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0
530화. 천기각(天機閣)
현엽왕이 한 달 가까이 수사들을 가두어 두자 곧 인근의 원영 후기 수사가 소식을 듣고 나타났다. 그가 경천동지할 신통력을 부리자 놀란 강시들은 다시 설릉산맥 깊숙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원영 후기 수사는 그들을 쫓을 생각이 없는 듯 그대로 홀연히 떠났고 그제야 겨우 살아난 수사들은 모든 세력을 전부 철수시켰다.
세 강시들도 원영 후기 수사를 경계하며 그들의 철수를 방해하지 않아 그렇게 대전이 막을 내렸다. 물론 이것은 노인이 알고 있는 사실에 한립의 추측이 더해진 이야기였다.
그는 풍 씨 가문의 비밀동굴을 나오다 중상을 입은 현엽왕을 직접 만나지 않았던가.
설릉산맥에서 광사 상인 등과 일전을 벌이고 아직 원기를 회복하지도 못했을 텐데, 얼마 뒤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것이 대단했다.
얼마나 많은 영단과 묘약을 취했을지는 몰라도 세상에 이렇게 빨리 대량의 원기를 회복시켜주는 단약이 있다는 것을 한립은 확실히 알았다. 그도 단약은 넘치지만 아직도 본래의 수행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유일한 가능성은 그 만년 시왕의 육체가 더없이 강력하거나 원기를 회복하는데 탁월한 특수한 공법이나 신통력을 익히고 있는 것이다.
시왕의 능력에 대해 생각하다보니 한립은 체내에 있는 천시주를 떠올렸다. 명왕결을 수련할 때 그도 이 구슬의 효험을 톡톡히 누렸던 것이다.
아마 구슬의 능력과 현엽왕의 빠른 회복이 연관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한립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다시 진경에서의 일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오래 머무는 것은 좋지 않은 생각이었다. 풍전이 실종되면 누군가 찾아 나설 것이고 이곳까지 이르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도관이나 절을 찾아 잠시 머무는 것이 나을 듯 했다. 객잔에 비해서는 그런 곳이 조용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경매회에 관해서도 진경의 시장을 들려 소식을 모아보아야 했다. 한립은 결정을 내리고 저택을 나왔다.
* * *
한립은 몇 시진에 걸쳐 도성내의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은 도관을 찾아냈다. 도관의 도사(道士)들은 전부 범인들로 전부 법력이 없는 자들이었다.
한립은 은자를 시주하고 관주를 설득해 이곳에 잠시 머물기로 했다.
그곳에서 하루를 머문 그가 아침 일찍 도관을 나와 어제 돌아다니며 발견한 서원으로 향했다. 진경에 서원을 차릴 수 있고 규모가 작지 않은 것으로 보아 유가 문종과 연관이 있는 곳이 분명했다.
한립은 조용히 서원으로 잠입해 백발의 노인 유생 앞에 나타났다.
그는 원영기 수사로서의 기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기에 늙은 유생은 크게 놀라고 말았다. 노인은 상대의 수행을 확인하고 대적할 마음마저 포기한 채 앞으로 나서 먼저 예를 갖추었다.
“선배님께서 저희 서원을 찾아 주시다니, 완배가 도울 일이 있을 지요?”
“현명하구나. 진경에 위치한 시장들의 위치와 경매회에 관련한 소식들을 전부 말해보아라.”
한립은 미소 지으며 유유히 물었다.
“시장의 위치가 있는 옥간을 복제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경매회에 관해서는 저도 아는 바가 많지 않은데 무엇을 알고 싶으신지요?”
“경매회가 열리는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 그리고 경매에 올라올 진귀한 재료가 무엇이 있는지 말해 보거라.”
“경매회는 아흐레 후 진서 시장의 보광전에서 열리는데 결단기와 원영기 수사를 위한 경매가 엇갈려 진행됩니다. 원영기 수사들은 결단기 수사의 경매에 참가할 수 있으나 결단기 수사들은 원영기 수사의 경매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어떤 진귀한 재료가 나오는지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이런 대형 경매회는 대진의 유력 가문들이 연합해 여는 것인데 외부인이 어떤 물건을 갖고 나올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지만 그간의 경험상 진귀한 재료가 적어도 백 개 이상 나올 것이고, 몇몇 선배님들이 갖고 오신 물건들까지 합쳐져 보통 닷새에서 엿새 정도 진행이 되곤 합니다.”
“그렇구만, 보광전이라!”
“선배님, 옥간이 이미 준비되었습니다.”
