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4
514화. 살의
‘무우침으로 잠시 기억을 봉인해 두었으니 한 동안은 별 일이 없을 테지. 수행이 떨어져 몽인술을 펼칠 수 없으니 불편한 점이 많군.’
한립이 고개를 젓고는 진법 깃발을 회수해 누간을 빠져나왔다. 이제 이곳을 떠날 때였다.
교류회 중간에 떠나는 수사가 한둘은 아니었기에 장원의 정문을 지키는 수사들도 그가 법기를 타고 날아오르는 것을 의아해하지 않았다.
푸른빛의 거한이 말한 작은 성으로 날아갔다. 설릉산맥에서 그리 멀지 않아 얼마 후 설강성을 찾을 수 있었다.
전운진에 비해 서너 배는 큰 곳이라 규모는 작아도 간신히 성이라 칭할 만 했다. 한립이 성안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길거리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거리를 걸어가며 의식을 퍼트려 보니 성 안에 수도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거의 저계 수사였고 가장 수행이 높은 자는 서남쪽 모처의 장원에 있는 결단기 수사 정도였다.
한립의 강력한 의식이 그를 훑고 지나가도 상대는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한립은 이곳에 위협적인 존재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거리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곧 넓은 십자 모양의 교차로에 이른 그가 근처의 객잔을 보며 걸음을 멈추었다. ‘열래(悅來)’라는 은색 글자가 적혀 있는 객잔이었다. 이런 평범한 이름의 객잔은 대진에만도 수 백 개는 될 것이다.
한립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둘러본 후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다. 객잔 내부는 어두컴컴하고 고요했다. 손님이 전혀 없는 것이 잠시 휴업 중인 듯 했다.
열래객잔의 주인은 오십 대의 마른 노인으로 성 안에서는 꽤 자산가에 속했다. 그는 데려온 지 1년이 안 된 첩과 함께 단꿈에 빠져 있었다.
돌연 서늘한 바늘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자 그는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뜬 객잔 주인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침상 곁에서 냉랭히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은…….”
노인이 소리를 지르려는데 눈앞이 번뜩이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소리칠 것 없다. 객잔 내에는 수사가 없어도 성 내의 다른 이들이 알아채면 안 되니까 말이야. 일단 이것을 보거라.”
어둠 속의 그림자가 은빛이 찬란한 열쇠를 객잔주인에게 보였다. 열쇠를 본 객잔주인은 몸을 떨더니 한결 편해진 얼굴로 반가운 기색을 드러냈다.
당연히 객잔주인의 방에 숨어든 자는 한립이었다.
객잔주인은 서둘러 침상에서 뛰어 내려와 무어라 벙긋거렸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한립이 미소 지으며 손을 저으니 은색의 무언가가 그의 목에서 빠져나왔다. 가느다란 은색 침이었다.
“제가 열쇠를 자세히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한립은 객잔주인의 물음에 열쇠를 던져주었다. 노인은 그것을 꼼꼼히 확인하고는 공손히 두 손으로 한립에게 열쇠를 돌려주고 허리를 숙였다.
“첫째 도련님이신지요?”
“열쇠를 확인하고도 나를 의심하는 것이냐?”
한립은 물음에 답하지 않고 반문했다.
“아닙니다. 열쇠를 가지고 저를 찾아오신 분의 신분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지요. 다만…….”
노인이 자기도 모르게 침상 위의 첩을 힐끔거렸다.
“너를 깨우기 전에 법술로 깊이 잠들게 하였으니 네가 귓가에 대고 고함을 질러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렇군요. 가주님께서 몇 년간 연락이 끊겨 걱정이 많았습니다. 괜히 소식을 묻고 다니다가 다른 수사님들의 주의를 끌까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었고요. 오늘 도련님께서 이리 찾아 주시니 마음이 한결 편합니다.”
“풍 가에 일이 생겨 비밀동굴을 열어 몇 가지를 꺼내가야겠다. 비밀동굴의 위치는 가주님을 제외하면 네가 지닌 지도로만 알아낼 수 있겠지. 가져 오거라!”
한립이 거침없이 분부를 내렸다.
“예! 열쇠를 지닌 도련님께서는 비밀동굴을 개방할 자격이 충분하십니다. 바로 다녀올 터이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객잔 주인은 서둘러 의복을 걸치고는 한립을 데리고 방을 나와 객잔의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의 담벼락 밑을 노인이 곡괭이로 파내 평범해 보이는 푸른 벽돌을 파냈다.
