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0
520화. 백로서원(白露書院)
“아버님. 이 분은 한 공자…….”
감유가 부친이 들어오는 모습에 바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그래, 이미 들었다. 제 먼 친척인 한 공자라고 들었는데 신물이나 서한을 지니고 있습니까?”
감지는 온 신경이 한립에게 쏠려 아들의 말을 끊고는 물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한립이 그 말에 미소 지었다.
그는 말없이 소매를 뒤져 하얗게 반짝이는 반쪽짜리 옥패를 꺼내 건넸다. 감지는 옥패를 보는 순간 표정이 달라졌다. 그가 신중히 옥패를 살피더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다는 듯 말했다.
“알고 보니 네가 한 형의 가솔이었구나! 작고하신 고모님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으니 나와 서재로 가자꾸나.”
노인이 반가운 얼굴로 한립의 손을 쥐더니 그를 이끌고 서재로 향했다.
“고모님? 우리 가문에 그런 친척 분이 계셨던가?”
감유는 얼떨한 얼굴로 대청에 서있었다.
“한 공자님을 뵙습니다.”
서재로 들어가자마자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감지는 한립을 향해 더없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됐으니 일어 나거라. 나에 관해서는 자세히 물을 것은 없고 앞으로 내가 연락을 담당했다는 것만 알면 된다.”
한립이 담담히 말하며 한 손을 흔들자 푸른빛이 저절로 노인의 몸을 일으켰다.
“예! 본래 연락을 맡으신 이 선생께서 10년 전부터 보이시지 않아 큰일이 벌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이 많았습니다. 이제 공자님께서 오셨으니 다행입니다.”
한립의 법술에 마지막 의심까지 거둔 감지는 더욱 공경스러운 얼굴로 그를 대했다.
“이번에 들린 것은 네가 속세의 신분으로 도울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의 태도에 한립은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즉시 원하는 바를 이야기 했다.
* * *
태창성 밖에 위치한 백로서원은 남군(湳郡)의 많은 서원 중 크게 눈에 띠지 않는 곳이었다. 중간 정도에 그나마 특이한 점이 있다면 성 안에 위치하지 않고 명성이 자자한 옥전산(玉田山)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옥전산은 태창성의 유명한 영산으로 십여 개의 봉우리를 지니고 있으며 사계절 봄 날씨에 온갖 진귀한 꽃들이 만발한 곳이었다. 몇몇 나무와 과실들은 이곳에 심어야만 자라서 남군의 13개 영산 중 하나로 자리매김 하고 있었다.
백로서원은 이 산의 환운봉(幻雲峰)에 위치해 산허리부터 꼭대기까지 수많은 누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면적이 족히 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지였다.
본래대로라면 이런 산에 백로서원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천여 년 전 백로서원이 설립 된 이래로 주변의 절이든 도관이든 그들을 찾아와 성가시게 구는 법이 없었다.
반대로 도관과 절의 도사와 승려가 서원의 서생들에게 예를 다하니 많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또 다른 괴이한 점은 이곳에 모인 제자들의 신분이 천차만별이라는 것이었다. 부호의 외아들부터 농부나 소상민의 자제까지 출신도 다양했지만 예순일곱의 노인부터 스무 살의 청년까지 나이마저 들쑥날쑥 했다.
게다가 제자를 모집하는 시기도 정확하지 않아 3, 4년마다 한 무리씩 받아들이다가 어떨 때는 7, 8년이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기도 했다. 그리고 한번 이곳에 들어간 이들은 다시 얼굴을 보기 어려워 수수께끼가 가득한 서원이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옥전산 근처에 거주하는 몇몇 사람들 끼리나 나누었기에 밖에서는 수많은 서원 중 하나로 여겨졌다.
그런 환운봉을 두 사람이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위엄 넘치는 중년 유생과 스무 살을 갓 넘긴 듯한 청년 서생이었다. 조금 그을린 피부에 평범한 얼굴을 한 청년 서생은 갑자기 감 씨 저택에 나타난 한립이었다.
