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2
522화. 연기전(煉器殿)
같은 시각 화련 선고는 비단천 형태의 법기를 이용해 한립을 데리고 환운봉을 벗어나 조금 더 작은 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분은 위 사숙이시다. 우리 도관에서 제일가는 연기사 분 중 하나이시지. 앞으로 이 분 밑에서 연기술을 배우면 될 게야. 네게 전문적으로 이 일을 업으로 삼으라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고 최근 만들고 있는 중요한 보물을 제련하는 것을 돕기만 하면 된다. 2, 3년만 고생해 주면 수련에 도움이 되는 영단과 적극적인 지원을 해줄 것이야.”
화련 선고는 온갖 잡다한 재료들이 쌓여 있는 밀실 안에 서서 한립을 향해 말했다. 그 옆에는 오십대의 붉은 축기기 초기의 노인이 한립을 살피며 인상을 찡그렸다.
한립은 여인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답했다.
“화련 수사, 한 사질이 정말 연기술을 안단 말입니까? 나이와 수행이 너무 낮은데요. 백로서원에서 필요한 보조 재료를 구해다 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번에 보물을 제련하는 일에 외부 수사를 끌어들이는 게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한 사질이 경험은 적어도 위 수사가 지도해주면 금방 배울 겁니다.”
“제련이라는 것이 자질이 필요한 일인데 괜히 재료만 날려서야 될는지……. 허나 화련 수사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가르쳐 보겠습니다.”
“제 안목을 믿어 보십시오. 한 사질이 수행은 높지 않아도 지닌 법력이 아주 정순합니다. 아마 법력을 통제해 법기를 제련하는 것에도 뒤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마지못해 대답하는 노인을 향해 화련이 빙그레 웃었다.
“아, 그렇다면 어느 정도 잠재력이 있을 지도 모르겠군요. 하긴 화련 수사께서 아무나 데려오셨을 리 없지요.”
위 노인도 그제야 다시 한립을 훑으며 눈을 빛냈다.
“필요하시다는 일손을 구해 드렸으니 이제 제련을 서둘러 주세요. 다른 두 도관에 비해 우리의 진도가 살짝 늦습니다. 이러다 마지막에 일을 그르치면 그 죄를 우리 둘이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 빈도는 이만 물러납니다.”
“이 녀석만 쓸 만하면 늦을 리 없을 테니 걱정 마세요.”
붉은 얼굴의 노인이 그녀를 배웅하며 약속했다. 이제 밀실에는 한립과 노인만 남게 되엇다.
“방금 오간 이야기를 들었겠지? 네가 법기 제련에 흥미가 있든 없든 난 한달 간 최선을 다해 관련 술법을 전수할 것이다. 그리고 매달 네게 임무를 줄 텐데 임무만 완수하면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보내면 된다. 만일 정해진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면 당장 쫓아내고 다른 제자를 찾을 것이니 알아서 하거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물론 우리 연기전에 배정된 제자에게는 그만한 보상이 있다. 전각 내의 몇몇 법기와 지화(地火)의 연못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고 매달 다른 제자들보다 훨씬 많은 영석을 받지. 그럼 앞으로 함께 일할 다른 연기기 제자들을 소개해 주마.”
노인이 한립의 태도에 만족하며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이어 그를 데리고 밀실 밖으로 향했는데 다른 세 명의 연기기 제자들과 얼굴을 익히게 한 후 그에게 쉴 곳을 마련해 주었다.
이렇게 한립의 황청관 수련 생활이 시작되었다.
연기전이란 사실 황청관이 있는 봉우리 중간에 있는 따로 지어진 별채였다. 지화대전과 몇몇 연기각을 제외하면 별 다를 것이 없는 건물이어서 제자들은 산에 뚫어 놓은 동굴 속에서 지내야 했다.
연기전에 속한 이들은 붉은 얼굴의 연기사 노인과 보조를 맡은 연기기 8, 9성의 중년 수사 2명이 있었고 나머지는 한립을 포함한 4명의 제자들이 전부였다.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워낙 생활하는 사람이 적어 오히려 넉넉할 정도였다. 그러나 매월 연기전의 연기각을 빌려 이용하거나 각종 법기나 물건을 제련해 달라고 찾아오는 황청관의 수사들이 많았다.