노인이 옥간 복제를 완료하고 한립에게 두 손을 모아 받쳤다. 한립은 말없이 옥간을 받아 의식으로 훑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오늘 나를 만난 사실은 다른 이들에게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야. 그렇지 않으면…….”
한립은 서늘하게 웃었고 전신에서 푸른빛을 뿜으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노인이 놀란 마음에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 * *
한립은 서원을 나와 옥간을 살피며 바로 진서 시장으로 향했다.
소위 진서 시장이라는 곳은 고명한 은닉 진법을 이용해 연중 숨겨놓는 진경의 서쪽에 위치한 구역이었다. 한립은 시장의 입구에서 범인들은 절대 알아차리지 못하는 진법을 지나 한적한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한눈에 보아도 거리 곳곳에는 수백 명의 수사들이 돌아다니며 양 옆의 점포들을 드나들었다. 한립은 따로 의식을 이용해 훑어보지는 않았다. 이런 대형 경매회라면 한동안 원영기 수사가 머물며 관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서 시장은 그가 대진의 남부지역에서 보았던 다른 시장과는 조금 달랐다. 길옆에 나란히 늘어선 점포들은 전부 2층이나 3층의 누각으로 각각 자신들의 재력을 뽐내고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 점포의 이름들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대진의 수도계에 이름난 상가들이 이곳에 분점을 내놓은 듯 했다. 그는 이제 수집해야할 재료의 명단을 들고 각각의 점포를 돌며 확인했다.
한립은 원하는 물건을 찾지 못해도 조급해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쉽게 재료를 찾을 거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보다 중요하게 처리할 일이 있었다. 본래 지니고 있던 대량의 영석을 복면 수사의 모습으로 재료들을 거래하면서 대부분 써버렸다. 이제 대형 경매회가 열리기 직전인데 남은 영석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는 대형 상가를 찾아 진귀한 물품을 영석으로 바꿔둘 요량이었다. 원하는 영석의 수량이 많았기에 거래 대상도 그만큼 규모가 커야 했다
한립이 3층 누각 앞에 이르러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전의 상가들보다 누각도 크고 드나드는 수사들도 많았다. 대문 위에 걸린 편액에는 천기각(天機閣)이라 적혀 있어 더욱 눈길을 끌었다.
‘천기각이라면 천기옥을 판매한다는 그곳인가? ’
한립은 잠시 머뭇거리다 걸음을 옮겼다.
누각의 1층은 면적이 삼, 사십 장은 되었고 대여섯 명의 수려한 용모를 지닌 연기기 하인들이 손님들을 상대하며 진열되어 있는 물건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한립이 들어오자 하인 중 하나가 미소를 띠우며 다가왔다.
“물러 나거라. 선배님은 내가 모시겠다.”
구석에 앉아 차를 즐기던 하얀 장포의 중년인이 한립의 수행을 확인하고는 얼른 다가와 하인을 막아섰다.
“선배님께서 방문해 주시다니 저희 천기각에 영광입니다. 1층에는 원하시는 물건이 없을 것 같은데 저와 3층으로 올라가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그래, 안 그래도 이곳의 책임자를 찾으려던 참이었다.”
한립이 차분히 답하고 중년인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올라갔다. 1층에서 물건을 고르던 수사들은 그 모습을 보고 한립이 원영기 수사라는 것을 알아챘다.
천기각 3층은 면적이 그리 넓지 않았지만 장식이 우아하고 고급스러웠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 수사들이 중년인이 올라오자 바로 차를 내왔다.
“선배님, 이것은 저희가 거금을 주고 사들인 무우영차(霧雨靈茶)인데 향이 남다릅니다.”
중년인이 한립이 앉자 미소를 머금고 차를 소개했다.
“차는 급할 것 없고. 일단 내가 원하는 재료가 있는지 확인해야겠다. 이미 적잖은 점포를 들렸지만 어느 곳에서도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없더군.”
한립은 차는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차분히 소매를 털어 녹색 옥간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선배님께서 급하신 듯하니 그럼 먼저 목록부터 살펴보겠습니다. 허나 다른 상가에서 원하시는 물건을 구하지 못하셨다고 하니 평범한 재료를 찾는 것은 아니신 것 같습니다.”
중년인은 빙그레 웃고는 옥간을 불러들여 의식을 불어넣었다. 잠시 후 중년인의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한립은 놀라지 않았다. 이미 다른 상점의 주인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그가 찾는 재료들은 세상에 다시없을 귀한 보물들이기도 했지만 몇 가지는 이름을 들어 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선배님게서 구하시는 물건들은 일반 상점에서는 보기 어렵습니다. 저희 천기각도 뇌영정 한 덩이를 지니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도움을 드리기 어렵겠습니다.”
