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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532화 (289/2,000)
  • # 532

    532화. 우연한 만남

    전송진의 사방에는 중계 영석이 일고여덟 개나 박혀 있었다. 만일 돌아오는 데도 비슷한 수량의 영석이 필요하다면 오고가는 데만 영석 천 개가 넘게 드는 셈이었다.

    잠시 후, 주위 영석에서 빛이 쏘아져 나와 둘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눈부심과 두통이 가시고 한립과 왕 장로는 어느 돌무지 위에 도착했다. 발밑에는 그들을 이곳으로 보내준 것과 비슷한 전송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한립이 주위를 살폈다.

    천여 장 너비의 공간은 하얀 돌덩이들뿐이었고 구덩이가 파져있었다.

    한립이 크게 숨을 들이마시다가 가슴이 철렁했다. 이곳에는 영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뿌연 하늘과 어우러진 말 그대로 죽은 땅이었다.

    “한 수사도 이미 보셨겠지만 이 공간은 죽은 땅이나 마찬 가지입니다. 공간균열 중에는 영맥을 함유하고 있는 것도 있다지만 가능성일 뿐이지요. 특히나 전설 속의 영묘원처럼 인계의 영기를 능가하는 성지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대진 수도계가 공간균열을 발견하기 시작한 이래 미약하게나마 영기를 함유한 곳은 겨우 서너 곳 정도였습니다. 그런 공간 균열들은 본 각의 도움으로 개자공간으로 제련되었고요.”

    “그렇다면 공간을 절약하고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장점은 없군요. 어쩐지 대진을 돌아다니며 개자공간에 대해서는 들어보지 못 했습니다.”

    한립이 턱을 문질렀다.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요. 종문에서 대량의 보물을 감출 곳을 필요로 한다든가 아니면 적에게서 숨을 밀실이 필요하다면 개자공간만 한 것이 없습니다. 저희 천기각처럼 법기와 법보를 실험하는 공간으로도 나쁘지 않고요. 개자공간이 드문 것은 제련할 만한 적합한 공간균열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몇몇 공간균열은 일부 종문이 자신들만의 비밀로 함구하기에 더욱 알려지지 않고 있고요. 게다가 개자공간을 제련하는데 드는 재료와 비용이 엄청나 더욱 그 수가 적습니다.”

    왕 장로는 아쉽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제가 상상하던 것과는 거리가 너무 멉니다. 드나드는데 전송진이 필요하다면 불경에 나오는 겨자씨 안에 수미산(須彌山)을 넣는다는 표현에 적합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이렇게 거대한 공간을 휴대할 수 있는 것은 영계 혹은 선계에서나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저희는 대량의 재료를 들여 공간균열을 안정화시키는 것도 겨우 해낸 것을요.”

    “공간균열을 안정화 시킬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럼 무너져 내린 공간의 공간균열도 다시 안정화 시켜 회복할 수 있을까요?”

    “가능은 합니다. 완전히 허물어져 버리지만 않았다면 안정화시킬 수 있지요. 한 수사께서 그런 공간균열을 아십니까?”

    은색 장포 수사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바다 바깥에서 공간균열을 보기는 했습니다. 다만 들어가 보지 못해 완전히 허물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입구는 불안정하더군요.”

    상대는 그가 자세히 말하고 싶어 하지 않자 입을 다물고 손바닥을 뒤집어 천기부가 들어 있다는 옥함을 꺼냈다.

    “바로 천기부를 방출할 터이니 살펴보시고 흡족하시다면 거래에 대해 이야기 나누시지요.”

    “예, 알겠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자 왕 장로가 즉시 옥함을 열었다. 안에서 우윳빛이 새어나오며 가운데에 희미하게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왕 장로가 주술을 외며 옥함을 털어 내니 하얀 빛줄기가 날아올라 순식간에 몇 묘에 달하는 크기로 커지더니 하얀 옥으로 만들어진 누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왕 장로가 수결을 맺으며 손짓을 하자 하얀빛이 부르르 떨며 땅으로 내려왔다.

    쿠쿠쿵!

    한립이 뒷짐을 지고 자세히 관찰했다.

