이다.”
“회양수라면 뼈와 살을 자라나게 한다는 육체를 살려내는 비약이 아닌지요!”
대연 신군의 신중한 목소리에 한립은 헛바람을 들이켰다.
“아무리 중상을 입었어도, 몸이 찢겨져 나가도, 혹은 머리와 목이 분리 되어도 이 영약을 상처 부위에 바르면 순식간에 회복이 된다고 한다! 심지어 일부 경전에는 죽어가는 이도 살려내는 역천의 약효를 지녔다고 적혀 있기도 하지. 물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불과하니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회양수가 수사의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은 여러 경전에 공통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본래 수명의 사분의 일을 늘려준다니,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느냐?”
“그 말은 결단기 수사가 원영기에 이를 수 있고, 원영기 수사는 화신기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뜻입니다.”
한숨을 내쉰 한립이 중얼거렸다.
“물론 한수는 회양수를 제련하기 위한 주재료 중 하나에 불과하다. 정말 제련하려면 만장 용암 아래에서 구할 수 있는 태양정화(太陽情火)가 필수적이지. 태양정화를 이용해 담금질한 한수만이 음양의 조화를 이뤄 회양수를 제련해 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괜히 귀한 한수만 낭비하게 되거든.”
“태양정화를 어디 가서 찾는단 말입니까. 만장 용암에 들어가 보통의 수사가 얼마나 버틸까요? 그 안에 태양정화가 형성되어 있을 가능성도 낮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을 찾아낼 가능성은 더욱 낮습니다. 게다가 재료들을 모두 구비한다고 해도 회양수를 제련할 방법을 모르면 무용지물이지요.”
한립이 자조적으로 말하자 대연 신군이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태양정화를 어떻게 구할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회양수를 제련할 방법은 알고 있다. 설마 내가 북야소극궁의 부궁주를 죽였다는 것을 잊은 게냐? 그 자의 의식에서 제련법을 발견하고는 기록해 두었지. 만일 네가 필요하다면 내주마.”
“제련법을 알고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얼른 제게 알려주시지요. 혹시 앞으로 쓸 데가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한립은 대연 신군의 말에 기뻐했다. 회양수만 제련할 수 있다면 화신기에 들 가능성이 크게 느는 것 아닌가!
“태양정화는 인간 수사들이 얻을 물건이 아니니 큰 희망을 품지는 말거라. 그렇지 않았다면 북야소극궁 영대 수사들이 어찌 한수를 남겨 두었을까.”
대연 신군은 몇 마디 충고를 하며 죽통 속에서 노란 옥간을 던져주었다. 단시간에 회양수 제련법을 복제한 것이다.
“감사합니다! 저도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 알아두려는 것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립이 옥간을 받아 들고 씨익 웃었다.
“네 설정주도 만년 현옥을 제련해 만든 것이니 한수를 몇 방을 주입하면 법보의 위력이 크게 늘 것이다.”
대연 신군은 이것을 마지막으로 입을 다물었다.
대연 신군이 언급하지 않았어도 그렇게 하려고는 했지만 더욱 궁금한 것은 다른 곳에 쓸 수는 없는 가였다. 한수의 한기가 대단하니 자라극화와 융합해 위력을 끌어 올릴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