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1
521화. 서진합원결(噬眞合元決)
“완배가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한립도 한 걸음 앞으로 나서 공손히 예를 올렸다.
“이쪽은……?”
“한립이라는 청년인데 지인의 먼 친척입니다. 백로서원에 들어가고 싶다고 해 오랜 벗의 청을 외면하기 어려워 데리고 올라오는 길입니다. 이곳에 머물 자격이 되는지 알아볼 수 있을까요?”
로 선생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한립을 바라보자 엄 유생은 차분하게 사정을 설명했다.
“영근 자질은 평범합니다만 자세히 속성을 확인해 보아야겠습니다. 한 수사 이리로 와보시게.”
로 선생이 한립을 살피다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예, 선배님!”
한립이 바로 앞으로 나서니 상대가 서늘한 손으로 그의 손목을 쥐었다.
의식이 강한 그는 상대에게 들킬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수행은 물론이고 영근 속성 그리고 근골까지 무엇이든 속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크게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았기에 영근 속성은 그대로 노출한 상태였다. 네 개의 영근 속성이면 겨우 입문 기준에 미칠 정도였다. 물론 근골에 관해서는 실제 연령을 감추기 위해 약간의 손을 봐두었다.
“금속 속성을 제외한 네 개의 영근을 모두 지녔구만. 간신히 서원에 입문할 자격은 갖추었으나 나이가 있으니 축기기에 이를 가능성이 너무 적네. 자질로 보아 연기기 7, 8성에서 그칠 가능성이 큰데 그럴 바에야 산수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도 좋지 않겠는가?”
로 선생이 상태를 확인하고 손목을 놓아주었다.
“이미 다른 선배님께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부지런함으로 재능의 부족함을 보완할 수 있을지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한립은 로 선생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진심 어린 어조로 말했다. 로 선생이 그 말에 잠시 엄 유생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의지가 굳다면 말리지 않겠네. 그럼 산수로 생활하며 여러 가지를 익혔을 터인데 가장 자신 있는 분야가 있는가?”
상대의 물음에 한립은 내심 놀랐다. 겨우 연기기 수사에게 이런 질문을 하다니 엄 유생의 체면을 보아 이러는 것인가? 이에 한립은 고민 없이 대답했다.
“법기를 제련하는 것을 약간 배웠습니다. 그러나 수행도 낮고 견식이 짧아 아주 기초적인 물건만 제련할 수 있습니다.”
“법기를 제련할 줄 안다는 말인가? 돈과 시간이 많이 들어 산수들 중에서 연기술을 익히는 경우는 드물다고 알고 있네만.”
“예전에 관련 서적을 얻어 아무렇게나 이것저것 만들어 본 것에 불과합니다.”
한립은 아무 것도 못 한다고 말하면 받아 주지 않을까봐 어쩔 수 없이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연단술을 익히거나 진법에 능한 수사들은 더욱 드물었기에 괜히 다른 이들의 주의를 끌기 전에 택한 것이었다.
“한 수사, 법기를 제련한다고요? 아주 잘 됐습니다. 로 선배님 앞으로 귀 문에 제련에 능한 제자를 청하러 올 일이 줄어들겠습니다. 어차피 아직 백로서원에 입문한 것도 아니니 빈도를 따라 황청관에 들게 하는 것이 어떨지요?”
선고라는 여인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엄 유생과 한립은 화들짝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화련 선고님, 아무래도 그것은 좀……. 황청관은 여 도사들이 생활하는 곳인데 어찌 사내가 들어갈 수 있겠는지요?”
엄 유생이 어색한 얼굴을 숨기지 못하고 정색을 했다.
“황청관의 도사들은 대부분은 여인들이지만 가정이 있는 수사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문하에 남성 제자들도 있고요. 이들은 황청관 수사이면서도 외부에 거주하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그렇군요. 제가 견식이 짧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한립은 백로서원에 들어가고 싶어 이곳까지 찾아온 것인데 갑자기 귀 관에 입문하는 것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엄 선생은 한립을 백로서원에 들여보내 달라는 부탁을 받은 지라 상대가 평범한 신분이 아닐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한 수사의 자질로 서원에 남는다고 해도 전망이 밝지 않습니다. 저희 황청관에서는 몇 가지 보물을 제련하려 하는데 마침 일을 도울 저계 제자가 부족한 상황이지요.
