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7
517화. 전투
쿵!
현엽왕이 서 있는 주변에 녹색 빛이 번뜩이며 바람의 칼날들과 검은 빛줄기들이 동시에 튕겨나갔다. 시왕의 몸은 웬만한 법보보다 훨씬 단단했던 것이다.
그때 금색 구슬이 변한 거대손이 모래 교룡을 쥐고 흔들다가 결국에는 목덜미를 거머쥐고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한립은 차분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강시의 기운이 충만한 쪽은 중상을 입은 후에도 충분히 사납게 싸워내고 있었다.
그러나 노란 장포 거한은 모래 교룡이 금색 손에 잡힌 것을 보고 도리어 기뻐하며 손을 뻗었다.
교룡의 전신이 노란 색을 번뜩였다. 순간 노란 모래로 허물어져 내린 교룡은 거꾸로 거대한 손을 휘감으려 든 것이다.
노란 장포 거한도 당연히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현엽왕과 한립을 서늘한 시선으로 훑으며 조용히 수결을 맺어 결계의 노란 모래들을 움직였다.
열댓 장에 이르는 거대한 모래의 파도가 점점 기이한 소리를 내며 안으로 좁아 들었다. 그 안에서 들려오는 귀곡성에 평범한 수사였다면 벌써 넋을 잃었을 것이다.
사방의 결계를 이용해 현엽왕을 죽이려는 것이었다.
한립은 노란 장포 거한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은 순간 결론을 내렸다. 상대는 자신도 같이 죽이려는 것이었다. 순간 분노한 한립이 본래 조금 더 기다려 보려던 마음을 바꾸고 움직였다.
한쪽 소매를 털자 수십 개의 금색 비검들이 쏟아져 나와 대량의 검빛을 형성해 가까이 다가오는 모래의 파도를 갈랐다.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보라색 고대 거울을 들어 보라색 빛기둥을 분출했다. 그러자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이런 안개 류와 상극인 보라색 빛기둥이 마치 스며들 듯 모래 파도 속으로 사라졌다.
“……!”
한립이 미간을 좁히고 더욱 경계심을 끌어올리는데 누군가 소리쳤다.
“낙혼사는 비검을 오염시키니 닿게 해서는 안 됩니다.”
현엽왕이 법보들의 공세에 둘러싸여 드디어 한립이 움직인 것을 보고는 말해 주었다.
한립이 놀라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비검들에 베어져 나가 틈이 벌어졌던 곳에서 음산한 바람이 불며 무수히 많은 검은 모래들이 짙은 기운을 분출해 비검을 얽매려 했다.
검은 기운이 비검을 감싸자 비검을 통제하기가 어려워졌다. 한립이 서늘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터져라.”
콰콰쾅!
연달아 천둥소리가 울리고 무수히 많은 가는 금색 뇌전이 폭발했다. 모래가 뿜어낸 검은 기운이 순식간에 소탕되었을 뿐 아니라 모래 바람 중간에 커다란 동굴이 뚫렸다.
눈을 가늘게 뜬 한립이 그 안을 주시하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 모래들은 그 수량이 많아 깨트리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갑자기 등 뒤에서 은색 날개를 펼쳤다.
꽈광!
한립은 그 자리에서 사라져 열댓 장 밖에서 나타났는데 그곳을 새빨간 창이 꿰뚫고 지나갔다. 멀리서도 타오르는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기다란 창이 한 바퀴 돌아 제 주인에게 돌아갔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 도착지인 마기의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노인은 한립의 뇌둔술에 크게 놀란 듯 했다.
한립이 다시 날개를 펄럭여 사라졌다. 푸른 장포의 노인은 순간 흠칫 했으나 전투 경험이 적지 않은 만큼 바로 저물대를 스쳐 푸른 방패를 내뿜었다.
그 찰나의 순간 마기의 구름 바깥에서 은색 빛이 번뜩이더니 한립의 신형이 나타났다.
꽈광!
그는 금빛이 요란하게 번뜩이는 두 주먹을 쥐고는 다시 한 번 사라졌다.
식겁한 노인이 불길한 예감에 입을 벌려 녹색빛이 반짝이는 검을 내뿜었고 검은 녹색 빛줄기로 변해 그의 몸을 쉼 없이 돌았다.
노인이 여러 법보를 방출하고 조금 안심한 찰나 옆면에서 천둥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몸에 뇌전을 번뜩이며 나타난 한립은 천둥의 신이 강림한 듯한 모습이었다.
주변의 마기의 구름은 뇌전에 닿자마자 깨끗하게 사라져 모습을 숨기고 있던 노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헛!”
푸른 장포 노인이 헛바람을 들이쉬며 서둘러 달아나려 했다. 하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한립이 그대로 그를 놓아줄 리 없었다.
신형이 번쩍이고 환영처럼 노인 앞으로 이동한 그가 양 손을 떨쳤다. 보라색 화염과 금빛을 동시에 분출한 것이다.
