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7
527화. 암류(暗流)
“손 수사, 잘못 짚으셨습니다. 저는 단지 요수를 쫓아 이곳까지 오게 된 것뿐입니다. 방금 저계 요수들이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았지만 누구의 소행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복면 수사가 헛웃음을 지으며 노파를 경계했다.
“요수를 쫓아 이곳까지 왔다고요? 원영 중기 수행을 지닌 수사가 겨우 요수를 따라잡지 못해 이곳까지 왔다는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게다가 이미 방원 수백 리를 살펴봤지만 수사를 제외하고는 이런 일을 할 만한 인물이 보이지 않는군요.”
노파의 얼굴에 얇게 보랏빛이 어렸다.
“무슨 일이라도 난겁니까? 설마 방금 요수들의 소란으로 악양궁이 무슨 피해라도 입은 거냔 말입니다. 그렇다고 제게 죄를 뒤집어씌우실 생각은 마십시오! 제가 오늘 천악산맥으로 향한 것을 본 제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비록 수사가 원영 후기 수행을 지니고 있지만 제가 죽을 각오로 임한다면 만만한 상대는 아닐 것입니다.”
복면 수사의 눈에서 금빛이 번뜩였지만 두려운 기색은 여전했다. 복면인의 말에 노파도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당신이 벌인 일이 아니란 말이지요?”
“못 믿으시겠다면 심마(心魔)를 걸고 맹세라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방금 이곳에 도착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릅니다.”
“맹세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 수사가 말한 대로겠지요. 수사도 지위가 있는데 이런 몰염치한 짓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 같군요. 게다가 마 수사가 요수들을 소환하는 능력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요수 한 마리를 위해 천악산맥까지 쫓아오셨다니, 평범한 요수는 아니었나봅니다. 무엇인지 물어도 될까요?”
“아, 그 요수라면 정말 희귀한 것으로 막 칠급으로 진화한 토갑룡입니다. 근처의 황려산에서 발견했는데 지능이 높고 토둔술에 능해 꼬박 엿새를 쫓아 이곳까지 온 겁니다. 그래서 미리 양해를 구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으면 상대의 의심을 풀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복면인은 시원하게 자신이 쫓던 요수에 대해 말했다.
“칠급 토갑룡이라면 정말 보기 드문 요수입니다. 마 수사가 공들일 만 하군요. 이곳을 떠나려는 것을 보니 포획에 성공한 모양인데 제게 칠급 토갑룡을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방금 요수들이 난동부릴 때 제 비술이 갑자기 말을 듣지 않더군요. 그래서 요수의 종적을 놓쳤습니다만…….”
“그렇지만 어떻다는 겁니까?”
“요수를 찾아 돌아다니는데 갑자기 엄청나게 빠른 푸른 빛줄기가 날아가더군요. 귀 궁의 수사가 아닌 듯해 저도 추격하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너무 빨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때 때마침 손 수사께서 저를 막으신 거고요.”
“푸른 빛줄기요? 그 자가 떠난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어느 방향으로 가던가요?”
복면 수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하자 노파의 안색이 달라졌다.
“산맥 바깥으로 날아갔습니다. 수사의 능력이라면 그 자를 따라 잡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바로 가봐야 하니 수사도 이제 그만 이곳을 떠나시지요. 정마가 유별하니 늙은이가 돌아왔을 때는 수사가 안 계셨으면 좋겠군요.”
노파는 단서를 잡고는 즉시 그를 쫓아냈다. 그리고 복면인이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금빛 빛줄기로 변해 산맥 바깥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듣던 대로 노파의 성격이 꼬장꼬장하군. 원하는 얘기를 듣자마자 얼굴을 바꾸고 말이야. 정마가 유별하니 뭐니 하지만 그냥 토갑룡이 탐이 나 차지하려는 수작이 아닌가! 토룡갑의 실종도 푸른빛줄기 속의 인물과 연관이 있을 듯한데……. 원영 후기 수사와 맞먹는 속도로 날아가던 그 자를 잡으려면 고생 좀 할 거다. 쳇, 격분한 것을 보니 악양궁이 크게 당한 것 같던데 아주 고소하군!”
복면인이 눈을 빛내며 노파가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며 냉소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허리춤의 영수대를 보더니 미세하게 희색을 드러냈다.
