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9
519화. 보물
“그렇겠지요.”
한립도 대연 신군의 말에 수긍했다. 불 속성 보물은 본래 십중팔구 공격형으로 다른 속성들에 비해 파괴력이 컸다.
그는 이야기를 끝내고 소매를 털어 수중의 두 구슬을 날려 법결을 쏘아 보냈다. 그러자 금색 구슬과 하얀 구슬이 빛나며 허공에서 멈추었다.
한립이 저물대를 스쳐 여러 종류의 병과 옥함을 바닥에 꺼냈는데 작은 솥만 그대로 허공에 떠올랐다.
수결을 맺은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솥이 몸을 떨었고 동시에 옥함 중 하나가 열려 빛나는 분말을 풀어 놓았다. 한립이 입을 벌려 푸른 기운을 뱉어냈고 옥함 속의 분말 중 반 정도가 떠올라 솥 안으로 들어갔다.
훅.
낮은 바람 소리를 내며 그의 입에서 푸른 화염 한 줄기가 흘러나왔다. 작은 불씨 같이 가느다란 화염은 솥에 닿는 순간 활활 타올랐다.
한립은 쓴 웃음이 절로 났다. 법력이 봉인 당하니 원영 본체의 영화 한 줄기도 뱉어내기가 이리 어려울 줄이야.
이번에 그는 가느다란 옥병을 허공에 띄웠는데 옥병은 서서히 날아가 허공에서 맴돌자 작은 솥뚜껑이 열리고 녹색 액체가 떨어져 들어갔다.
이에 한립이 낮은 목소리로 주술을 외워대자 솥의 푸른 화염이 더욱 강렬해졌다. 순식간에 솥에서 약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한립은 미간을 좁히며 손을 뻗어 붉은 영초가 담긴 옥함을 허공으로 날렸다. 이런 식으로 그는 일정 시간마다 영초와 액체들을 그 솥에 넣었다.
* * *
하루가 꼬박 지나 솥 안의 내용물이 드디어 완성되었다.
한립의 소매가 펄럭이고 솥의 불길이 사라지자 은색 솥이 그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았다.
자세히 살피니 그 안에 진득한 액체가 담겨 있었다. 청록색의 투명한 액체에서 기이한 향이 코를 찔러댔다.
“이것이 맞는지요?”
한립은 옥간에서 묘사하는 것과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도 신중을 기하기 위해 대연 신군에게 물었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단약을 제련하는 솜씨가 이리 좋을 줄은 몰랐구나? 두 번은 실패할 줄 알았는데. 이 방면에서는 예전의 나보다 낫겠어. 이제 천시주를 액체에 담아 7일간 두면 시독을 제거할 수 있을 게다. 그 후에 마음 놓고 복용하거라.”
한립은 그 말을 듣고 안심하며 별 다른 답 없이 허공의 금색 구슬을 가리켰다. 금빛으로 변한 구슬이 순식간에 은색 솥 안으로 들어가고 뚜껑이 닫혔다.
한립은 솥을 밀실 구석에 두고는 이번에는 설정주를 쳐다보았다. 이건 제련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손바닥을 뒤집어 보라색 화염을 일으킨 그가 그것을 설정주로 쏘아 보냈다.
동시에 구슬 표면의 하얀빛과 보라색 화염이 번뜩이며 함께 융합되려는 모습을 보였다. 한립은 곧 푸른빛을 입에서 토해내 구슬을 감쌌고 구슬이 단약만 하게 축소되자 그대로 다시 삼켜 버렸다.
신중한 얼굴로 눈을 감은 그가 두 손으로 수결을 맺으며 체내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설정주가 단전에 이르러 보라색 화염이 변한 연꽃에 둘러싸여 회전하는 것이 보였고, 아래로는 그의 본명 원영이 가부좌를 하고 앉아 그와 똑같은 수결을 맺고 있었다.
한립은 이를 확인하고 조금 마음을 놓았다.
겨우 축기기 수행으로는 설정주를 제련하기는 무척 어려웠다. 그러나 자라극화로 감싸 몸에서 배양을 하다보면 나중에 제련이 훨씬 수월해 질것이고 설정주를 제어해 임시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을 마친 한립은 바로 휴식에 들어갔고 반나절 정도 지난 후에는 영수대 중 하나를 풀어 허공에 던졌다.
그러자 하얀빛이 흘러나와 금빛 찬란한 물건이 나타났다. 아직 제련이 끝나지 않은 금강조였다. 금빛 거품의 형태를 하고 있는 보물 속에서 제혼이 태평하게 엎드려 잠에 빠져 있었다.