푸른 장포 노인은 한립의 속도가 너무 빠른 것에 놀라다가 즉시 입을 벌려 방패에 하얀 기운을 불어넣었다. 곧 방패가 푸른 벽으로 변해 한립과 그 사이를 막아섰다.
그러나 보라색 화염이 번뜩이며 푸른 벽에 닿았다.
촤륵.
보라색 한기가 벽을 타고 신속하게 퍼지더니 푸른 방패 법보 자체를 그대로 얼음 속에 봉인해 버렸다.
‘이럴 수가!’
노인이 놀라 안색이 창백해졌을 때 금빛이 쇄도했다.
푹!
금빛이 얼어붙어 벽 속으로 사라졌다가 바로 벽을 뚫고 나타났다. 노인은 영기를 북돋아 재빨리 옆으로 피했다.
“끄악!”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어깨가 서늘해지며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 쳤다. 서둘러 고개를 돌려 보니 팔 한쪽이 금빛에 잘려나간 것이다. 조금만 느렸다면 아마 잘려나간 것은 자신의 목이었을 것이다.
금빛이 방향을 틀며 모습을 드러냈다. 한 촌 크기의 금색 검이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려 얼음벽에 아주 작은 구멍이 뚫린 것을 확인했다. 금빛 검은 굉장히 날카로워서 얼음벽과 방패 등을 뚫고 그대로 자신의 팔을 잘라낸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재빨리 부적을 붙여 지혈을 하고 이를 악물었다. 팔을 잘린 고통을 갚아줄 차례였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아도 한립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노인이 그를 찾을 생각을 포기하고 저물대에서 방어용 보물을 꺼내려는데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펑.
푸른 장포 노인 뒤에서 들릴 듯 말 듯한 소리가 울리고는 영력으로 만들어낸 보호막을 뚫고 그의 가슴을 꿰뚫고 나왔다. 곧 보라색 빙염이 그의 전신에 퍼져 산 채로 얼음 속에 갇히게 되었다.
노인은 바늘이 찌르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꼼짝할 수 없자 겁에 질렸다.
그때 한립이 먼저 소매를 털어 금색 뇌전의 그물을 펼쳤다. 뇌전이 폭발하며 보라색 얼음 덩어리가 산산조각 났고 그 안에서 검은 보호막을 펼친 원영이 빠져나와 순간이동을 하려했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한립이 냉소하자 금빛 그물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노인의 원영을 휘감았다. 한립이 서늘한 눈빛으로 수결을 맺어 금빛 그물에 흐르는 뇌전을 폭파했다.
노인의 원영은 이렇게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다.
노인은 한립을 기습하자마자 순식간에 그의 반격에 당해 죽었기에 노란 장포 거한이나 방첨산 쌍마가 도와줄 시간도 없었다.
간단히 원영 중기의 노인을 죽이는 한립을 보고 두 수사는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노란 장포 노인이 신속히 입술을 달싹이며 돌풍 속의 천풍 진군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들은 현엽왕을 공격하던 법보를 전부 회수해서는 뒤도 돌아보니 않고 모래 바람 속으로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현엽왕은 중상을 입고도 강력한 시왕의 육체로 공격을 버티고 있었지만 한립과 시선을 마주치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상대의 실력과 수단이 노마의 모골을 송연하게 했던 것이다.
‘원영 후기 수사라도 되는 것인가? ’
이런 의심이 들었지만 분명 수행은 원영 중기였다. 겉보기에는 예의 바른 청년에 불과한 수사가 보여준 실력이 너무 대단했다.
화신을 내보내 상대를 추격하라고 시켜서 다행이지 직접 금강조를 찾겠답시고 나섰으면 자신이 낭패를 볼 뻔 했다.
그는 연계를 잃은 두 화신이 분명 한립의 손에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머뭇거리다가 한립에게 무언가 말을 걸어 보려고 하는 찰나, 사방의 진법이 격변하며 엄청난 기세를 내뿜었다.
노란 모래 바람은 점점 줄어들고 한립과 그의 비검을 오염시키려던 새까만 모래 입자는 더욱 조밀해졌다.
귀곡성은 더욱 크게 울려 펴졌고 새까만 모래들의 기세는 흉흉해져갔다.
“광사 노괴가 지니고 있던 낙혼사를 전부 방출한 모양입니다. 일반 법기로는 막을 수 없으니 법력을 이용해 버티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 양이면 상대의 법력 소모가 극심할 테니 오래 버티지 않아도 될 겁니다.”
현엽왕이 긴장하며 한립에게 소리쳤다. 이미 한 배를 탄 사이에 지금 그에게 문제가 생기게 놔 둘수는 없었다.
금빛 뇌전으로 검은 기운을 몰아내는 것을 보았지만 이렇게 낙혼사의 양이 많아지면 상황은 또 달라졌다.