“한 공자, 백로서원은 벌써 두 달 전에 제자 모집을 마쳤네만 도술을 약간 익혔고 이미 수도자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하니 한번 같이 가봄세. 서원에 들어갈 수 있을 지는 자네의 운에 달렸겠지만 말이야. 백로서원의 로 선생님과 내가 인연이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는 말게.”
중년 유생은 의복을 휘날리며 걸어갔다.
“모두 엄 선생님이 일러주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숙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제가 서원에 들어갈 수 있든 없든 이번에 도와주신 일은 잊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한립이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지금 그는 연기기 3, 4성 정도의 기운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시 한립은 감 씨 가문 가주 감지에게 불가, 유가, 도가 중 현지의 수도 문파에 잠입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였다.
감지는 그 말을 듣고 놀라면서도 크게 난색을 표하지는 않았다. 이미 속세에 섞여 있는 수사들과 원만한 관계를 쌓으라는 명을 받아 미리 준비해놓았던 것이다.
유일하게 걱정이 된 것은 한립이 다른 문파에 들어가 위해를 끼치면 감 씨 가문이 피해를 입을 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가문의 모든 가업은 사실 풍 가에서 관리하는 것으로 한립은 갖고 있는 문서로 하루아침에 감지를 거지꼴로 만들 수도 있었다. 게다가 수도계의 일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은 풍 씨 가문 수사들에게 더없이 공경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한립은 감 씨 가문을 휘말리게 할 일을 벌이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하에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며칠 고민 끝에 감지는 엄 씨 성의 중년 유생을 선택했다. 그에게 한립을 백로서원에 소개시켜 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서원은 불가나 도가에 비해 제자를 받는 기준이 관대했고 이전에 엄 선생이 감지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기에 그가 최선을 다해 이 일에 나서 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대진 수도 문파들은 천남 지역의 수도 문파 보다는 들어가기 쉬웠지만 그래도 아무 저계 산수나 모두 입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립은 백로서원이라는 이름을 듣고 그날 밤 법기를 타고 몰래 옥전산에 다녀와 살펴본 결과 비교적 만족했다. 천남에 있는 여러 영안의 보물들이 있는 그의 거처만은 못해도 충분히 쓸 만한 영맥이었다.
열악한 영맥 한 줄기만 있어도 수련할 수 있었기에 굳이 더 공을 들여 큰 종문에 잠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감 형께서 조카인 네게 마음을 많이 쓰시는구나. 하긴 속세에서 영근을 지닌 인물이 없으니 네게 기대를 거시는 거겠지. 나도 영근이 있었다면 벌써 백로서원이 들어가 선도(仙道)를 걸었을 것이다.”
유생의 말에 한립이 미소를 지었다.
댕!
잠시 후 다른 봉우리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그윽한 소리에 마음이 다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보령사의 청선종이 참으로 보물이 아니더냐. 매일 3번 종을 치는데 보령사 고승들이 자랑하고 싶어 그러는 것도 같고.”
유생이 걸음을 멈추고 환운봉보다 훨씬 높은 봉우리 쪽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곳에 불가 종문이 있다는 이야기에 한립도 눈을 빛냈지만 지금 들려온 종소리는 상계 법기였다.
그는 손을 뻗어 등 뒤의 기다란 보따리를 짚고는 중년 유생을 따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산허리에 있는 평평한 공간에 도착했다.
초록 기운을 물씬 풍기는 푸른 대나무 숲이 눈앞에 펼쳐지며 그 사이로 붉은 담과 하얀 돌길이 보였다. 몇 갈래의 하얀 돌길은 대나무 숲 깊은 곳으로 통하며 그 끝에 몇 장 크기의 커다란 붉은 문이 세워져 있었다.
“가자. 보통 정문을 개방하지 않으니 쪽문으로 가야한다.”
중년 유생은 대나무 숲을 한번 둘러보고는 한립을 데리고 돌길 중 하나를 택해 걸어갔다.
이리저리 돌고 보니 한립과 중년 유생은 새까만 문 앞에 도착했다. 유생이 가볍게 숨을 고르고는 문을 두드렸다.
곧 문이 열리고 안에서 하얀 장포를 입은 젊은 문인이 나타났다.
“아, 엄 선생님이셨군요. 로 선생님을 찾아 오셨는지요?”