노인이 땀을 닦으며 한립을 향해 돌아섰다.
“지도는 이곳에 봉인되어 있습니다. 금제가 걸려 있어 저는 열 수 없으니 도련님께서 푸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야 당연하지. 너는 이제 이곳에 남아 있지 말고, 즉시 멀리 떠나 이름을 바꾸고 살거라.”
“정말 풍 씨 문중에 큰일이 나기는 하였나봅니다. 도련님 걱정 마세요! 며칠 내로 짐을 챙겨 바로 떠난 후에도 도련님에 대해서는 함구할 것입니다.”
객잔노인은 얼굴이 어두워졌지만 주저 없이 대답했다.
“우리 가문에 충심을 다했으니 이것을 가져가거라. 이 단약들을 복용하면 건강한 몸으로 장수할 수 있을 것이야.”
한립이 벽돌을 회수하고 노인의 표정을 보더니 푸른 약병을 꺼내 주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난 일이 있어 즉시 떠나야 하니 앞으로의 일은 알아서 하거라.”
한립은 무표정하게 이르고는 푸른빛으로 변해 사라졌다.
노인은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다가 한립이 떠난 것을 확인하고는 손에 든 약병을 쳐다보았다.
한참 후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립은 열래객잔을 나서자마자 바로 설강성을 빠져나와 아무도 없는 황산으로 향했다. 그는 손바닥을 뒤집어 푸른 벽돌을 꺼내들었다.
벽돌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피던 한립은 한 손가락에 푸른 기운을 일으켜 벽돌을 찔렀다. 그러자 하얀 영기의 빛이 번지며 파문이 일었다.
그는 만족스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벽돌은 ‘풍악’이라는 가명을 쓰던 풍 가의 장손, 풍침의 말대로 일반적인 물건이 아니었다. 저물대와 비슷한 법기는 따로 적합한 법결을 익혀서 열어야 했고 강제로 열려고 하면 안의 내용물이 재로 변해 사리지게 되어 있었다.
낮게 주술을 외던 한립이 입을 벌려 푸른 기운을 내뿜었다. 이어 수결을 맺으며 벽돌의 몇 곳을 손끝으로 찌르자 ‘펑’ 소리가 울리며 벽돌 표면에 원형의 새까만 구멍이 생겨났다.
한립은 바로 손을 집어넣지 않고 푸른 기운을 이용해 그 안에서 두 가지 물건을 꺼내었다. 옥간과 잡다한 문서 묶음이었다.
그는 일단 옥간에 의식을 불어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비밀동굴의 위치가 적혀 있지 않은 것이더냐?”
대연 신군이 이를 감지하고 의식 속에서 물어왔다.
“위치는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그럼 왜 그러느냐?”
“풍 가가 비밀동굴을 설릉산맥 깊숙한 곳에 만들어 놓았더군요.”
“그곳에서 자주 수사들이 실종된다는 것을 모르고 그랬을 리도 없고…….”
한립의 대답에 대연 신군도 의아해했다.
“누가 알겠습니까. 그런 곳일수록 보물을 숨기기에 더 안전하다고 여겼을 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비밀동굴로 이용하는 곳이라면 그리 위험한 곳은 아닐 것이니 너무 염려 말거라.”
“그러기를 바라야지요! 지도까지 얻었으니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한번은 가봐야겠습니다.”
한립은 옥간을 회수하고 문서묶음을 들추다가 깜짝 놀랐다.
“이것은 속세의 재산과 토지소유를 증명하는 서류들 아닙니까? 이 정도면 웬만한 갑부 못지않겠습니다.”
“그게 이상하더냐? 대진 세가들과 천남의 수도가문들은 상당히 다르다. 대진이 광활한 영토를 지녔지만 인구수도 많아 대부분 영석의 산지 등이 황무지가 아니라 범인들이 거주하는 곳에 분포하고 있지. 그래서 속세의 조정(朝庭)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천남과 달리 대진의 수사들은 정부 고관이나 거부(巨富)가 아니더라도 자주 범인들과 교류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것이지.”
“대진의 왕이 그렇게 많은 수선 자원을 차지하는 것을 다른 종문들이 허락했다는 말입니까?”
한립은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허락이 필요할 리가! 대진은 여러 국가들이 난무하는 천남과 달리 고대부터 지금까지 강력한 하나의 조정이 속세를 통치해 왔다. 수도자들이 아무리 대단해도 공공연하게 범인들을 해칠 수 없지.
