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
516화. 일촉즉발(一觸卽發)
한 식경이 지나고 한립은 푸른 빛줄기로 변해 설릉산맥 바깥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그는 날아가면서 대연 신군과 어디로 가서 수련해야 할지 상의를 했다.
꽈꽈꽝!
그런데 겨우 수 백 리만에 어딘가에서 경천동지할 울림이 들려왔다.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 같았다. 아무런 대비를 하지 못했던 한립도 귀가 멍해져 신형이 흔들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았다.
소리 난 곳을 쳐다보다 그는 즉시 방향을 틀어 멀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겨우 20리를 달아났는데 뒤쪽에서 엄청난 영기의 파동이 느껴졌다.
회색 기운과 검은 구름 그리고 하얀 돌풍이 앞 다투어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중이었다. 축기기 수행을 지닌 한립의 속도로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제길!’
멀리 달아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성가신 일들이 꼬박꼬박 그를 찾아 들었다. 살펴보니 세 수사의 기운이 남달랐다. 전부 원영기 이상의 수사들이었다.
그나마 가장 앞쪽의 회색 기운은 연해졌다 진해졌다 하며 흔들리는 것이 중상을 입고 나머지 수사들에게 추격을 받는 중 같았다.
도저히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한립이 법기를 움직여 비켜섰다. 어차피 서로 쫓고 쫓기느라 바쁘다면 겨우 축기기 수사는 못 본 척 지나가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한립이 겨우 십여 장을 비켜서다 화들짝 놀라 움직임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회색 연기가 한립 옆을 지나갔다.
관을 쓴 마른 사내는 혈색이 없는 얼굴로 한립을 보며 의아해했지만 순식간에 수십 장 앞으로 날아갔다. 그때 주위에서 엄청난 진동이 일며 커다란 조롱박이 나타나 노란 모래 바람을 분출했다.
“낙혼사(落魂砂)!”
회색 기운 속의 인물이 모래 바람을 보고 놀라 서둘러 방향을 틀어 피했다.
“허허! 현엽 형, 이미 늦었습니다.”
조롱박 위에서 턱수염이 가득한 노란 장포의 거한이 나타나 크게 웃어댔다. 그가 수결을 맺자 사방팔방이 쿵쿵거리며 진동을 했고, 짙은 모래 바람이 동시에 솟아올라 하늘을 가렸다. 그 안에는 어느새 진법 법기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회색 기운 속의 수사도 모래 바람 속에 갇힌 것을 깨달았다.
시기 속에 숨어 있던 현엽왕은 악독한 눈초리로 거대한 조롱박 위의 노란 장포 거한을 노려보았다. 두 따르던 하얀 돌풍과 검은 구름 역시 유성처럼 하늘을 가르고 내려와 그 자와 합류했다.
“현엽 형, 이미 태양문 송 선생의 지양척에 당해 중상을 입지 않았습니까! 그냥 천시주(天尸珠)를 내놓으시고 우리가 금제를 걸게 협조하시면 목숨은 살려드리지요. 우리와 함께한 세월이 있는데 현엽 형이 죽는 것을 차마 두고 볼 수가 있겠습니까?”
노란 장포 거한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광사 상인! 네 놈일 줄 알았다. 묘실을 나오면서부터 기분이 이상하더라니 네가 나를 추격하고 있었구나. 10년 넘게 기다려 나를 궁지로 몰아넣다니 인내심이 가상하다. 허나 겨우 황사진(黃砂陣)으로 본 왕을 가두어 둘 수 있을 것 같으냐?”
현엽왕은 이런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했다.
“보아하니 긴 말이 필요 없겠습니다. 천시주를 몸에 지니고 있지만 않았어도 여기까지 도망치지도 못 했을 것인데 아쉽군요. 미리 말해 주자면 이번 계획을 완벽하게 성공하기 위해 천석 노파가 백여 년간 제련한 남정신사(藍晶神砂) 호리병을 절반이나 채워 얻어왔습니다. 이미 낙혼사 속에 잘 섞어 두었으니 달아날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노란 장포 거한도 왜인지 이런 말을 하며 시간을 끌었다.
“남정신사? 천석 노파가 목숨처럼 아끼는 것을 네 놈에게 내주었다고? 허튼 소리 말거라.”
