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4
524화. 오풍령(烏風翎)
“엽 가에 언제 새로운 장로가 들어왔지? 산수이더냐 아니면 다른 종파 출신이더냐?”
“안심하셔요. 대진의 수사가 아니라 모란 초원에서 넘어온 산수입니다. 실력이 상당한데 조사를 해보니 내력은 문제가 없었습니다. 천란 초원에 그런 수사가 있었고 천란성전의 눈 밖에 나서 대진으로 넘어오게 된 것이라 합니다. 게다가 가문의 중요한 정보는 새로운 장로께 일절 누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물론 나는 찬성하지 않았지만 다른 장로들이 계획에 찬성했고 이미 실행이 되고 있으니 통천령보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한다. 앞으로의 일은 상황을 보아가며 진행하자꾸나.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더욱 신중해야한다. 각지의 세력이 지켜보고 있으니 절대 주의를 끌어서는 안 돼.”
“고모님, 사실 이미 몇몇은 의심을 하고 있는 듯합니다. 며칠 전부터 가까운 성 내에 주둔하는 수사들의 수가 갑자기 늘어났습니다.”
“원영기 수사도 늘었느냐?”
“아닙니다. 수행은 높아봐야 결단기 급이고 원영기 이상의 수사들은 이전처럼 성을 지키며 머물 뿐이었습니다.”
“그럼 되었다. 세 도관에서 보물을 제련한다는 소식이 퍼진 것이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너희에게 더 큰 압박이 있었을 게야.”
여 도사의 굳은 안색이 조금 풀어졌다.
“도관들이 제련하는 보물은 미끼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통천령보를 모방한 것들이니 크게 유용할 것입니다. 가능만 하다면 그런 보물은 많을수록 좋지요.”
“그래, 평산인(平山印)과 같은 천지를 개벽할 보물은 모방품이라 해도 남다르겠지. 제련에 성공만 한다면 원영 후기 수사가 한 명 느는 것만큼 쓸모가 있을 게야. 나도 최선을 다해볼 생각이다. 그런데 너의 둘째 숙부가 산수 중의 실력자를 포섭한다는 것은 어찌 진행되고 있느냐?”
“이미 오래 전부터 사대 사수 중의 두 분이 황족을 위해 일해주시기로 약조하였습니다. 다른 두 분은 행적이 묘연해 어찌할 도리가 없었지만요. 그래도 서병산의 귀왕과 만요곡의 부곡주도 흔쾌히 힘을 보태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늙은 여 도사와 여인은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녹수 군주는 은색에 핏기가 감도는 금속 한 덩이를 들고 기뻐하고 있었다.
“한 사형이 정말 혈사은을 정련해 줄줄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위 사백님이라는 분이 대단하기는 한가 봅니다. 제자조차 이리 실력이 뛰어나다니요. 시장의 유명한 연기사들을 몇 분 찾아가 보았지만 다들 못한다고 하던 걸요!”
궁장 소녀가 재료를 들고 배시시 웃으며 한립을 보았다.
“위 사백님이 전수해 주신 정련 기술은 시장 통의 평범한 연기사들과 비교할 수 없지요. 그리고 저는 위 사백님의 제자가 아니라 그저 잠시 연기전 일을 돕는 일반 제자일 뿐입니다.”
“그래요? 너무 아깝네요. 혈사은을 정련할 정도면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럼 다른 일이 없으시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한립이 법기를 정리하며 말했다.
“잠시 만요! 설마 제가 너무 못생겨서 서둘러 떠나시려는 건 아니죠? 게다가 제가 언제 이것만 제련한다고 했나요. 아직도 부탁드릴 재료가 있다고요. 사실 사형의 정련 기술이 어떤지 몰라 말을 아끼고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믿어 보기로 하였습니다.”
소녀가 혈사은을 회수하고는 저물대에서 한 자 길이의 기다란 옥함을 꺼내 한립에게 주었다. 역시 골치 아픈 상대였다.
“이것도 제련하시려고요? 저를 너무 높게 보신 듯합니다. 제 수행으로는 혈사은을 정련하는 것만으로도 기진맥진인데 바로 다른 재료를 작업할 수는 없습니다.”
한립이 옥함을 열어보지도 않고 난색을 표했다.