“…….”
한립은 그것을 보고 입 꼬리를 씰룩였다. 불러내면 열에 아홉은 자고 있으니 잠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쓴웃음을 지은 그가 손가락을 뻗어 푸른 빛덩이 하나를 금색 거품에 날려 보냈다.
이에 거품이 출렁이며 제혼이 몽롱해 보이는 두 눈을 떴다. 자신이 영수대 밖에 나와 있는 것을 확인하자 검은 빛으로 변해 거품을 빠져나와 한립의 어깨 위에 앉았다.
제혼은 부드럽게 털이 난 머리를 한립의 목에 비벼댔다. 오랜 세월 함께 지내 한립을 가족처럼 여기는 듯했다.
한립도 미소 지으며 영수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공중에 떠있는 금강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소매에서 푸른 기운이 흘러나와 금색 거품 주위를 맴돌았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한립은 멈칫하다가 생각 끝에 수결을 맺으며 법결을 날렸다. 그러나 보물은 몇 번 반짝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큰 변화가 없었다.
심호흡을 한 그가 다른 수결을 취하며 주술을 외자 다양한 빛깔의 법결들이 손가락에서 분출되었다. 그런데 이마저 통하지 않자 그가 드디어 난색을 표했다.
“대연 선배님,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아무리 축기기 수행이라지만 회수할 수조차 없다니요. 금강사리로 제련한 것이라더니 이상한 특성이 있는 것 아닐까요?”
“금강조 같은 불가의 보물을 시화를 이용해 제련할 수 있다는 것도 이미 이상하지 않더냐. 어쨌든 사리와 시화는 상극일 테니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그것을 다룰 수 없을 지도 모르지. 일단 사리를 회수할 수 있는 구결을 알려 줄 터이니 그것을 시도해 보거라.”
“알겠습니다.”
* * *
반나절 후, 한립은 새로 얻은 법결을 이용해 겨우 금강조를 축소시킨 뒤 손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대연 신군이 알려준 구결로는 제련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영화도 통하지 않고 대연 신군이 알려준 구결도 통하지 않았다.
대연 신군은 아무래도 금강조를 제련하려면 만년시염(万年尸焰)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에 한립은 답답해졌다.
“만년시염을 어디 가서 찾는단 말입니까. 설마 설릉산으로 돌아가 현엽왕이라도 데려올까요?”
한립이 투덜대는 소리에 대연 신군도 그저 콧방귀를 뀌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때 무료하게 어깨에 앉아있던 작은 원숭이가 갑자기 입을 벌렸다. 회백색 화염이 나와 공중의 금색 거품을 둘러싼 것이다.
본래 아무 반응이 없던 금강조가 웅웅 진동하며 회백색 화염 속에서 작아졌다 커졌다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한립은 여간 놀란 게 아니었다.
“만년시염?”
대연 신군이 놀라 중얼거렸다.
* * *
남군(湳郡)은 대진의 중부 지역에 있는 중 하나로, 면적으로 치면 36개의 군 중 뒤에서 손에 꼽혔지만 부유함으로는 치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대부분이 평원과 수원지여서 풍부한 생산량과 영산을 지닌 곳이라 범인들도 자주 수도자들이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불교도가 많아 절이나 도관이 곳곳에 건립되어 있었고 부유한 상인부터 농부까지 믿음직하고 착실했다.
그 외에도 서원(書院)도 많아서 크고 작은 성에는 서원뿐만 아니라 작은 마을에도 서원이 있었다.
이런 서원들은 등급이 천차만별이었다. 가장 높은 등급의 서원에서는 대학자들이 신분이 있는 관리의 자제들에게 사서오경을 가르쳤고, 가장 낮은 등급의 서원에서는 유생이 가장 기본적인 유가의 사상과 경전 등을 가르쳤다.
그러다 우수한 인재를 발견하면 상급 서원에 추천하기도 하여 형편이 어려운 이들에게는 하루아침에 신분상승 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지기도 했다.
상급 서원을 나온 유생은 대진 정부의 환영을 받았고, 몇몇 최고의 서원 출신들은 지방 장관이나 작위가 있는 고관들의 눈에 들어 영입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태창부의 태창성 역시 서원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는 규모가 있는 성이었다.