현엽왕의 안색이 일순 변했다가 전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소리쳤다. 광사 상인은 아무 대답 없이 다시 웃음을 터트렸고 이에 현엽왕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상한 일은 세 수사가 현엽왕을 포위하고서도 다른 계획이 있는지 바로 그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엽왕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이미 달아나며 도움을 청하는 전음부를 보내 놓았으니 원병이 도착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곧 네 수사가 한 마디도 없이 대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것은 그들뿐이 아니었다. 얼떨결에 같이 결계에 갇힌 한립도 있었다.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지만 한립은 줄곧 입을 다물고 다른 수사들의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일단 쌍방이 싸우기 시작하면 그 틈을 노려 슬쩍 달아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마기 속의 누군가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입을 연 것이다.
“눈에 거슬리는 녀석은 일단 치우고 시작합시다.”
마기의 구름 속에 이름 모를 노마가 한립에게 살의를 드러냈다.
“그럽시다. 괜히 중요한 일에 방해가 될지 모르니까요.”
조롱박 위의 노란 장포 거한도 무표정하게 한립을 바라보았다. 그 말에 한립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마지막 남은 봉인해제의 기회를 이곳에서 써야하게 생긴 것이다.
마기의 구름이 꿈틀거리고 당장이라도 공격을 가할 기세였다.
한립도 주저 없이 수결을 맺으며 주문을 외워 머리 위에 녹색의 귀신 얼굴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의 몸에서 계란 크기의 녹색 빛덩이 다섯 개가 빠져나와 순식간에 소실되었다.
이때 노마의 검은 구름 일부가 뭉쳐 새까만 구렁이로 변한 뒤 날아들었다.
조롱박 위의 노란 장포 거한이나, 하얀 돌풍 속의 천풍 진인이나 노마가 축기기 선사를 단숨에 도륙할 것을 의심치 않았지만 현엽왕 만이 미세하게 미간을 좁히며 이채를 띠었다.
거대한 구렁이는 한립의 머리를 노리고 입을 벌렸다.
콰쾅!
한립의 한 손에서 금빛 뇌전이 뻗어나가 구렁이의 입 안에서 터졌다. 거대한 구렁이가 반항도 못하고 흩어져버렸다.
이어 한립의 전신에서 진한 영기가 피어올랐다.
“저는 그저 이곳을 지나는 중이었습니다. 네 분께서 이곳에서 싸우시는 것은 상관없으나 저를 끌어들이지는 말아주십시오.”
한립이 한 손으로 구렁이를 흩어버리고는 말했다. 노란 장포 거한 등이 안색이 달라져 한립을 바라보니 놀랍게도 그들과 동급의 수행을 지닌 수사였다.
어찌 된 일인가? 정말 우연이란 말인가 아니면 계획적으로 우리를 뒤쫓았단 말인가. 세 노마가 각자 의심을 품고 생각에 잠겼다.
현엽왕은 다른 의미로 놀라고 있었다. 그는 단번에 한립이 금강조를 가져간 수사라는 것을 알아보았는데 이렇게 수행이 높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 동안 한립은 의식을 퍼트려 주변 결계를 살폈다. 모래 바람이 정말 신묘한 능력이 있는지 강제로 깨고 나가려면 힘깨나 써야할 듯 했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조롱박 위의 거한에게 차분히 말했다.
“저는 당신들의 은원에 끼어 들 생각이 없으니 입구를 만들어 저를 내보내 주시지요.”
“수사는 누구기에 설릉산맥까지 오신 것입니까?”
노란 장포의 거한이 나름 온화하게 물었다.
“저는 한 가로 이곳을 그저 지나던 중이었습니다. 제 대답이 만족스러우십니까?”
한립의 목소리가 한결 서늘해졌다. 그는 시간이 없었다. 마지막 봉인해제가 언제 풀릴 줄 알고 상대와 말장난을 하고 있겠는가.
“금제를 열어 수사를 나가게 하는 것은 힘들겠습니다. 황사진(黃砂陣)은 설치가 쉽지 않은데 그때 상대가 달아나면 어찌 합니까. 수사가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우리가 노마를 죽인 후에 풀어드리지요.”
노란 장포 거한이 난색을 표했다.
“한 수사가 저 말을 믿는다면 죽을 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본 왕을 죽이고 이 일을 덮기 위해 수사까지 노릴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본 왕과 힘을 합쳐 결계를 부수고 나가시지요.
제 거처가 멀지 않으니 그곳으로만 돌아가면 이 자들은 두려워할 것이 못 됩니다. 본 왕이 심마를 걸고 맹세하건데 도와주신다면 이후 반드시 수사에게 감사를 표할 것입니다.”
현엽왕이 진지하게 맹세했다. 한립은 표정 변화가 없었지만 슬쩍 눈썹을 끌어올렸다.