본 관에 들어올 생각이 있다면 한 수사의 제련술도 한층 진일보 할 것입니다. 또한 빈도가 한 수사가 수련에 도움을 받을 수 있게 신경 쓰겠습니다.”
화련 선고는 전혀 개의치 않고 미소를 머금었다.
“아……. 로 형께서는 어찌 보십니까?”
엄 유생이 머뭇거리다 로 선생에게 고개를 돌렸다.
“한 수사의 선택에 맡겨야겠지요. 허나 화련 선고의 말씀대로 황청관의 문하에 들어가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듯합니다.”
로 선생이 표정 변화 없이 대답했다. 그 말에 이제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립에게로 옮겨갔다. 약간의 걱정과 호기심, 기대감이 섞인 눈빛이었다.
‘황청관? ’
아마 옥전산의 또 다른 봉우리에 있는 도관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거의 여인들만 있는 곳이라는 것도 지금 처음 듣는 소리였다. 한립은 아는 바가 적었기에 그저 놀란 눈빛으로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계획을 바꿔 잘 알지도 못하는 문파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그냥 백로서원에 있는 게 훨씬 나았다.
하지만 화련이 좋은 조건을 제시했는데 일개 산수인 그가 굳이 거절을 하고 서원을 고집하는 것도 의심을 살 우려가 있었다. 갑자기 끼어 든 화련 선고 때문에 한립은 심기가 불편해졌다.
“화련 선배님께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황청관에 대해 정말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 도사님들이 생활하는 곳이라면 수련방법이나 공법도 사내인 제가 익히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 걱정을 하고 계셨습니까? 그런 거라면 전혀 걱정할 것 없어요. 우리 황청관은 사실 3개의 도관 중 하나입니다. 다른 화양관이나 황성관은 대분 남자 도사들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러니 수사가 익힐만한 공법은 충분하답니다.
게다가 호연지기가 없는 수사가 백로서원에 입문한다면 어려움이 많을 겁니다. 물론 호연지기를 배양하면 같은 신통을 발휘하더라도 위력이 강력하기에 도가의 공법에 비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화련 선고는 서두르지 않고 설명을 하면서도 유가 문파에 대해 절대 무례를 범하지 않으려 애썼다.
“화련 수사의 말씀이 일리가 있네. 유가의 공법이 불가나 도가에 비해 오랜 시간 수련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니 나이가 있는 자네의 경우 황청관에 들어가는 것이 더욱 좋을 것 같네. 또한 화련 수사께서 수련에 도움을 주신다고 하니 축기에 이를 가능성도 크고 말이야.”
로 선생이 원만히 한립을 설득했다. 한립은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되면 원래 목표를 고집할 수만은 없었다. 속으로 운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한립은 겉으로는 약간 흥분한 기색으로 답을 했다.
“선배님들의 말씀이 틀릴 리가 있겠습니까. 모두 선배님들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한립의 분별 있는 태도에 화련이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 유생은 한립이 유가 문하에 들어가기를 바랐지만 본인이 이렇게 나오니 할 말이 없어졌다.
일이 마무리 되고 로 선생과 화련 그리고 엄 유생은 한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은 수도계의 일이 아니라 뜻밖에도 대진 조정의 이권 다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한립은 의아했다.
유가야 어쨌든 속세로 나아가 입신양명하는 것이 목표였으니 이해가 되었지만 도가의 여 도사까지 이런 화제에 자연스럽다는 것이 이상했다.
한창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가 오가는데 밖에서 누군가가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조님께 아룁니다. 명을 받들어 곳간의 자정동(紫精銅)을 가져왔습니다.”
“가지고 들어 오거라.”
로 선생이 그 말에 바로 대답했다.
자정동이라는 소리에 한립도 귀를 기울였다. 최상급 법기 혹은 법보를 제련할 수 있는 우수한 재료로 그에게는 별 것 아니었지만 눈앞의 두 수사에게는 진귀한 물건이 틀림없었다.
문이 열리고 어려 보이는 사내아이가 붉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쟁반에는 무언가가 울룩불룩 담겨 있었는데 은색 천으로 덮어놓아 보이지는 않았다. 아이가 공손히 쟁반을 탁자에 놓고 물러났다.
“곁에서 시중 들 것 없으니 물러 가거라.”
로 선생은 아이를 보고 분부를 내리고 쟁반에 담긴 물건을 그대로 화련 선고 쪽으로 밀어주었다.