가장 큰 무광성에는 비할 수 없더라도 남군에서는 고관과 귀인 부호가 가장 많은 곳이었다. 작위를 받은 공후 가문만 해도 서너 개였고, 각양각색의 직업에 종사하는 범인들이 무수히 많았다.
태창성 서쪽에 위치한 감 씨 가문도 나름 자산이 있는 상인 가문 중 하나였다. 성 내부에 거의 20개 정도의 주루를 보유한 거상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중간 정도의 규모에 불과했다.
그래도 부호가 많다는 태창성 안에 나름 큰 규모의 저택을 소유한 감 씨 가문에는 하인만 해도 3, 40명이 넘었다.
이날 해가 중천에 뜬 정오 무렵에 문인 복장을 한 청년이 골목에서 나타났다. 그는 등에 회색 천으로 감싼 기다란 봇짐을 메고 있었고 꽤나 오랫동안 객지 생활을 한 듯했다.
청년은 골목을 돌자마자 무언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잠시 후, 그가 감 씨 가문이라고 적힌 새까만 편액을 보고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대문 앞에 이른 그는 망설임 없이 철로 만든 문고리로 문을 두드렸다.
텅! 텅!
소리가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문 안에서 누군가 급히 달려 나와 대문을 열었다. 하인 복장의 중년 남자는 순간 놀랐지만 청년을 보고는 그런 기색이 사라졌다.
“누구 십니까?”
본래 허리를 숙여 인사하려던 사내가 청년을 위아래로 훑었다.
“이곳이 감지 숙부님 댁이 맞습니까?”
“감지 숙부님이라면 저희 어르신의 성함이온데, 공자께서는…….”
청년의 몰골을 보고 조금 멸시하는 기색이 떠올랐던 하인이 얼른 표정을 바꿨다.
“저는 한립이라고 합니다. 감지 숙부님의 먼 친척뻘 되는데 인사를 드리러 찾아 왔습니다.”
그는 자기소개를 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미 1년간 폐관 수련을 마치고 천시주와 금강사리의 도움으로 명왕결 1성을 수련해냈다. 미쳐 날뛰기 일보직전이던 살기는 많이 안정을 찾았지만 그래도 즉시 계획대로 감 씨 가문을 찾아오는 길이었다.
“한 공자님이시군요. 안타깝게도 어르신께서 아침 일찍 친우 분들과 약속이 있어 나가셨습니다. 큰 도련님께 고하여도 되겠습니까?”
“수고스럽겠지만 그렇게 해주시지요.”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하인이 허리를 살짝 굽히고 대문을 닫더니 다시 바삐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한립은 대문 앞에 서서 인근의 다른 저택과 지나는 마차 그리고 행인들을 살폈다.
의식으로 살펴보지 않아도 성 안에 수도자가 상당했으며 고계 수사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일다경이 지나고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젊은 청년이 걸어 나왔다. 비단장포를 걸친 멀끔한 인상의 청년 뒤에는 아까 달려 들어간 하인이 서 있었다.
“한 공자십니까? 저는 감유라고 합니다. 먼 친척이라 하셨는데 저는 들은 바가 없군요. 괜찮으시면 저와 같이 잠시 응접실로 가시지요.”
감유가 한립을 살피고는 공손히 청했다.
“감 숙부님의 큰 공자님이시군요. 감 형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감유가 미소를 지으며 옆으로 비켜서자 한립은 저택 안으로 들어갔고 검은 대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 * *
한 시진 후 아침 일찍 출타했던 50대 노인이 남색 장포를 입고 신수가 훤한 얼굴로 돌아왔다.
“집에 무슨 일이 있더냐?”
감지 노인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문 앞에서 있는 하인의 얼굴을 보고는 물었다.
“어르신, 한 씨 성의 공자께서 먼 친척이라고 하며 찾아오셨습니다. 큰 공자님께서 응접실로 안내해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친척인데 한 가라고?”
“어르신의 친척이 아니시면 사기꾼입니까? 소인이 당장 관에 고할까요?”
중년 하인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사기꾼인지 아닌지는 당장 어찌 알겠느냐. 정말 그런 먼 친척이 있는데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니 문이나 잘 지키거라!”
감지가 얼굴이 굳어 하인을 질책하고는 서둘러 저택으로 들어가 곧바로 대청으로 향했다. 대청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노인은 익숙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하하! 한 형께서 사서오경에 이리 통달하시니 감탄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해서는 저는 이런 식으로 이해를 했…….”
분명 그의 큰 아들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신이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노인은 조금 어두워진 얼굴로 불안해 하다가 이를 악물고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