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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533화 (290/2,000)
  • # 533

    533화. 옥패

    한립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괴이한 푸른빛을 드리웠고 두 눈도 서늘하게 변해있었다.

    갈천호와 천란 성녀 등 네 수사가 그것을 보고 경계 태세를 갖추자 그들도 체내의 법보가 당장이라도 빠져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한립이 무언가를 생각해 내고는 뜻밖에도 푸른 기운을 흩어버리고는 냉랭히 말했다.

    “기억대로라면 진서 시장은 수사들 간의 싸움을 엄하게 금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규칙을 어기면 시장을 주관하는 삼대 도교 문파와 불교 종파의 추살령이 떨어지지요. 여러분은 동급 수사들에게 쫓겨 달아나고 싶으신 겁니까?  아니면 음라종을 믿고 도교나 불교 종파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디 누가 우리 도불(道佛) 양맥을 안중에 두지 않는지 알고 싶군요. 빈도는 오벽이라 하는데 안면이나 익혀 보십시다.”

    한립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멀리서 누군가의 기세등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 골목의 다른 누각에서 은색과 금색의 빛줄기가 날아와 여러 사람들 앞에 떨어져 내렸다. 도사와 승려였다.

    “누구신가 했더니 음라종 분들이셨군요. 어찌 이곳의 규칙을 어기고 한번 싸워보시렵니까?”

    말을 하는 이는 얼굴이 번지르르한 회백색 머리의 도사였다. 그가 그들을 향해 눈을 부릅뜬 것이 언제라도 성질을 부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다른 인물은 추레한 얼굴에 들창코를 지닌 중년 승려였는데 아무 말도 없었지만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음라종 수사들을 냉랭히 쳐다보다가 한립과 천란 성녀를 발견하고는 의아해했다.

    대진에 원영 중기의 낯선 수사가 둘이나 나타난 것은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저 수사에게 알아볼 일이 있을 뿐이오. 한가롭게 남의 일에 관여할 생각 마시오.”

    갈천호가 늙은 도사를 아는지 냉랭히 대꾸했다.

    “무엇을 하든지 이곳의 규칙은 어길 수 없소. 싸움을 벌일 생각이라면 이곳을 당장 떠나는 것이 좋을 게요. 만일 규칙을 어기면 빈도가 어찌 나오든 원망하지 말고요.”

    “오벽, 그럼 우리가 싸움을 벌인 다음에나 끼어드시오. 안 그래도 진극문의 신통이 궁금하던 차였으니 말이오.”

    갈천호는 열이 받았는지 말투가 삭막해졌다.

    “갈 수사 그리 흥분하실 것 없습니다. 여러분이 법력을 이용해 싸우지만 않는다면 저희도 끼어들지 않을 테니까요. 다만 두 분 시주께서는 얼굴이 낯선데 제게 성함을 알려주실 수 있을 런지요.”

    추레한 승려가 눈을 굴렸다.

    “천란의 임은병이라 합니다. 사실 제가 천란성전의 원수를 찾고 있는 터라 저 수사의 짐을 확인해 신분을 확인하려는 것뿐이었습니다. 만일 제가 찾는 자가 아니라면 사죄를 하고 그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천란 성녀 임은병이 고개를 틀어 한립을 보았다.

    “웃기는 소리! 나를 뭘로 보는 것이오. 내가 왜 당신들에게 내 신분을 증명해야하지?”

    “수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제가 찾는 자는 천란성전과 불구대천의 원수입니다. 신분을 확인하지 않고는 절대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천란 성녀, 초원 돌올인들의 성녀가 아니십니까?”

    늙은 도사가 물었고 그 말을 들은 추레한 승려도 놀란 얼굴이었다.

    “예, 소녀가 과분하게도 성녀의 직책을 맡고 있습니다.”

    “천란의 서 선사께서는 자질이 뛰어나셔서 사백 년도 되지 않아 원영 중기에 드셨지요?  빈도도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잘 지내십니까?”

    오벽의 얼굴이 한결 풀어졌다.

    “서 선사께서는 아주 잘 지내십니다. 수십 년 전에 원영 후기에 드셔서 이제 돌올족 대선사 중 한 분이 되셨지요.”

