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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528화 (285/2,000)

# 528

528화. 검의 울음

한립은 고삐를 잡아 아예 마차를 길가에 세우고 군사들이 먼저 지나가게 해주었다. 기마병들은 거의 3, 4백 명 정도로 그들이 지나가자 돌풍이 부는 것 같았다.

기마병들이 내뿜는 흉흉한 기세로 보건데 전투에 능하고 피를 맛본 자들이었다.

듣기로 대진은 방대한 영토를 지녔지만 동남쪽과 서북쪽의 최전선에서는 그 지역 현지인들과의 전쟁이 자주 발생한다고 들었다. 그런 혼란한 국경지대가 아니고서는 이런 병사들을 키워내기 어려울 것이다.

그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옆으로 옥색 마차가 지나가며 누군가 창문 틈으로 그를 보았다.

“음?”

마차 안에서 들려온 소리에 한립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지만 그가 누구인지 떠올리기도 전에 마차는 빠르게 지나가버렸다.

멀어지는 무리를 보며 한립이 고개를 저었다. 마차에는 간단한 방음 결계가 쳐져 있었는데 강제로 의식을 훑으면 안에 있는 수사가 알아챌 것이기 때문이다.

담담히 사라지는 기마병들을 지켜보던 그가 다시 마차를 출발했다.

십여 리를 더 가자 전방에 관도와 이어진 세 갈래 길이 보였고 그 옆으로는 울창하게 자라난 수풀과 몇몇 다관(茶館)들이 눈에 띄었다.

적잖은 마차들이 점포 앞에 멈추어 있었다. 이곳에서 진경까지 한달음에 가기는 어려워 점포로 들어가 휴식을 취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살펴보니 은색 갑옷을 입은 병사들도 수풀 속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몇 대의 옥색 마차들도 서 있었었지만 그 중 하나는 텅 빈 것이 타고 있던 자가 내린 듯 했다.

한립은 의식으로 몇몇 다관을 훑으며 조용히 마차를 달려 지나치려 했다. 그런데 그때 기마병 중 하나가 한립의 마차를 발견하고 다가와 길을 막았다.

한립은 어리둥절해졌다.

“한 공자님 아니신지요.”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요?”

“정말 한 공자님이 맞으셨군요. 소인이 잘못 본 것은 아닌가 하였습니다. 저희 아가씨께서 다관에서 말씀을 나누시기를 청하십니다.”

“귀 댁 아가씨라……. 알겠습니다.”

한립은 마차 창가로 보였던 맑은 눈동자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로 모시겠습니다. 아가씨께서 이미 저쪽의 다관 하나를 빌려두셨습니다.”

갑옷을 입은 병사가 낮은 목소리로 설명하며 숲 쪽으로 팔을 뻗었고 동시에 다른 병사 둘이 걸어와 한립의 마차를 묶어주었다.

병사를 따라 작은 다관으로 걸어가자 그 안에는 여인 둘과 사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는 당연히 사십 대의 비단 장포 중년인으로 기다란 수염과 작은 눈을 지녔지만 위엄이 느껴졌다. 나머지 두 여인은 절음 수도자로 연기기 7성과 5성의 수준이었다.

“한 수사, 몇 년 만에 이런 곳에서 다시 뵙게 되었군요. 당시 지도해 주셨던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사내는 꼼짝 않았지만 여인들은 한립을 보자마자 몸을 일으켜 맞이했다. 그 중 수행은 낮은 여인은 수려한 얼굴에 희색이 만연했다.

“조 소저였군요. 이런 곳에서 다 마주칩니다. 당시 인사도 없이 떠나 언짢으시지는 않으셨는지요.”

한립이 멈칫하다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뜻밖에도 대진에 처음 와서 만난 조 현위 댁 둘째 아가씨, 조몽용이었던 것이다.

“급한 일이 있으셨을 텐데 제가 어찌 탓을 하겠어요. 참, 소개를 먼저 하겠습니다. 이쪽은 왕 사저인데 저를 잘 보살펴 주어 친자매와도 같은 사이입니다. 그리고 이 분은 왕 사저의 백부님으로 대진의 남방에 주둔하시는 주남 대장군으로 명성이 자자하신 분이지요. 이번에 명을 받아 폐하를 알현하러 돌아가는 길이십니다.”