“한 수사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만일 저 노마와 힘을 합쳐 결계를 깨고 나오면 바로 우리 셋을 상대해야 합니다. 그럼 저희도 봐드릴 수가 없지요. 제 제안은 간단합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무사히 이곳을 벗어날 수 있게 해드리지요. 본 상인도 심마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노란 장포 거한이 협박 같은 회유를 시도했다.
“협박에 굴할 것 없습니다. 곧 본 왕의 원병이 도착할 것이니 조금만 버티면 아무 문제없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현엽왕은 만년 시왕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간곡하게 상대를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한립은 그에게 구명줄과도 같았다.
이때 한립이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노란 장포 거한이 그것을 보고 눈빛이 흉악해 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지만 방금 거대 구렁이를 단번에 흩어버린 실력을 보건데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현엽 형, 저와 천풍 수사 곁에 있어야할 마풍칠자(魔風七子)와 황진삼살(黃塵三煞)이 어디로 갔을 것 갔습니까? 그들에게 수사가 묘실을 나오는 순간 거대한 결계를 펼쳐 묘실을 단단히 봉해두라 명했습니다. 그들의 실력으로 묘실을 쳐들어 갈 수는 없어도 반나절 정도 입구를 막고 버티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요. 게다가…….”
말을 하다 말고 노란 장포 거한이 냉소했다.
“게다가 무엇이란 말이냐?”
“……게다가 이제 곧 오시(午時)가 아닙니까? 음기의 증폭이 하루 중 가장 약해지는 때이지요. 현엽 형의 천시대법도 위력이 크게 줄겠습니다.”
광사 상인이 허공에 떠서 히죽거렸다. 현엽왕이 그 말에 안색이 파랗게 변했다.
“본 왕의 천시대법까지 깊이 연구했구나. 그렇다면 오늘 천시대법의 진면목을 보여주마!”
갑자기 현엽왕이 고개를 쳐들고 광소하더니 악랄하게 소리쳤다. 원병이 오지 않는다 해 놀라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지금 실력을 보이지 않으면 한립을 설득할 일도 요원했다.
휙.
검은 핏방울들이 그의 몸에서 빠져나와 검은 부적으로 변했고 그대로 현엽왕의 이마에 날아가 붙었다.
이어 부적에서 요사스러운 기운이 감돌더니 현엽왕의 몸에서 회백색 시기(尸氣)가 용솟음쳤고 그는 야수처럼 울부짖었다. 노란 장포 거한 등은 상대가 무슨 술수를 부리는 줄 몰랐지만 기다려줄 이유가 없었다.
“공격합시다. 더 시간을 끌 필요도 없습니다.”
이어 광사 상인이 발아래 거대 조롱박을 박찼다. 조롱박 입구에서 대량의 모래 바람이 흘러나와 몇 장 길이의 모래 교룡으로 변했다.
거대한 모래 교룡이 현엽왕에게 쇄도했다.
다른 두 수사도 동시에 움직였다. 하얀 돌풍 속에서 백 개가 넘는 거대한 바람의 칼날들이 튀어나왔다. 상상을 초월하는 풍인술(風刃術)이었다.
그리고 마기의 구름 속에서도 열댓 개의 비도(飛刀)가 빠져나왔다. 새까만 비도는 아주 짧았지만 순식간에 빛줄기로 변해 바람의 칼날들의 비호를 받으며 소리 없이 들이닥쳤다.
위급한 순간, 현엽왕의 술법도 완성되었다.
크하항!
머리 위의 고관(高冠)이 바람을 타고 어두운 보라색으로 변하면서 노마의 팔뚝이 불어나고 체구가 커지면서 전신에서 녹색 털이 자라났다. 또한 열손가락에서 보라색의 날카로운 손톱이 자라나고 얼굴은 신속하게 쪼그라들며 커다란 송곳니가 입 안에서 튀어나왔다.
이것이 바로 만년 시왕의 본 모습이었다.
이때 모래 교룡과 바람의 칼날 그리고 검은빛줄기가 가까워지자 현엽왕이 사나운 눈빛을 반짝였다.
그가 입을 벌려 주먹만 한 금색 구술을 분출하니 거대한 손으로 변해 모래 교룡을 먼저 잡아챘다.
이어 현엽왕은 양 팔뚝을 미친 듯이 휘둘러 무수히 많은 녹색 빛들을 손톱에서 분출해 그물처럼 몸을 보호했다. 뜻밖에도 맨 몸으로 엄청난 공세를 막을 작정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