    임은병은 도사가 모란초원의 대선사 중 하나와 친분이 있다는 듯 이야기하자 속으로 안심했다.

    “역시 빈도의 예상 대로군요. 그렇게 어린 나이 높은 수행에 이르시다니 서 수사의 앞날이 기대가 됩니다.”

    늙은 도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한립은 상황이 묘하게 돌아가자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많은 원영기 수사들에게 포위를 당했으니 다시 혈영둔을 이용해 달아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가 주저하고 있을 때 갑자기 대연 신군이 전음을 보내왔다. 한립이 그의 얘기를 들으며 잠시 눈썹을 끌어올리고는 안정을 되찾았다.

    그때 서 선사의 소식을 들은 늙은 도사가 시선을 한립에게로 돌렸다.

    “수사께서도 수행이 남다르시니 제게 어디 출신의 누구이신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중재를 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진서 시장에서 신분을 밝혀야 한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입니다. 만일 그런 규칙이 있었다면 지켰겠지만 아니라면 그럴 필요를 못 느끼겠군요.”

    한립의 차가운 대꾸에 늙은 도사는 열이 받아 얼굴을 굳혔지만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때 옆에 있던 승려가 웃음을 터트리며 나섰다.

    “당연히 그런 규정은 없습니다. 오 수사는 그저 서로의 오해를 풀어 보려 한 것뿐입니다. 수사께서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으시다면 그러시지요. 그러나 저희는 이 안에서의 싸움만 말릴 뿐 다른 곳은 저희 소관 밖입니다. 그때 원영기 수사 4인에게 둘러싸인다면…….”

    승려는 미소 지은 채 은근히 협박을 하고 있었다. 한립은 냉소했지만 갈천호와 천란 성녀 등의 눈빛을 보니 쉽게 그를 놓아 줄 것 같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잠시 생각을 하던 한립이 임은병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보따리 속의 물건만 확인하면 되는 것이지요?  허나 내가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 자가 아니라면 그냥 사과 한 마디로는 안 될 것입니다. 내 마음에 싸인 응어리는 어찌 풀어줄 생각입니까?”

    “무슨 소리?  지금 우리를 위협하는 게요?”

    갈천호가 냉랭히 물었다.

    “아무 상관없는 나를 붙들어 놓고 강제로 보따리를 풀어보라 하다니! 그런 수모를 당하고 내가 어찌 할 것 같소?  다른 건 몰라도 둔술에는 자신이 있는데 네 명이 한 번에 공격해도 무사히 달아날 거라 자신하오. 그렇게 되면 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음라종과 당신네들에게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시오. 난 홀로 떠도는 처지라 보복이 두렵지 않소이다.”

    한립이 세게 나오자 갈천호와 천란 성녀 등 수사들의 표정이 달라졌고 오벽과 중년인 승려도 가슴이 서늘해졌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원영 중기의 산수 같은데 거기다 작은 일에도 앙갚음을 하는 성격이라면 가장 엮이고 싶어 하지 않는 부류였다.

    그들의 수행이면 문파의 저계 제자들을 무작위로 공격해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특히나 특이한 신통과 둔술을 익혔다면 원영 후기 수사가 나서도 달아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원영 중기 이상의 수사들은 큰 종파에서도 아예 포섭을 하거나 척을 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저런 인물과 원한을 맺느니 그냥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죽이는 것이 나았다.

    만일 그가 찾던 자가 아니라면 크게 성가셔 질 것이다. 갈천호가 천란 성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이에 임은병도 난감한 듯 매끈한 눈썹을 구겼다. 상대가 정말 보복을 한다면 천란초원은 괜히 적을 만드는 꼴이었다.

    “별일 아닌데 그리 격하게 말씀하실 것 있나요. 저희는 그저 수사의 짐꾸러미를 보고자 할 뿐입니다. 이렇게 하시지요. 만일 제가 오해한 것이라면 보상을 할 만한 적당한 조건을 제시해주세요. 어떠신지요?”

    임은병이 눈을 깜빡이며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천란 성녀도 괜히 착각 때문에 고계 수사와 원수를 맺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조건이라…….”

    한립이 냉랭히 여인의 몸을 훑더니 무표정하게 무언가를 생각했다.