젊은이의 영기의 파동은 연기기 3성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영력이라고는 전혀 없는 엄 선생에게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한립은 신기함에 속으로 혀를 찼다.
천남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보아하니 유교 문파는 문규가 엄격해서 수도자라 해도 범인에게 예를 다하는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방 형을 뵈러 왔습니다. 방 선생님께서 시간이 되시는 지요?”
“서원에 귀한 손님이 한 분 찾아 오셔서 서재에서 말씀을 나누시는 중입니다. 로 선생님께 고하겠습니다.”
중년 유생이 묻자 젊은 문인이 생각 끝에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해주시지요.”
유생은 눈앞의 인물이 범인이지만 방 선생과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조금도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 품에서 전음부를 꺼내 무어라 중얼거려 날려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은 누군가의 의식이 멀리서 이곳을 훑는 것을 느꼈다.
의식의 강도로 보아 결단 초기의 수행을 지닌 듯했다. 아마 축기 중기나 후기의 수사가 아닐까 예상했던 그의 짐작이 틀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쉽게 들키지 않으려면 상대의 수행이 낮으면 낮을수록 좋았다. 잠시 후 그들이 서 있는 허공의 공기가 떨리며 어떤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다.
“엄 형이 아니십니까? 마침 잘 오셨습니다. 귀한 손님이 와계신데 괜찮으시면 함께 하시지요. 곁에 젊은 친구도 같이 데리고 오면 됩니다.”
그 말에 하얀 장포의 젊은이가 한립과 중년 유생을 안으로 안내했다.
* * *
회랑을 따라 잠시 걷다보니 한립은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글 읽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평범한 서원과 같아 한립은 조금 얼떨떨했다.
아무리 명목상으로 서원이라지만 저계 수도자들이 수련하지 않고 정말 서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단 말인가?
“백로서원의 하원제자들이 낭독하는 것 입니다. 상원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영근과 영력만으로는 안 되기 때문이지요. 유가의 호연지기(浩然之氣)부터 우선 키워야 합니다. 호연지기가 풍부할수록 대다수의 공법들을 빨리 익힐 수 있고 전도가 무한해진다고 봐야겠지요.”
젊은 문인이 한립의 의문을 읽고는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그렇군요.”
그때 그들은 넓은 누각을 지나 우아한 작은 담 앞에 도착했다. 그 안으로 들어가자 글을 읽는 소리가 뚝 끊기는 것이 방음 결계가 펼쳐진 곳이었다.
엄 유생은 이곳에 여러 번 드나들어 태가 났고 젊은 문인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인사를 하고 떠났다.
젊은 문인이 걸어가는 모습을 끝까지 눈으로 배웅하던 엄 유생은 의복을 단정히 한 후에야 건물의 가장 큰 방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방문이 스스로 열리며 로 선생의 목소리가 울렸다.
“엄 형 들어오시지요. 황청관의 화련 선고(仙姑)께서 누추한 곳에 걸음 하셨으니 소개를 해드리겠습니다.”
로 선생의 어투는 침착하고 예의 바랐지만 전혀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다.
“황청관이요?”
엄 유생은 조금 놀랐지만 주저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한립은 자연히 그 뒤를 따랐다. 응접실에는 사내와 여인이 앉아 있었다.
사내는 40대로 각이진 얼굴에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고, 여인은 20대로 새까만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가 사내와 대조적이었다. 노란 도포를 입고 은빛이 산산이 흩날리는 불진을 들고 있었는데 우아하고 귀티가 흘렀다. 그녀가 바로 황청관의 화련 선고인 듯했다.
엄 유생과 한립이 들어오자 둘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엄요 선생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습니다. 빈도가 속세의 일을 잘 알지 못하나 옹화서원의 엄 선생의 위명을 모를 수야 없지요.”
예상 외로 화련이 먼저 미소를 머금고 인사를 했다.
축기 후기의 여 수사인 그녀는 로 선생 앞에 자연스레 앉아있었다.
“과찬이십니다. 황청관의 선고님들의 위명에 비할까요. 화련 선고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엄 유생이 서둘러 손을 모아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