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3
513화. 비침(飛針)
‘온석? ’
한립이 고개를 돌리니 그의 옆에는 두 여인이 앉아 있었다.
노란색과 녹색 의복을 걸친 이들은 빼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기 좋은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그 중 한립과 비교적 가까이 자리한 녹색 의복의 여인이 그에게 말을 걸어온 것이다.
“수사께 결례를 범했습니다. 이쪽은 제 종매인데 처음 유람을 나와 분별이 없습니다.”
노란 의복의 여인이 서둘러 미안한 기색을 보였다. 한립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하, 괜찮습니다. 이전에 온옥(溫玉)에 대해서는 들어보았지만 확실히 온석은 처음 봅니다. 이것에 대해 혹시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쉽게 볼 수 있는 재료는 아닌 듯 한데요.”
“온석은 온옥과 같이 거론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지요. 다만 설릉산맥의 특산품 중 하나가 이 온석이라 다른 지역에서 오신 수사께서는 모르실 만도 합니다. 새하얗고 온기가 느껴진다는 것을 제외하면 특이한 점이 없어서 속세에서나 귀한 물건입니다.”
노란 장포의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랬군요. 자세히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립은 감사의 뜻을 전하고는 다시 정자세를 하고 앉아 무대 위의 중년인이 꺼낸 최상급 법기를 바라보았다.
녹색 장삼을 걸친 여인이 곁눈질을 하며 아쉬워하는 기색이었으나 사촌 언니의 엄한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세가에서 마련한 경매회에 그가 눈독들일 만한 물건은 나오지는 않았지만 대진의 물가와 천남의 물가를 비교하기에는 좋은 기회였다.
대진은 천남보다 영약과 법기 가격이 높은 편이었다. 대진의 면적이 천남의 열배라지만 수도자의 수는 열 배를 훨씬 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건이 다양해 천남은 물론이고 난성해에서도 보지 못했던 영약과 제련용 재료들이 많았다. 몇몇 최상급 시장들을 돌면 필요한 재료들을 구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을 듯 했다.
이런 생각에 하고 있을 때 무대 위의 중년인이 새로운 쟁반을 내왔다. 쟁반 위의 짙은 붉은색의 수정은 안에서 불이 타오르는 듯 아름다운 색을 자랑했다.
“화용정(火熔晶) 세 알입니다. 불 속성 법기를 제련하는데 가장 좋은 재료이니 영석 5백 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별 생각없이 수정을 살피던 한립이 갑자기 눈을 빛냈다.
“녀석아 왜 그러느냐? 저런 수정 몇 개가 무엇이라고.”
대연 신군이 나른하게 전음을 보내왔다.
“수정이 아닙니다. 선배께서도 실수를 하실 때가 있군요.”
한립이 가볍게 웃으며 즉시 영석 6백 개를 제시하며 경매에 참여했다.
“노부가 수행은 남아 있지 않아도 의식은 그대로인데 그럴 리가.”
“경험과 지식으로 본다면 선배님께서 당연히 앞서시겠지만 요단에 한 해서만은 제가 독보적이라고 자신합니다. 저만큼 요단에 대해 잘 아는 이는 몇 되지 않을 테니까요.”
“요단? 하지만 노부는 물론이고 경매회 전에 물건을 감별하는 자도 경험이 풍부할 텐데 어찌 실수를 할까.”
대연 신군이 의심스러워하자 한립은 그저 웃으며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해 다른 경쟁자를 앞서나갔다.
“좋습니다. 영석 800개에 화용정 세 알은 243번 수사께 돌아갑니다. 무대 뒤에서 영석을 내시고 물건을 찾아 가시기 바랍니다.”
중년인 사내가 화용정이 시가 보다 훨씬 비싸게 팔리자 신이나 큰 소리로 외쳤다. 한립이 옥판을 들고 일어나 작은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곳에서 하얀 장포를 걸친 연기기 수사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한립이 자리를 잡고 앉자 여자 수사가 영차 한 잔을 내오고 돌아갔다.