그중 십중팔구는 여 제자였는데 전부다 도사는 아니어서 몇몇 묘령의 여인들은 자태와 태도가 대갓집 규수 같아 보였다.
한립이 관찰해 본 결과 나머지 세 명의 연기각 남 제자들은 매일 고되게 일을 하면서도 이곳을 드나드는 여인들에게 홀려 몇 년간 수행에는 전혀 진보가 없었다.
이런 모습에 한립은 고개를 저었지만 굳이 끼어 들 생각은 없었다.
그동안 그는 전문적으로 재료를 다듬고 정제하는 지도를 받고 있었는데 붉은 얼굴의 노인은 하루 한 시진씩 그에게 기초 지식을 알려주고 직접 시범을 보여주며 지도를 해주었다.
한립의 수행과 지식으로 겨우 축기기 연기사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했던 그는 겨우 며칠 만에 크게 놀랐다.
노인의 수행은 높지 않았지만 법기 제련에 한해서만은 고명했다. 재료를 정련하는 것만 해도 다양한 수법에 모두 능해 여러 문파의 비술을 연구한 티가 났다. 그 중 몇 가지 기술과 지식은 한립도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겨우 열흘 만에 적잖은 깨달음을 얻은 그는 크게 기뻐했다. 대진이 수도 성지라는 말이 헛소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눈에 띄지 않는 도관의 연기사의 기술이 이 정도라면 천남과 난성해의 수준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말이 나와 그렇지 한립의 연기술은 이미 평범한 수준이 되고 말았었다. 제운소에게서 얻은 제련 기술은 원영 중기 수사의 입장에서는 얄팍한 지식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래서 난성해에서부터 낙운종에 들어간 후까지 여러 경전을 살펴보았지만 쓸 만한 정보를 많이 얻지는 못했다. 그런데 우연히 이런 기회를 얻게 되다니 운이 좋았다.
그는 나머지 시간에는 명왕결 수련에 집중하면서도 위 노인의 기술을 전수 받는데 최선을 다했다.
그가 자질을 보이고 태도도 좋자 노인은 크게 만족하였고, 심지어 한립이 질문을 던지며 노인의 정곡을 찌르자 더 많은 것들을 전수하고자 했다.
이렇다 보니 노인은 겨우 한 달 만에 한립에게 엄격했던 얼굴이 상냥하고 정겹게 바뀌어 노인의 성정을 아는 다른 연기기 제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질투심 때문인지 한립이 총애를 받을수록 나머지 제자들은 그를 좋게 보지 않았다. 이에 한립은 홀로 다니며 안심하고 수련에 전념할 수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한 달 후, 위 노인은 각종 재료의 제련 수법 외에도 몇몇 독자적인 제련 기술을 그에게 전수해 주었고, 바로 재료를 제련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비록 고난도의 임무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그는 임무를 가볍게 마치고 남는 시간에는 명왕결 수련에만 매진했다.
그는 법력을 회복하면 대진 곳곳을 돌며 법기 제련 기술을 모아 칠염선과 대연 신군의 꼭두각시 제련에 완벽을 기하리라 마음먹었다.
이렇게 서너 달이 지나고 나니 황청관에 오게 된 것이 오히려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 노인은 갑자기 무척 바빠져서 매달 몇 번 제자들에게 임무를 하달할 때 말고는 지화대전의 코빼지도 보이지 않았다.
화련 선고는 그동안 몇 번 찾아와 밀실에서 노인과 여러 가지 일들을 상의했다. 두 사람은 매번 다른 이의 의식을 경계하는 금제를 설치해 놓았지만 한립도 명왕결 수련에 여념 없었기에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내용을 엿듣지 않았다.
* * *
어느 날, 동굴의 밀실에서 가부좌를 하고 앉은 한립이 상반신을 기괴하게 틀며 수결을 맺고 꼼짝하지 않았다. 그의 전신을 얇은 금색 보호막이 덮고는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의 피부를 타고 혈관과 근육이 계란 크기로 불룩 올라왔다 사라지며 살아 있는 생물처럼 이동하고 있었다.
몸을 덜덜 떨며 식은땀을 쉼 없이 흘리고 있는 한립의 얼굴은 무척 고통스러워 보였다.
…….