    “원하신다면 영석으로 죄송한 마음을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영석은 되었고.”

    한립이 냉소하며 손을 휘저으니 등 뒤의 보따리가 앞으로 날아왔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다들 놀라 보따리로 시선이 모아졌는데 한립이 단번에 보자기를 벗겨냈다.

    이에 맑은소리가 울려 퍼지며 금빛이 찬란한 기다란 도검이 나타났다. 칼집에 꽂혀 있어 날은 보이지 않았지만 화려한 영기의 빛과 웅웅거리는 모습이 무척 귀한 이보가 틀림없었다.

    어쩐지 강제로 보따리를 풀어 내용물을 보여 달라는 요구에 열이 받을 만 했다. 다른 누구라 해도 아끼는 보물을 강제로 드러내라 강요하면 열이 치밀어 오를 것이다.

    임은병은 기다란 도검을 보고도 의심스러운지 의식을 방출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의심을 풀었다.

    갈천호와 다른 음라종 수사들도 보따리 속의 보물을 보고는 어색한 표정을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되면 괜히 동급의 고계 수사를 건드린 꼴이었다. 그나마 전투로 이어지지 않아 다행이지 섣불리 공격했다가는 원한을 살 뻔했다.

    도사와 승려는 말없이 미소를 머금고는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태도를 취했다.

    “정말 수사를 오해한 것이었군요. 제 잘못입니다. 무엇이든 말씀만 하시지요.”

    천란 성녀가 한숨을 짓고는 실망한 기색으로 사과했다.

    “영석은 부족하지 않으니 이렇게 합시다. 수사께서 지니고 계신 옥패가 마음에 드는데, 내어주시겠습니까?”

    한립이 천란 성녀를 훑으며 허리춤의 옥패를 눈짓했다.

    “이 옥패를요?”

    임은병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으며 나비 문양이 새겨진 청록색 옥패를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항상 몸에 지니고 있는 물건이었으니 평범한 것은 아니었지만 정신을 맑게 해주는 법기였다. 축기기나 결단기 수사라면 몰라도 원영 중기 수사가 탐낼 만한 물건은 절대 아니었다.

    그녀도 세공이 아름답고 오랜 세월 지니고 있던 것이라 그냥 지니고 다닌 것뿐인데 상대가 뜻밖에도 이것을 달라고 하니 의아할 따름이었다. 임은병은 주저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왜요. 아까우십니까?  그럼 다른 물건으로 바꾸시죠. 그 머리의 비녀가 아주…….”

    한립이 눈을 빛내며 대수롭지 않게 원하는 것을 바꾸려 했다.

    “겨우 법기에 불과한데 아깝다니요. 그저 오래 지니고 있던 것이라 정이 조금 들었지요. 수사께 드리겠습니다.”

    임은병은 바로 옥패를 한립에게 던져주었다.

    한립은 한 손으로 옥패를 받고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바닥을 뒤집자 옥패가 저물대 속으로 사라졌다.

    이어 그는 기다란 금색 도검을 회수하고는 다시 보따리로 둘둘 말아 두 말 없이 몸을 돌렸다.

    시장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한립을 보며 다른 수사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때 임은병이 무슨 생각이 났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저……그러고 보니 아직 수사의 성함도 알지 못하는 군요. 제게 알려주실 수 있을 지요?”

    “바다 건너서 온 수사 려비우요!”

    한립은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점점 멀어져 갔다.

    “려비우?  갈 형, 그런 수사를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이렇게 많은 동급 수사에게 둘러싸여 안색도 변하지 않을 정도라면 능력이 상당한 자일 텐데요.”

    임은병이 한립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대의 보따리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없었다.

    “바다 건너서 온 수사들도 대진 수도계에 속하기는 하지만 내륙 수사들과 크게 교류가 없고 내륙에 나타나는 일도 드물지요. 게다가 수사들의 수행도 천차만별이라 산수와 크고 작은 세력이 많아 그쪽 출신 수사가 아니고서는 자세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유명한 해외삼선(海外三仙)과 같은 실력자들의 경우에는 예외지만요.”

    갈천호가 난색을 표하면서 여인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 말에 천란 성녀는 미간을 좁혔다. 스스로 려비우라고 밝힌 수사에 대해 더 알아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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