한립은 영차는 건들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머리가 벗겨진 축기기 노인이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물건이 맞는지 확인하시지요!”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쟁반을 내밀자 한립은 쟁반을 받아 한참동안 수정을 살폈다.
“화용정에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찾던 것이 맞습니다.”
한립은 수정을 회수하고는 물러났다. 노인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다시 경매회로 돌아온 한립은 손바닥을 뒤집어 화용정 한 알을 꺼내보더니 꽤나 만족한 듯 미소를 띠었다.
“영석을 8백 개나 주고 화용정 세 알을 구입하시다니 씀씀이가 호방하시네요.”
곁에 있던 녹색 장삼 여인이 그의 표정을 보고는 참지 못하고 말을 붙였다.
“제가 오래 찾던 것이라 지불한 영석이 아깝지 않군요.”
한립이 슬쩍 그녀를 보고는 손바닥을 뒤집어 수정을 회수했다.
녹색 장삼 여인은 한립의 눈에서 푸른빛이 번뜩이는 것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때 의외의 수확에 기분이 좋아진 한립을 향해 대연 신군이 물어왔다.
“그래서 그것과 요단이 대체 무슨 관계라는 것이냐?”
“예상하셨겠지만 화용성 세 알 중 하나가 사실은 7급 요수의 내단입니다. 다만 오래 방치되어 전신이 수정처럼 변한 것이지요. 아무리 의식이 강력해도 쉽게 알아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7급 요수의 요단? 의식으로 알아낸 것이 아니라면 너는 어찌 알아본 것이냐?”
“말씀 드리면 제 몸의 살기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전에 수천 마리에 이르는 고계 요수를 죽여 이렇게 농염한 살기를 품게 된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살기는 요단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게다가 오랜 세월 수많은 요단을 제련해 보았기에 저만의 판별 비법도 있고요.”
“그렇게 많은 요수를 죽였다면 네 몸의 살기도 이해가 되는 구나.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것 같은데? 아직 노부에게 숨기고 있는 것이 많은 모양이지?”
“그럴 리가요. 그저 이전에 겪은 사소한 일일 뿐이지요. 그나저나 이 수정화 된 요단인 정화요단을 어디에 쓰는지 아십니까?”
한립은 난성해에서 있었던 일을 노괴에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정화요단이라는 말도 처음 듣는데 용도를 어찌 알겠느냐.”
대연 신군이 얼른 미끼를 물고 호기심을 드러냈다.
“수정처럼 변한 요단은 이미 진정한 요단이라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만일 이것으로 단약을 제련하면 반드시 기이한 독을 함유하게 되지요. 십절독에는 미치지 않아도 평범한 수사라면 복용하는 순간 죽을 것입니다. 이것을 활용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비침 형태의 법보를 제련하는 것인데 속도가 극히 빠르고 공격을 가할 때 영기의 빛을 숨길 수 있어 암습을 하기에 좋지요. 다만 요단이 이렇게 변화할 가능성이 극히 낮고 알아볼 수 있는 방법도 딱히 없어 저도 살기를 지니지 않았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겁니다.”
한립은 턱을 쓸며 정화요단을 이용한 제련 방법이 적힌 옥간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 옥간은 난성해에 있을 때 그의 손에 죽은 수사들 중 하나에게 얻은 것으로 그저 흥미로운 내용이라고 생각해 챙겨 놓았는데 이렇게 보기 드문 제련 재료를 구할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보아하니 천하에 아직 내가 모르는 것이 허다하구나. 하긴 어느 수사가 인계 전체를 다 돌아다녀 보았겠느냐. 내가 알기로 천남과 같은 수도계가 적어도 대여섯 곳은 넘는데 나는 그 중 대진을 제외하면 두 곳 정도를 가보았지.”
대연 신군은 조금 활력을 잃은 것 같았다.
“생사와 윤회는 누구나 겪는 일입니다. 영계로 승천한다고 해도 속박을 피할 수는 없겠지요. 아마 정말 이 세상과 수명을 같이하는 이들은 선계의 선인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사실이구나. 다시없을 자질을 타고 났는데 뜻밖에 꼭두각시의 몸에 숨어 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신세가 되다니. 한번만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화신기에 드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대연 신군이 회한에 가득차 중얼거리더니 결국에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에 한립도 왠지 처량해졌다.