조몽용은 중년 사내와 아름다운 묘령의 여자를 소개했다.

“주남 대장군이시라면 대진의 여덟 대장군 중 한 분이 아니십니까. 제가 실례를 범했습니다.”

미모의 여인을 소개할 때만 해도 그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던 한립이 사내의 신분을 듣고는 표정이 확연히 달라졌다. 대진 조정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해도 유명한 일부 고관에 대해서는 파악하고 있었다.

여덟 대장군은 대진 조정의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각각이 백만 명의 용맹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변경의 중요한 성에 주둔하는 이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립이 관심을 두는 것은 범인 세계의 평판이 아니었다.

듣기로는 여덟 장군 중 황족들의 측근 두셋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수도계의 큰 세력과 관련되어 있었고, 일부는 그 세력들의 지지를 받아 장군이 되기도 했다. 그러니 주남 장군도 어떤 세력과 연관된 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몽용의 말을 들으니 선생께서도 수도자가 아니십니까. 저는 일개 범인이니 그리 예를 취하실 것 없습니다.”

중년인이 한립을 향해 포권을 하며 온화하게 말했다. 한립은 상대가 예의상 하는 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 정도 신분이면 원영기 수사는 몰라도 결단기 수사들도 함부로 건들이기 어려웠다. 그리고 자신은 조몽용 앞에서 연기기 경지만을 보여 왔기에 이런 보잘 것 없는 수사에게도 예의를 차리는 상대의 모습이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자가 도성으로 들어가며 주변에 고계 수사도 대동하지 않다니?  담도 크구나.’

“아닙니다. 장군의 위명은 저희 같은 산수들도 익히 들어왔습니다.”

“한 수사, 듣기로는 조 사매를 지도해주어 겨우 몇 년 만에 크게 성장하게 도와주셨다고요. 저희 스승님께서 듣고는 기연이라고 말씀하셨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한 수사께서 진짜 수행을 속이고 있을 것이라 하셨는데, 오늘 영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니 그 말이 사실인 듯합니다.”

왕 사저가 입 꼬리를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정말 그러네요?  한 수사의 경지는 그러면…….”

조몽용이 반가운 마음에 정신을 못 차리다가 그 말을 듣고는 놀라 한립을 살폈다.

“예상치 못하게 중상을 입어 당시에는 수행이 크게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제 약간 회복을 하였고요. 일부러 속이려던 것은 아니니 개의치 말아주시지요.”

한립은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답했지만 실제 경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왕 소저’가 예쁜 눈을 깜빡이며 한립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무엇을 감지했는지 속으로 화들짝 놀랐다.

“정말 선배님이셨군요. 사매가 몰라보고 동급 수사로 대한 점 이해해 주세요.”

왕 여인이 빙그레 웃으며 조몽용을 대신해 말했다.

“어차피 저는 대진의 산수에 불과하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조 수사가 저를 구해준 은혜가 있으니 앞으로도 편하게 대하셔도 됩니다.”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개의치 않았다. 그제야 난감한 얼굴을 하던 조몽용도 원래대로 돌아와 뺨을 붉혔다.

“한 선생께서 사실은 법력이 고강한 수사셨군요. 저는 범인이지만 수도를 하시는 분들과도 교류를 하고 있지요. 어차피 도성으로 가시는 길이니 함께 하심이 어떠십니까?”

‘같이 가자고? ’

“그럼, 그러시지요. 제가 폐를 끼치겠습니다.”

한립이 잠시 생각하다 호쾌하게 응답했다. 안 그래도 진경에 익숙한 이들을 찾아 경매회 전에 상황을 파악하려 했었다.

수도자가 아니더라도 중년인의 신분이라면 아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이후 한립과 두 여인은 잠시 한담을 나누었다. 조몽용의 부친은 몇 년 사이 순조롭게 승진해 도성 내에서 무관을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품계가 많이 올라간 것은 아니지만 지방에서 도성으로 올라왔다는 것만으로도 훨씬 높은 신분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부친이 도성으로 향할 때 조몽용은 수련의 중요한 시점이라 폐관 수련 중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왕 사저가 그녀의 백부와 같이 동행하게 된 것이다.