“낙혼사라는 것이 음기가 짙은 것으로 보아 혼백을 제련해 만든 법보인 듯 합니다.”
한립은 표표히 허공에 떠서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그가 전혀 긴장한 기색이 없자 현엽왕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점점 다가오는 검은 모래의 기운에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입을 벌려 주먹 크기의 회백색 시화를 분출했고 순식간에 거대한 화염덩어리가 되었다.
오랜 세월 제련해온 이 화염만이 낙혼사의 위력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검은 모래의 기운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쿠쾅!
회백색 시화와 검은 기운이 맞닥뜨려 교전을 시작했을 때 한립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다가 허리춤의 영수를 허공에 던졌다.
그 안에서 무언가가 빠져나와 한립 앞에 나타났는데 새까만 작은 원숭이였다.
작은 원숭이는 뭐가 불만인지 표정이 좋지 못했다. 금강조 속의 시화를 제련하느라 바빴는데 한립이 억지로 소환을 하자 기분이 크게 상한 것이다.
하지만 곧 제혼이 콧구멍을 킁킁 거리더니 사방을 둘러싼 새까만 모래 기운을 보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한립이 의식으로 재촉하자 원숭이가 가슴을 두드리며 낮게 울부짖었다.
검은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와 열 장 크기의 거대 유인원으로 변한 제혼은 등 뒤의 귀신 문양이 더욱 선명해져 있었다.
모래 바람 속에 숨어있던 이들이나 목숨을 걸고 낙혼사와 싸우던 현엽왕이나 유인원의 모습에 기겁했다.
그러나 그들이 놀라든 말든 거대 유인원은 콧바람을 불며 노란 기운을 방출했다. 노란 기운은 한립을 빙글 돌려 보호했다.
그리고 몰려들던 검은 모래들은 노란 기운에 접촉하자마자 검은 기운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거대 유인원이 그것을 보더니 신이 나 크게 입을 벌려 금빛 찬란한 빛기둥을 방출했다.
빛기둥이 닿는 곳마다 검은 모래는 반항도 하지 못하고 빨려 들어갔고 곧 거대 유인원의 입 안으로 사라졌다.
노란 기운과 빛기둥이 몇 번 휩쓸고 나자 검은 모래는 대부분이 음기를 잃고 흩어지고 말았다. 당연히 한립은 멀쩡했고 제혼만이 대량의 음기와 검은 모래를 흡입하고 좋아하고 있었다.
주변의 모래 바람이 점점 노란색으로 돌아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광사 상인과 천풍 진군은 할 말을 잃고 있었다.
낙혼사처럼 다른 이들의 법보를 오염시킬 수 있는 보물은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노란 장포 거한은 수많은 저계 수사를 죽여 그들의 혼백과 대량의 진귀한 재료를 백여 년 넘게 제련했을 것이다.
이번에 현엽왕을 건드릴 수 있었던 것도 어느 정도는 보물의 위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름 모를 수사가 내놓은 거대 원숭이가 그것을 흡수해가니 노란 장포 거한은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더 이상 낙운사를 이용해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검은 모래를 모두 회수했다.
그는 이제 이번 일이 성공할 수 있을지 불확실해지자 이쯤에서 물러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광사 형, 이번에 빌려온 남정신사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으로 상대하시죠. 저 자의 영수의 정체는 모르겠으나 음혼이나 마귀와 상극으로 보입니다. 남정신사는 정순한 도가의 기운으로 이뤄진 보물이니 상대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저 자만 죽이면 나머지는 계획대로 될 겁니다.”
새까만 얼굴에 작은 눈을 가진 천풍 진군이 말을 했다. 사실 이번 일을 계획하며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성공을 눈앞에 두고 이대로 물러나는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남정신사는 만일을 대비해 천신만고 끝에 얻어온 보물입니다. 천석 노파와 내가 인연이 있기에 겨우 그럴 수 있었죠.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만 쓰겠다고 약속을 하고 가져온 것인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 뒷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광사 상인이 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렇지만 저 수사가 지닌 영수와 법보들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남정신사를 이용하지 않으면 대항할 방법이 없어요. 설마 이대로 허탕을 치자는 것입니까? 다른 물건은 몰라도 노마의 천시주(天尸珠)는 신체를 단련할 수 있는 보물이자 우리가 다음 경지에 오르는데 꼭 필요한 물건이에요!”
“천주시만 중요하고 남정신사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까? 이 모래는 반복해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단 한번만 사용할 수 있단 말입니다. 아무리 천석 노파와 인연이 있다하더라도 다시 얻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저 자의 실력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상황인데 이것을 사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상대를 격퇴시킬 수 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
광사 상인은 콧방귀를 뀌었다.
“허나…….”
천풍 진군도 상대의 말이 일리 있다고 여겼지만 그래도 이대로 물러서기는 아쉬웠다. 그런데 그때 저 멀리서 불덩이가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