얼마나 지났을까. 한립의 몸을 뒤덮은 금빛이 차차 사라졌다. 길…게 숨을 토해낸 그가 법결을 거두고 정상적인 가부좌 자세로 돌아왔다.
그러자 그의 피부에서 벌어지던 이상 현상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화염처럼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가시며 한립이 굳게 닫고 있던 눈을 떴다. 명왕결이 너무 패도적이라 원영을 응결한 육체도 수련의 극심한 통증을 견디기 어려웠다.
이에 한립은 울적하면서도 의아했다.
“선배님, 제 수련법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겨우 2성을 익히고 있는데 이렇게 고통스럽다면 불가 제자들은 원영 후기나 되어야 이 법결을 수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단지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의식에도 통증을 남기니까요.”
그가 갑자기 대연 신군에게 물었다.
“이상한 일도 아니다. 불가에서 요족 공법을 개량할 정도면 수련의 고통을 경감시킬 방법이나 기구도 마련해 두었겠지. 불가 공법들은 본래 고통을 참는데 뛰어나기도 하고 말이야.
게다가 육체를 강인하게 단련한 수사라면 결단기라도 수련할 만하다. 인류 수사나 공법 수련이 어렵지 요족이나 고마들은 하나같이 엄청나게 강한 육체를 지녔으니 그다지 고통스럽지도 않겠지.”
“그렇다면 말이 됩니다. 안타깝게도 다른 불가 공법을 수련할 시간이 없으니 저는 이대로 참는 수밖에 없겠군요. 이 정도로만 유지 된다면 그럭저럭 버틸 만은 합니다.”
한립이 미간을 좁히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한쪽 소매를 걷어 남색빛이 일렁이는 눈동자로 자신의 팔뚝을 관찰했다.
일다경이 지나서야 피부를 만져보던 그가 소매를 내렸다.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명왕결이 신체를 단련하는 데에는 다른 공법들과 달리 탁월한 효과가 있긴 해. 겨우 이 정도 수련하고 몸이 이렇게 놀랍게 변하고 있다니.’
잠시 앉아 있던 그가 몸을 일으켜 밀실을 나서더니 지화대전으로 향했다.
며칠 동안 재료를 제련하며 위 노인이 알려준 수법을 활용하다가 새로운 기술을 발견했다. 그래서 수정으로 변한 요단으로 제련하는 비침의 완성을 코앞에 두고 요즘 매일 정오 무렵에 지화의 연못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막 대전에 가까워졌을 때 입구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연기전 제자 세 명이 앞장서고 젊은 연기기 제자 무리가 열예닐곱 살로 되어 보이는 어린 소녀를 주축으로 대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는 그녀는 연두색 궁장 차림에 얼굴이 수려하고 분위기가 남달랐다. 다른 이들의 수행은 연기기 8, 9성 정도로 보였고 궁장 여인의 경우 10성의 수행을 지녀 일행 중 가장 높았다.
한립은 바로 그들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대부분이 허리춤의 저물대가 가득했고 두세 명은 심지어 전용 영수대를 지니고 있었다.
길을 안내하는 연기전 세 수사들이 얼굴에 미소를 띠며 대접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한립은 못 본 척 그대로 지화대전으로 먼저 들어가려했다. 그런데 하필 세 연기기 제자 중 수행이 그나마 높은 고 씨 성의 제자가 그의 뒷모습을 보고는 소리쳤다.
“한 사제, 잠시 이리로 와보게. 녹수 군주께서 법기를 제련하려 하시는데 재료를 특수한 방법으로 정련해야 한다고 하시는구먼. 넷째 관주님께서 친히 명을 내리셨으니 군주를 도와드리는 일에 시간을 지체해서는 안 될 것이야.”
‘군주? ’
한립은 그 말에 약간 놀랐고 넷째 관주의 명이라는 말에는 더욱 놀랐다.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그 동안 황청관의 고계 수사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을 해놓았다.
이 도관은 명의상 네 명의 관주가 있었는데 모두 결단 후기의 수행을 지녔다. 그리고 도관의 천청원이라는 곳에 따로 원영기 수사가 한 명 머물고 있었다.
네 번째 관주는 결단 후기에 가장 늦게 이르렀지만 특수한 공법을 익혀 관주들 중 가장 강했고 남군 전체에서도 위명이 자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