조몽용이 지난 몇 년간의 행적에 대해 묻자 한립은 몸을 회복하기 위해 은거하며 지내다 이제 막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라고 말했다.

조몽용 등은 그의 말을 의심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가 얼음에 봉인되어 있던 것을 모두 보았으니 누가 생각해도 원기를 크게 상했을 것이다.

그때 다관 점원이 차를 내왔고 그들은 차를 음미하고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중년인이 그의 저택에 소장 중인 고서의 잔본에 대해 입을 연 것이다. 주남 장군이 보여주는 온화하고 교양 있는 태도와 남다른 분위기에 한립은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문학에 조예가 깊지는 않았지만 상고단약과 공법 등에 대해 찾아보느라 무수히 많은 상고경전을 읽었다. 그가 그런 책들에서 읽은 신기한 일이나 흥미로운 내용을 몇 개 풀어 놓으니 주남 장군은 큰 관심을 보였다.

이렇게 한립과 중년인이 말이 잘 통하니 오히려 두 여인이 소외될 정도였다. 왕 사저는 슬쩍 조몽용을 향해 쓴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녀의 백부는 다 좋았지만 고서와 경전을 수집하는 것과 만황 상고 시대의 기이한 일에 대해 관심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마침 한립이 이에 관해 아는 바가 많아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조몽용은 크게 개의치 않고 조용히 곁에 앉아 둘의 대화를 들었는데 가끔 한립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금방 시선을 돌리곤 했다.

왕 사저가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이미 그녀의 마음속에 누군가 있다고 여겼는데 그게 눈앞의 사내인 것이다. 평소에도 한 선배의 이야기만 나오면 볼이 붉어지곤 하지 않았던가.

사실 왕 사저는 한 수사가 얼마나 출중하고 잘 생겼으면 다른 사형제들에게 데면데면할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한립을 만나고 보니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생긴 것도 평범하고 수행도 십중팔구 축기기일텐데 그럼 연기기 수사와 크게 차이나지 않았으니 의아했던 것이다. 왕 사저는 한립이 조 사매에게 그다지 좋은 부군감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랬군요. 그 시절 경천동지할 변화가 생긴 것이 놀랍게도 공간균열이 불안정해져 이계의 요마가 인계로 침입한 탓이었군요. 이런 설명은 처음 들어봅니다. 거처에 결단기 선사님을 두 분 모시고 있지만 이런 이야기는 해주신 적이 없으니까요.

한 수사는 정말 모르시는 게 없는 분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상고 시대의 전설에 따르면 곤오(昆吾)라고 불리던 선산이 있다고 들었는데 하늘 위에 정말 신선께서 거주하시는 곳이 있다고…….”

남주 장군은 흥이 올라서는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한립의 체내에서 용울음 같은 맑은 소리가 울렸다. 그리 크지 않은 울음 소리였지만 그곳에 앉은 이들은 모두 똑똑히 들었다.

“……!”

한립이 대번에 안색이 달라져 푸른빛을 번뜩이며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두 여인이 화들짝 놀라 사방을 살피니 한립이 괴이한 움직임으로 벌써 입구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체내에 법보가 낸 소리인 듯한데, 설마 결단기 수사십니까?”

왕 여인은 놀라 중얼거렸고 조몽용은 두 손으로 손수건을 쥐고는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방금 아는 자가 이 위를 지나쳐 갔습니다. 너무 빨라 따라 잡을 수는 없을 것 같지만요. 아까 그 소리는 확실히 제 본명 비검이 말썽을 부린 것 같습니다. 왕 장군과 두 수사 앞에서 우스운 꼴을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여러분과 동행할 수는 없을 것 같군요. 저는 급한 일이 생겨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한립이 다시 차분한 얼굴로 중년인과 두 여인에게 미안한 기색을 비추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모습을 지켜본 다관의 주인들과 병사들이 놀라 웅성댔다.

“선사다! 선사님께서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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