“토갑룡은 놓쳤지만 흑혈(黑血)거미를 잡다니 여기까지 온 보람은 있어. 그런데 그 자는 무슨 방법으로 요수들이 미쳐 날뛰게 만든 것일까? 요수들을 유인할 방법이 있다는 것은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군. 어서 돌아가 목 사형과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그는 사방을 살피더니 녹색 빛을 전신에서 뿜으며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 * *
손 노파는 반나절을 날아다니며 주변 수만리를 의식으로 훑었지만 의심스러운 인물을 찾아 내지 못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악양궁으로 돌아와 관련된 제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이 소식이 바깥으로 퍼지면 악양궁은 대진 수도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호양조의 깃털만 뽑아가고 요수를 죽여 요단을 취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영약과 영초로 몸보신을 시켜주다 보면 수십 년 내로는 원기를 회복할 것이다.
말 못할 치욕을 당한 노파는 은밀히 정예 제자들을 파견해 각지의 세력 혹은 원영기 이상의 노괴들이 보물을 제련하고 있지는 않은지 조사하게 했다. 덩굴을 따라가다 보면 열매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녀가 그 자를 찾으려는 것은 호양조를 상하게 한 것이 분해서이기도 하지만 요수들을 불러 모으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것만 있으면 앞으로 요수를 죽여 요단을 취하는 일이든, 요수를 포획해 영수로 길들이는 일이든 훨씬 간단해질 터였다.
이런 생각을 하는 이는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마목종(魔木宗)에서도 은밀히 제자들을 풀어 최근 롱주에 나타난 고계 수사가 없는지 알아보고 있었다.
롱주의 양대 세력이 동시에 움직이자 정보에 밝은 세가나 종문들은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오랜 세월 평형을 이루던 두 세력이 충돌해 전쟁을 시작하려는 것인가 의심했던 것이다.
당황한 작은 문파의 세력들은 연맹을 맺거나 몸을 사리는 등 그들의 움직임에 반응했다. 그러자 롱주 전체의 분위기가 긴박하게 돌아갔다.
한립은 자신으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진 줄도 모르고 이름 모를 산중턱의 석실에서 수중의 전리품을 살펴보고 있었다.
화려한 색채의 기다란 깃털 다섯 개를 들고 그는 대연 신군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중에 추격하던 노부인이 악양궁의 원영 후기 수사인가 보구나. 수행은 깊지만 의식은 평범했지. 기운을 숨긴 널 찾아내지 못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꽤나 성가셨을 것이다.”
“뭐 들켰다면 혈영둔을 사용했겠지요. 또 상계 성수의 분신이 나타나 저를 찾아내기야 하겠습니까. 그래도 상대가 무슨 둔술을 썼는지 속도가 너무 빠르니 일단 잠시 숨어 있어야겠습니다.”
“그래도 잠시 위험을 무릅쓴 것 치고 얻은 것이 꽤 많구나. 이렇게 많은 깃털에 희귀한 토갑룡까지! 영수로 삼을 수만 있다면 천지 영물을 찾아내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야.”
“그렇기는 하지만 이미 다 성장한 요수를 굴복시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성공할지 말지는 운에 맡겨야겠지요.”
“상관없다. 사실 다 성장한 요수를 길들이는 일이 그리 어려운 것만은 아니거든. 특히 지능이 높은 요수일수록 말이야.”
대연 신군은 이쪽 방면으로도 경험이 있는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오, 그렇습니까?”
“지켜보면 알게 될 게다. 토갑룡의 지능이 상당히 높은 것 같았으니 아마 길들이기 어렵지 않을 게야.”
“그러길 바라겠습니다. 그래도 일단 요수의 성질을 죽여 놓고 나중에 시간이 나면 시도해보도록 하지요. 지금은 깃털을 처리해야 하고 대경의 경매회를 살펴봐야하니까요.”
“노부도 이전에 대경에 간 적이 있었지. 비록 범인들의 시장이지만 확실히 남다르더구나.”
“그 말씀을 들으니 더욱 궁금해집니다. 이곳에서 대경은 상당히 머니 제게 하루만 주시지요. 재료를 처리하고 바로 출발하면 3개월 이면 충분할 겁니다.”
한립은 차분히 설명하고 손에서 푸른빛을 일으켜 기다란 깃털 하나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시 저물대에 넣었다.
그는 깃털을 허공에 띄운 후 푸른 영화를 불어냈다. 푸른 불꽃에 둘러싸인 깃털이 본연의 붉은 불꽃을 뿜어내자 그 오묘한 아름다움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한립은 그저 앉아서 눈을 감은 채 집중했다.