“하긴 사형의 수행이 깊지 않기는 하죠. 그래도 이건 제련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운을 너무 잃지 않게 처리만 해주시면 돼요. 미리 말해두는데 이걸 보면 꼭 비밀을 지켜주셔야 돼요. 이런 물건은 쉽게 구경하기 쉽지 않거든요.”
궁장 소녀가 조금 득의양양해서는 말했다.
‘뭐 길래 저러는 거지? ’
한립도 그제야 관심이 생겨 호기심에 옥함을 열어보았다. 그러자 완전히 옥함을 열기도 전에 눈을 찌르는 듯한 빛이 폭발적으로 방출되어 그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크게 놀란 한립이 자기도 모르게 눈동자에서 남색빛을 일렁였다.
“헛!”
“이건…….”
소녀와 한립이 동시에 놀라 소리를 냈다. 옥함에는 놀랍게도 반 척 길이의 투명한 깃털이 붉은 빛을 반짝이며 담겨 있었던 것이다.
“호양조의 깃털? 아니야, 그것과는 조금 다른데…….”
흠칫 놀란 한립이 옥함 속의 물건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중얼거렸다.
“무슨 호양조요? 이건 오봉(烏鳳)의 꼬리 깃털이라고요. 몇 년 전 조부님을 따라 바다 건너 선배님을 뵈러갔을 때 영조가 자는 틈에 몰래 뽑아왔죠. 멍청한 새가 깊이 자느라 아무 것도 모르더라니까요. 맞다, 그런데 방금 사형의 눈이 이상하던데 어떻게 남색으로 변한 거예요? 신기한데, 법술의 일종이에요?”
소녀가 재잘재잘 떠들어 대다가 한립의 두 눈을 응시하며 물었다.
물론 한립이 순식간에 명청령안을 거둬들였기에 눈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그녀가 재잘거리는 소리에 신경도 쓰지 않고 대연 신군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봉의 꼬리 깃털? 오봉도 호양조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불 속성 영수가 아닙니까. 그럼 이 깃털로 호양조의 깃털을 대신 할 수 있을까요?”
“오봉은 불 속성 봉황의 한 종류로 알고 있는데 상고 시대부터 아직까지 명맥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구나! 안타깝게도 둘은 서로 대체가 불가능한 재료다. 물론 제련법을 약간 고쳐서 이것마저 넣을 수 있다면 네 삼연선의 위력이 더욱 커지겠지. 허나 눈앞의 깃털은 이미 기운을 거의 잃어 재료로 사용하기 부적절하다. ……이상한 일이로구나. 당시 대진을 유람할 때는 누군가 이런 것을 기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거늘.”
“그렇군요.”
삼염선에 대신 쓸 수 없다는 말에 한립은 크게 실망했다.
궁장 소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계속 한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남색으로 반짝이던 눈이 굉장히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소녀의 표정에 한립은 절로 쓴웃음이 났다.
“방금 눈에서 이상한 빛이 났던 것은 어떤 영수로 눈을 씻어 내서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면 눈이 약간 맑아지지만 저계 수사에게나 도움이 될 잔기술이지요.”
“영수라면 어떤 영수인데요? 아직도 있으세요? 저도 조금 나눠주실 수는 없으세요?”
소녀가 흥분해 연달아 질문을 쏟아냈다.
“그런 영수는 그 자리에서 배합해서 사용해야 효과가 있기에 눈을 씻어 내는데 써버린 지 오래입니다.”
“한 사형, 정말이죠? 제가 어리고 세상 물정 모른다고 거짓말로 달래시는 것 아니죠?”
“모두 사실입니다. 하지만 군주가 관심을 가질만한 다른 물건을 지니고 있습니다.”
“거래를 하자는 거예요? 설마 제 오봉의 깃털을 눈독들이시는 건 아니겠죠!”
“아닙니다. 그런 귀한 재료를 저 같은 연기기 수사가 욕심낼 리가요. 다만 군주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거야 간단하죠! 거래도 필요 없고 오봉의 깃털만 잘 처리해 주신다면 무엇이든 답해드릴게요.”