“화련 선고, 빌려가고 싶다던 자정동입니다. 귀한 재료를 찾으시는 것을 보니 중요한 보물을 제련 하시려나 본데 법기인지 아니면 법보인지 물어도 될 지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넷째 사고(師姑)님의 명을 받아 온 것입니다.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아무래도 저희 넷째 사고님에게 직접 물어 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럴 것까지야. 별 생각 없이 물은 것뿐입니다.”
로 선생의 말에 화련 선고가 미소 짓고는 손을 들어 쟁반 위의 천을 들추니 보라색의 금속들이 가득했다.
쟁반 가득한 자정동을 확인한 그녀가 허리춤의 저물대를 하나 풀어 조심스럽게 재료들을 집어넣었다. 그녀는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다 먼저 일어났다.
로 선생도 붙들지 않고 그녀를 배웅했다. 당연히 한립도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여인을 따라 나왔다.
그들이 떠나자 대청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갑자기 엄 유생과 로 선생이 입을 다문 것이다. 특히 엄 유생은 눈빛이 불안정한 것이 생각이 많아 보였다.
“준비는 되셨습니까? 우천덕 그 노마를 상대하려면 서진합원결을 수련하는데 성공해야 합니다. 이제와 목숨이 아까워지신 것은 아니겠지요?”
“멸족의 한을 갚을 수만 있다면 이까짓 몸뚱이 아까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로 형이 신통을 대성하고서도 노마를 두려워해 나서지 않을까 잠시 걱정이 된 것이지요.”
엄 유생은 일순 안색이 어두워졌다.
“제게 그리 믿음이 없으십니까? 엄 형이 몸을 바쳐 제게 호연지기를 넘져주시면 그 속에 분명 원망하는 기운도 가득하겠지요. 우천덕을 제거하지 않고는 호연지기를 제 것으로 만들 수 없는데 어찌 그 노마를 제거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엄 형에게 저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으신지요.”
로 선생은 전혀 노하지 않고 도리어 차분하게 말했다.
“몇 년 간 일부러 몇몇 수사들과 교류해왔지만 그 중에서 로 형이 가장 수행이 높은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유일하게 제 도움을 필요로 하며 대신 멸족 복수를 해주겠다고 하였고요. 흑양종 마수를 건드리는 일이니 누가 겨우 저 같은 범인을 위해 십대 마종 수사를 없애주겠습니까.”
엄 유생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이야기했는데 손톱이 깊이 살을 파고드는 데도 느끼지 못했다.
“우천덕은 흑양종 외사집법(外事執法)이기도하니 다른 작은 종문에서는 건들기 쉽지 않습니다. 우리 유가는 본래 마도와 물과 불 같은 상극이라 그런 것에 개의치 않지만 말입니다. 게다가 성의를 표하고자 지난 5년간 엄 형의 요구라면 모두 수락하지 않았습니까.”
로 선생은 길게 탄식했다. 그러나 엄 유생의 얼굴은 풀릴 줄 몰랐고 여전히 냉랭히 그를 쏘아보았다.
“알겠습니다. 그럼 엄 형이 안심할 수 있도록 선현들 앞에서 쇄심주(鎖心呪) 맹세를 하겠습니다. 맹세하건데 만일 약속한 일을 이행하지 못하면 제 호연지기는 조금도 늘지 못할 것입니다.”
“그거면 됐습니다. 제 목숨을 아까워하는 것이 아니라 엄 씨 가문에 저 하나만 남았기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엄 형의 마음을 저도 이해합니다. 수련은 한 달 후에 시작할 계획이니 마음을 정리하시고 다시 서원을 찾아 주세요.”
“그런데 황청관에서 온 분은 어째서 굳이 한립을 데려가려 한 것입니까? 법기를 제련할 제자라면 서원에서 아무나 데려가면 되는 것 아닌가요?”
“황청관에서 이번에 제련하는 보물이 대단하기는 한가 봅니다. 그쪽 연기사들로는 일손이 부족한데다 재료도 마땅치 않으니 외부에 도움을 청하긴 하지만 분명 안심이 되지 않겠지요.
그러던 와중에 한 수사가 나타났으니 문하에 들여 마음 놓고 일을 시키려는 것일 겁니다.”
로 선생은 무언가 아는 바가 있는 듯 담담히 미소 지었다. 그 말에 엄 유생도 안심이 되었다. 불미스러운 점이 있다면 돌아가 벗에게 할 말이 없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