극서 지역 일대를 총괄하던 한 종파의 주인이었던 노인은 천남에 적수가 없던 시절도 있었을 것이다. 단지 화신기에 들지 못했기에 이런 비참한 처지가 되었다는 것에 마음이 무거워진 것이다.
대연 신군의 현재 모습이 자신의 미래가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경매회는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고 갈수록 귀한 물건이 나왔지만 한립의 눈에 차는 것은 없었다. 그는 마지막 몇 가지 보물과 영약이 등장하기도 전에 그곳을 빠져 나왔다.
그는 석전을 빠져 나와 누각 사이를 천천히 걸어갔다.
가끔 다른 수사들과 거래를 하는 세가 제자들이 보였지만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아주 외진 곳에 이르러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한 누각 앞에 하얀 장포를 입은 축기기 수사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한립이 의식을 퍼트려 보니 수십 장 내로는 별 다른 금제나 다른 수사들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주저 없이 방향을 틀어 그에게 걸어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흉악한 생김새의 거한은 한립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놀라 물었다.
“공 씨 가문 수사십니까?”
“그렇습니다. 공 씨 가문에서 외당집사(外堂執事)를 맡고 있는데 수사께서는…….”
거한이 한립의 허리춤에 잔뜩 걸린 영수대와 저물대를 보고 상대가 평범한 산수는 아니라고 판단해 공손히 대답했다.
“사정이 있어 귀 가문의 가주님을 뵙고자 하는데 연락을 취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가주님을 뵙고 싶으시다고요? 그건 아무래도 어렵겠습니다. 저희 가주께서는 중요한 일 때문에 외부인과의 접촉을 삼가고 계시는 중이라서요. 일단 제게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막 경매회에서 나오는 길인데 물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말입니다.”
한립이 고의로 의심스럽다는 기색을 드러냈다.
“경매회에 관한 문제라면 그곳을 담당하는 수사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면 됩니다.”
“그럴 사안이 아니라서요. 수사께서 제가 낙찰 받은 물건을 보시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한립이 저물대로 손을 옮겼다. 거한도 경험이 풍부한지 순간 경계하며 자신의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지만 한립이 붉은 수정 한 개를 꺼내자 긴장을 풀었다.
“이것은 화용정이군요. 이런 일로는 가주님을 뵙기는 어려우실 겁니다.”
그가 설명을 하며 수정을 받아 들었는데 그 순간 희미한 푸른빛이 수정의 표면을 타고 날아들었다. 지척에서 피할 길이 없는 공격이라 거한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한립은 소매를 털어 푸른 기운으로 감싸인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들고는 근처의 누각으로 들어갔다.
* * *
누각의 제일 구석진 방으로 들어가 꽁꽁 얼어붙은 거한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얼음 속의 거한은 두 눈을 부릅뜨고 공포에 질려 있었다.
한립이 한 손을 뒤집어 은색 침을 두 개 꺼내 거한의 머리를 향해 날렸다. 거한의 눈에서 빛이 점점 가시더니 몽롱한 시선으로 변해갔다.
주술을 외며 법결을 날리자 거한의 몸에서 한기가 가시고 꼭두각시처럼 스스로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한립이 소매를 털어 다양한 색깔의 진법 깃발을 분출하자 진법 깃발들은 기운을 숨기는 결계를 펼쳤다. 이후 그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거한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한립이 다섯 손가락을 펼쳐 거한의 머리에 기운을 쏟아 부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고, 공 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지?”
“공두. 외당집사!”
“공 가가 차지한 준운진(隼雲鎭)에 살던 주민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7년 전 그곳에 살던 범인들은 백리 밖 설강성으로 옮겼습니다.”
“공 가가 이번에 삼왕회를 연 목적이 무엇이냐?”
“…….”
이런 일문일답을 통해 한립은 상대에게서 대강의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가 손가락을 거두자 거한은 즉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한립이 단약을 하나 꺼내 그의 입 안에 밀어 넣고는 은침으로 몇몇 혈도를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