속세에서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다른 종문의 세력들이 그것을 꼬투리 잡아 가만 두지 않거든. 대진 조정은 수도계의 거대 세력이 합의를 걸쳐 만들어낸 것이라 누구도 함부로 압력을 가하거나 조종하려 들 수 없다. 심지어 속세 조정의 위엄을 유지하기 위해 관부에서 산수들을 모집하거나 대진 황실에서 일정 수량의 궁정수사(宮庭修士)를 배양할 권리도 인정하고 있지. 물론 수사들이 그 수가 초과하지 않도록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기는 하지만.
수도계도 몰래 속세의 자원을 모으고 왕족이나 조정 고관과 교분을 쌓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지만 다른 세력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문하의 세가들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미 대진에서는 공공연한 일인데 이 문서들을 이렇게 숨겨 놓은 것을 보니 수선 자원과 연관된 것일 가능성이 높구나.”
대연 신군은 자신이 아는 바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고 한립은 뜻밖의 정보에 턱을 쓸었다.
“이렇게 중요한 자산을 이곳에 따로 빼놓은 것을 보면 풍 가 가주가 무언가를 알아차리고 미리 후대를 위해 준비해 둔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와 아무 상관없지 않더냐? 어서 비밀 동굴로 가서 살기를 해결할 불가 공법이나 찾거라.”
“맞는 말씀입니다.”
한립이 씩 웃고는 문서들을 옥함에 담고는 설릉산맥으로 날아갔다.
* * *
설릉산맥 지하의 묘실 안에는 녹색 기운으로 덮인 두 인영이 세 개의 석관 앞에 서 있었다. 갑자기 중간의 석관에서 녹색빛 두 개가 빠져나와 각각의 머리로 흡수되었다.
“가거라! 그 놈을 죽이고 보물을 찾아와.”
사내의 음산한 명이 떨어지자 두 인영은 순식간에 녹색 빛줄기로 변해 석실을 빠져나갔다.
“이미 금강조를 가져간 수사의 외모를 화신들에게 알려주었고 한동안 왕이의 기운이 남아 있을 터이니 금방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부왕!”
석관 중 하나에서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봐주겠지만 다음번에는 멋대로 행동하지 말거라.”
“예! ……다음……에는 절대!”
이렇게 묘실이 다시 고요해졌는데 돌연 ‘펑’ 하는 소리가 나고 중간 석관 뚜껑을 박차고 마른 인영이 나타났다.
“대왕 무슨 일이신지요?”
“지하에 흐르는 음기가 폭증하는 때가 되었소. 잠시 묘실을 떠나도 수행이 크게 줄지 않을 테니 과 장군의 도움을 받아 나머지 두 세가의 주요 인물들도 처리해야 할 때요! 내가 떠나면 묘실의 금제를 모두 펼쳐 아무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오.”
“예, 대왕! 대왕도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여인이 주저하다가 걱정 어린 당부를 했다.
“기껏해야 하루 이틀이면 끝날 일이니 다시 묘실로 돌아오면 이후에는 외출을 삼가겠소.”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영이 흐릿해져서 회색 기운으로 변해 사라졌다.
* * *
한립이 설릉산맥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뜨기 시작했다. 그는 주저 없이 안으로 뛰어들어 법기를 타고 저공비행을 시작했다.
혹시 번거로운 일에 말려들까 기운을 완전히 숨기고 의식을 방출해 몇 리 밖까지 살피는 등 최대한 몸을 사리고 있었다.
풍 가의 밀실은 산맥 중심부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었다. 하루 동안 산맥을 돌아다닌 끝에야 한립은 작은 산봉우리 아래에서 수백 장 크기의 거대한 폭포를 발견했다.
옥간에 기재된 그대로였다. 떨어져 내리는 물결을 바라보며 그는 수결을 맺어 푸른빛을 날렸다.
쿠쿵.
둔중한 울림이 있고 폭포 물결이 갈라지며 직경 한 장 가량의 거대한 동굴이 드러났다.
한립은 즉시 법기를 재촉해 그 안으로 들어갔고 이후 폭포는 제 모습을 되찾아 쏟아져 내렸다.
그가 동굴에 들어간 순간 폭포 천리 밖에서 녹색 기운으로 뒤덮인 두 인영이 그의 종적을 놓치고 광분하고 있었다.
그들은 날카로운 이빨과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내었는데 그 모습이 포악한 맹수를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두 인영 몰래 또 다른 두 수사가 몇 리 밖에서 숨어 무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