의식을 회수한 중년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본래 큰 희망을 품고 있지 않던 한립은 그 말에 희색을 드러냈다.
“뇌영정이 있다고?”
“예, 선배님께서 운이 좋으십니다. 저희도 얼마 전에 구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저희 소유가 아니라 다른 원영기 선배님의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곳에 두고 다른 물건과의 교환을 원하셨는데 계속 거래가 되지 않아 며칠 후 경매회에 내놓을 예정이었거든요.”
중년인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무엇과 교환을 원하는 것이지? 마침 내게도 이런저런 물건들이 있으니 말해 보거라.”
“선배님께서 거래를 원하시는 재료와 단약이 이곳에 적혀 있습니다. 그 역시 보기 드문 보물들이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천둥 속성 법보를 제련하는데 최상의 재료인 뇌영정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 리 없지요.”
중년 수사가 한립의 물음에 미리 준비해둔 옥간을 건넸다. 한립이 그것을 받아 바로 의식을 불어넣었다. 하얀 장포 중년인은 조심스럽게 한립의 표정을 관찰했으나 안타깝게도 상대는 시종일관 덤덤하기만 했다.
‘대체 정체가 무엇이기에 저렇게 젊은 나이에 원영기 수행을 지닌 데다 이렇게 진귀한 재료를 수집하고 다니는 거지? ’
하얀 장포의 중년인은 한립이 원영기 수사라는 것은 인지했지만 정확한 경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전에 보아온 선배님들보다 강하게 느껴진다는 것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가 더욱 한립을 더욱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이다. 사실 평범한 원영기 수사라면 천기각도 배후 세력이 있는데 이렇게 조심할 이유가 없었다.
“이 수사 분이 원하는 물건을 한두 가지 가지고 있다. 하지만 거래할 것인지 말 것인지는 뇌영정을 본 후에 결정하겠다. 영석의 품질이 너무 떨어지면 쓸모가 없으니 말이야.”
잠시 후 한립이 옥간의 물건을 전부 살피고는 다시 중년인에게 돌려주었다.
“당연히 그래야지요. 이번 거래는 중요한 물건들이 오가니 두 분께서 직접 상의해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래, 나도 부 수사란 분을 만나 뵙고 싶구나. 뇌영정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 더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지 않느냐.”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제가 연락을 드리면 금방 와주실 겁니다.”
중년인이 포권을 하고는 서둘러 3층의 대청을 나섰다. 한립은 그제야 탁자에 오른 차를 맛보았는데 관연 향과 맛이 그윽했다.
잠시 후 중년인이 돌아왔다. 차로 목을 축이던 한립이 중년인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 천기각에서 천기옥을 생산하다지? 고계 천기옥은 동굴 거처를 손바닥만 한 크기로 줄여 휴대할 수 있고 강력한 금제까지 걸어둘 수 있다던데 사실 이더냐.”
“하하, 천기옥이냐 본 각의 특산품이지요. 하지만 선배님께서 말하신 것 보다 더 높은 등급의 천기옥인 천기부도 있습니다. 물론 워낙 귀한 재료가 들어가고 몇 개 생산 되지 않아 견본품 몇 개를 제외하면 모두 동이 났지만요.”
“견본품이라. 어째서 팔지 않는 것이지?”
“솔직히 말씀 드리면 남겨 놓은 천기부들은 정말 귀한 것이라 펼칠 수 있는 금제의 위력이 다른 것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상부에서도 몇 개를 일부러 남겨 놓아 정말 귀한 재료가 있을 때만 거래하는 것이지요.”
“영석으로는 살 수 없고 귀한 재료로만 거래를 한다라……. 흥미롭구나. 나도 거래할 의향이 있으니 몇 개 가지고 나와 보시게.”
한립이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본 각이 진경 본점이기는 합니다만 겨우 1개만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귀한 보물을 죄다 한 곳에 둘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희가 지닌 것은 연기대종사(煉器大宗師)인 화운자 선생께서 친히 만드신 거라 천기부 전체를 통틀어도 손에 꼽히는 보물입니다.
첨가된 금제 또한 고보에 비할 만하고요. 게다가 저는 겨우 관사에 불과해서 그런 보물을 거래할 권한이 없습니다. 정말 거래하실 마음이 있으시면 제가 바로 밀실에 계시는 왕 장로님을 모셔오겠습니다. 어떤 물건과 거래가 가능한지는 그분만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립이 무어라 말하려다가 돌연 안색이 변해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