“예, 그렇게 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소녀가 웃으며 손을 휘젓자 잠시 생각하던 한립도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 시진 후 궁장 소녀가 지화대전에서 걸어 나왔을 때 밖에는 이미 남녀 수사들이 모여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녀가 걸어 나오는 것을 보고 수사들이 그녀를 둘러쌌다.
“군주, 일은 어찌 되셨습니까?”
“그 녀석이 혈사은(血絲銀)을 망치지는 않던가요?”
“다들 이리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 사형이 저를 위해 정련을 잘 해주셨어요.”
소녀는 이마 앞의 푸른 천을 들어 올리며 고상하게 미소 지었다. 한립과 함께 있을 때의 천방지축 소녀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녀 뒤에서 지화대전에서 걸어 나온 던 한립은 그 모습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입술 끝을 씰룩였다.
“녀석, 간사하기도 하지! 어린 여자아이를 구슬려 오봉이 있는 곳을 알아내다니. 그 섬의 주인이 기르는 오봉의 깃털이라도 구해올 참이더냐.”
“삼염선의 위력을 강화할 수 있다면 최선을 다 해봐야겠지요. 이렇게 귀한 재료로 힘들여 모아 만들었는데 위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헛고생을 하는 것 아닙니까.
평범한 고보라면 원영 중기 이상의 수사에게는 큰 위해를 가하지 못할 테니까요. 서둘러 돌아가야겠습니다. 저들이 황청관에 머무는 동안엔 밀실에만 머물러야지 괜히 쓸데없는 소란에 휘말릴 것입니다.”
한립이 조용히 자신의 거처로 걸어갔다.
* * *
그 후, 궁장 소녀는 다른 재료도 정련하고자 몰래 한립을 찾았지만 폐관 수련중이라는 팻말과 석문을 봉인한 금제가 쳐져 있었다. 여인은 입을 비죽이며 근처를 서성이다가 씩씩 대며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틀이 지나 젊은 남녀 수사들이 옥 부인이라는 수사와 황청관을 떠날 때가 되자 드디어 연기전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한립은 가끔 재료를 정련하며 매달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고 나머지는 명왕결 수련에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한 달, 또 한 달의 시간이 흐르자 한립은 점점 노인의 중시를 받아 틈이 날 때마다 그에게 재료를 정련하는 특수한 수법들을 교육받았고 몇 가지 관련 일거리를 나누어 하기 시작했다.
한립은 조용히 맡은 일을 수행하며 한 번도 기한을 어기는 법이 없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진귀한 흙 속성의 재료들을 맡아 재련하게 된 그는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런 재료를 필요로 할 만한 보물이라면 정말 대단한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정해진 계획대로 명왕결 2성을 수련해 나갔고 몸은 이미 놀라운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그때 감 씨 가문에서 사람을 보내 그에게 뜻밖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를 입문하게 도와준 엄 유생이 돌연 큰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병이라고? 그 당시에는 이렇다 할 문제가 없어 보였는데?”
한립은 의외의 소식에 최근 황청관 주변에 못 보던 수사들이 늘고 그들이 의식을 퍼트려 은밀하게 정보를 수집해 가던 것을 떠올렸다. 큰 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이곳에서 더 이상 머물러서는 안 되겠구나.’
그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이대로 있다가는 성가신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한립은 명왕결 수련에 더욱 속도를 높였다.
* * *
1년 후 황청관에는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연기기 수사가 돌연 실종된 것이다. 이 일은 놀랍게도 고위층들을 들썩이게 만들었는데 심지어 연기기 여 도사까지 직접 이 일에 관해 물었을 정도였다.
저계 수사 하나가 실종된 일은 사실 수많은 머리카락 중 하나가 뽑혀나간 것과 같았지만 하필 연기전에서 중요한 임무를 도맡아 하던 제자가 그리 됐기 때문이다.
예전에 나이 든 여 도사와 아름다운 여인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누각 에서 여 도사가 노란 장포의 여제자 두 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명은 사십대였고 다른 한 명은 스물 중후반으로 보였다.
“어찌된 일이냐? 황청관은 금제로 둘러싸여 있는데 제자 하나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다니!”
늙은 여 도사가 어두운 얼굴로 냉랭히 물었다.
“사백님께 아룁니다. 금제를 확인해 보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그 제자가 스스로 떠난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중년의 여인이 머뭇거리다가 공손히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