    동굴은 일반적인 거처에 비해 약간 작았다. 하지만 그 안에 누각과 정원 등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고 바깥을 뒤덮은 하얀 기운 때문에 신선이 사는 곳처럼 느껴졌다.

    잠시 바깥에서 둘러보던 그가 푸른 빛줄기로 변해 안으로 쏘아져 들어갔다.

    왕 장로가 그것을 보고 서둘러 손바닥을 뒤지어 하얀 옥패를 꺼내니, 옥패에서 빛이 나가 동굴의 보호막이 사라지고 한립을 통과시켰다.

    * * *

    얼마 후, 한립은 동굴에서 나와 근처의 돌무지로 돌아왔다.

    “어떠십니까?  마음에 드셨는지요?”

    “크지는 않지만 연단실과 영수를 키울 수 있는 밀실까지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더군요. 하지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천기부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물어 보시지요. 숨김없이 답해 드리겠습니다.”

    “천기부의 가장 큰 장점은 언제든 거대한 거처를 축소시켜 들고 다닐 수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저물대 혹은 영수대처럼 안에 둔 물건과 영수들도 휴대가 가능한 것입니까?”

    “거처 내의 물건들은 괜찮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는 힘듭니다. 아무리 위력이 뛰난 영수도 천기부가 축소하면서 생기는 거대한 압력을 이기지 못할 테니까요. 그 압력을 견딘다 해도 축소되는 순간 외부와 차단돼 영기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시간이 길어지면 어떤 영수라도 살아남기 어렵겠지요.”

    왕 장로는 숨김없이 답했다. 어차피 이런 단점은 조금만 사용해 보면 당장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 거처를 거두어들일 때마다 약재원에 심어 놓은 영약까지 전부 회수해야 한다는 뜻이군요.”

    “맞습니다. 그게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하는 천기부의 단점이지요. 하지만 언제든지 휴대가 가능하고 소환할 수 있는 거처란 점만으로도 어떤 보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렇군요. 만일 제가 원하는 기능까지 있었다면 제 손에 떨어질 때까지 남아 있지도 않았겠지요.”

    “그 말씀은 거래할 생각이 있으시다는 뜻입니까?”

    한립이 웃는 것을 보고 왕 장로의 얼굴이 밝아졌다.

    “제게 몇 가지 진귀한 재료가 있기는 합니다. 일단 수사께서 천기부와 거래할 만한 보물의 목록을 보여주시면 이후 수량을 논하도록 하지요.”

    “그래야지요! 본 각이 필요로 하는 재료들이 적힌 옥간입니다. 천천히 살펴보시고 말씀해 주십시오.”

    은색 장포 수사가 미소를 머금고 하얀 옥간을 꺼내 주었다.

    * * *

    한 시진 후, 한립이 천기옥 대문을 나설 때에는 왕 장로가 밝은 미소로 그를 직접 배웅했다.

    한립은 몇 마디 인사를 하고 뒤돌아 떠났다. 왕 장로는 그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서 있다가 다시 천기각으로 들어갔다.

    한립은 허리춤의 불룩한 저물대를 쓰다듬으며 미소 짓고 있었다. 필요 없는 재료로 천기부를 거래한 후, 그는 요단과 영초 일부를 꺼내 엄청난 양의 영석으로 바꾸었다.

    한립은 걸어가면서 계속 의식의 일부를 방출해 누군가 자신을 염탐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았다. 천기각의 명성으로 보아 어느 정도 신의를 지키겠지만 한립은 엄청난 재산을 노출했고, 바다 밖의 산수라고 자신을 소개했으니 조심하는 게 좋았다.

    한참 후에야 누군가 쫓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골목을 돌자마자 전신에서 푸른빛을 일으켰다. 그러자 키가 조금 커지고 얼굴과 복색이 달라졌다.

    골목을 빠져 나올 때 그는 남색 장포 차림의 중년 유생으로 변했다. 턱수염과 콧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유생은 외모가 수려했다. 그의 수행으로 원영 후기 수사를 마주치지만 않는다면 그의 진짜 모습을 들킬 걱정은 없었다.

    그제야 안심한 한립은 다른 점포로 걸어갔다.