* * *
하룻밤을 꼬박 새운 한립은 석실에서 나와 대진의 중심부로 향했다. 그곳은 범인들의 세계에서 가장 큰 성이 있는 대경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순조롭게 롱주를 벗어난 그는 어풍차를 꺼내 전속력으로 날아갔다.
한 달 후, 대경 인근의 금강군(金江郡)에 이르러서야 그가 어풍차를 거두고 기운을 결단기 수준으로 맞추었다.
대진의 중심에 고계 수사들이 허다할 테니 괜한 주의를 끌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열흘 후, 진경 백 리 밖에 누런 말이 끄는 낡은 마차가 관도(官道)를 지나고 있었다.
마차에 앉은 이는 푸른 청삼을 걸친 한립이었다.
그는 두 눈을 반쯤 감고 마치 졸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 며칠 전에 복용한 설백환(雪魄丸)의 기운을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그는 공간 균열을 나와 이런 차가운 기운이 깃든 단약을 열댓 개는 먹고 있었다.
상고영단답게 이미 제련을 해둔 건람빙염과 육익상공의 한기가 더욱 정순해 지는 것이 느껴졌다. 또한 자라극화의 불순한 물질들도 점점 융합되어 사라지니 한기의 위력이 적잖이 강해졌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은 단약 자체를 흡수하는 게 쉽지 않아서 서너 달에 한 번씩만 복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매달 한 알씩이라도 복용해 백년 내로 자라극화의 위력을 극대화 시킬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천리에 달하는 빙벽을 만들어 낸다는 경지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만 해도 자라극화는 정마 양도의 최상급 신통(新通)에 뒤지지 않았다.
다만 바삐 길을 재촉하던 한립이 한가롭게 마차를 타고 가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진경은 범인들의 도성이라 대진 수도계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수도계가 대진 관부에 보내는 존중의 의미로 진경 천 리 내에서는 수도자간의 전투와 비행이 엄격히 금지되었다.
그것은 수도자들과 범인들이 서로 의지하며 공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이 규칙은 저계 수사들이나 지키고 원영기 혹은 둔술에 자신이 있는 결단기 수사들은 무시하기 일쑤였다.
진경 순찰을 맡은 이들은 관부에서 고용된 수사들이었기에 수행이 그리 높지 않았다. 발각되지 않으면 그만이었고 도성 안으로 진입할 때만 저공비행을 하며 주의하면 되었다.
한립이 그런 것에 크게 신경 쓰는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 충분한데다 가는 길에 복용한 설백환 때문에 일부러 수백 리 밖에서부터 마차를 타고 가는 것이었다.
그는 오는 도중 말을 타거나 마차를 탄 저계 수도자들을 만났지만 괜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법력을 전부 숨기고 범인행세를 했다. 이에 저계 수도자들도 그를 신경 쓰거나 성가시게 굴지 않았다.
한립이 마차를 천천히 몰고 있었기에 벌써 예닐곱 무리의 상인들이 그를 지나쳐갔다.
그는 약효가 단전에서 시작해 경맥을 타고 온 몸으로 퍼져나가는 청량한 감각을 느끼다 돌연 미간을 좁혔다. 마차 뒤쪽에서 갑자기 말발굽 소리들이 울려댔기 때문이었다.
한립은 무표정하게 두 눈을 떴다. 그가 고삐를 당기자 늙은 말이 고분고분히 길 한 쪽으로 비켜섰다.
한립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누런 용이 몰아치는 것처럼 천군만마가 먼지를 휘날리며 달려오는 중이었다.
그들은 곧 한립과 가까워졌고 은색 투구와 갑옷을 입은 기마병들이 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은 하나같이 건장했고 맨 앞에서 달려오는 새까만 준마를 탄 중년인은 허리에 장검을 차고 등 뒤로는 커다란 깃발을 휘날렸다. 깃발에는 왕(王)이란 글자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고, 기마병들 사이에 옥색 마차가 그들과 같이 달리고 있었다.
마차에서 은은하게 영기의 빛이 반짝였고 미친 듯이 달리는데도 마차 자체는 흔들림이 없었다.
‘법기? ’
한립이 그것을 보고 이채를 띠었다.
의식으로 훑어보니 대부분 무언가를 쌓아 두고 있었고 유일하게 한 마차에서만 은은하게 수도자의 기운이 느껴졌다. 아주 미약한 기운이었지만 수도자가 군사들과 한 데 섞여 있는 것이 의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