    다시 몇몇 점포들을 돌아보았지만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했다. 몇 가지는 그의 흥미를 끌기도 했지만 꼭두각시와 삼염선을 제련할 재료는 없었다.

    ‘경매회가 열리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겠구나.’

    한립은 길 끝에 이르러 웅장한 규모의 석전(石殿)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석전이 바로 보광전으로 다른 상점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각 층이 스무 장에 달했기 때문이었다. 아마 한 번에 천 명 이상의 수사들을 수용할 수 있을 듯 했다.

    대전 입구에는 축기기 수사 몇 명이 지키고 서 있었고 아직 준비 중인지 일반 수사들이 드나드는 것을 막고 있었다.

    한립 외에도 몇몇 수사들이 지나가며 건물을 가리키며 떠들어댔다. 한립이 보광전을 살피다 막 떠나려는데 갑자기 안에서 네 명의 남녀 수사들이 나타났다.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을 훑어보던 한립은 순간 안색이 달라졌지만 즉시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와 몸을 돌렸다.

    “잠시만요.”

    그가 막 걸음을 떼려는데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립은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걸음을 멈추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몸을 돌린 그는 아주 차분한 얼굴이었다.

    대여섯 장 앞에 하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그를 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여인 옆에 서 있는 다른 여인과 사내 둘은 그저 의아한 얼굴로 한립을 바라보았다.

    의식으로 훑어보니 네 명 전부 원영기 수사로 특히 하얀 의복의 수사와 나란히 서 있는 사십대 검은 장포 수사는 그와 같은 원영 중기의 수행을 지니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수사의 수행이 남다른 것 같아 인사나 나누고 싶어서요. 불편하게 여기시는 건 아니겠죠?”

    하얀 의복의 여인이 한립을 훑어보며 그의 등 뒤에 멘 기다란 보따리를 잠시 쳐다보았다.

    여인은 얼굴을 가렸지만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끌었다. 그러나 한립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바로 초원에서 그와 크게 붙었던 천란 성녀였던 것이다.

    “불편하다니요. 수사의 수행과 인품이면 제가 여러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어 해야지요. 허나 급한 일이 있어 오래 머물 수는 없습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한립은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가 포권을 하고 다시 몸을 돌리려는데 여인이 신형을 움직여 그의 앞을 막아섰다.

    “아직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대답은 해주시고 가시지요.”

    “지금 저를 추궁하시는 겁니까?”

    한립도 표정을 굳혔다.

    “소저, 아는 수사입니까?”

    검정 장포의 수사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어왔다. 그는 검은 기운에 휩싸여 있는 것이 한 눈에 보기에도 마공을 깊이 익힌 수사였다.

    “아닙니다. 처음 보는 수사신데 어째서인지 제가 찾으려는 자를 생각나게 하는군요. 갈 형도 아시다시피 그 자를 찾기 위해 대진을 몇 년간 돌아다니지 않았습니까. 제가 착각한 것은 아닐 겁니다.”

    천란 성녀가 어깨에 걸친 푸른 천을 매만지며 한립을 향해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

    “저 자가 본 종의 귀라번을 지녔단 말입니까!”

    검은 장포 수사의 얼굴이 갑자기 흉악하게 일그러지며 한립을 노려보았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체격과 외모는 다르지만 느낌이 비슷하고 등에 멘 봇짐의 형태가 같군요.”

    천란 성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말에 검은 장포 수사도 한립의 짐을 바라보며 의식으로 내부를 살피려 했지만 강력한 의식에 의해 튕겨 나왔다.

    “저는 음라종 갈천호라 합니다. 등에 멘 짐을 풀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희가 생각하는 물건이 아니라면 수사를 더 이상 곤란하게 하지 않겠습니다.”

    갈천호가 경계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다른 남녀 수사들도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는 한립의 양쪽으로 움직였다.

    아무도 법술을 펼치거나 법보를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흉흉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인근의 결단기 및 축기기 수사들이 사색이 되어 흩어졌다. 고계 수사들 간의 전투가 시작되면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 날 수 있었다.

    석전 근처에는 순식간에 원영기 수사들만이 남게 되었고 몇몇 인근의 누각들은 벌써 보호 금제를 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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