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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512화 (269/2,000)

# 512

512화. 시왕(尸王)

천리 밖 어느 묘실 안, 세 개의 석관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거대한 석실은 백여 장은 되었고 사방의 벽에 수많은 상고시대 벽화가 새겨져 있었고 각 모서리마다 놓인 청동 항아리에서 녹색화염이 활활 타올라 어둠 을 비추었다.

갑자기 왼쪽의 석관에서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펑!

두꺼운 석관 뚜껑이 몇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관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왕아, 무슨 일이기에 그리 성을 내는 것이냐!”

중간 석관에서 중년 남자가 중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저의…… 이, 일부…… 분신이…… 사라졌습니다.”

검은 기운 속의 커다란 인영은 말을 배운 앵무새처럼 떠듬떠듬 말했다.

“분신이 사라졌다면 화신에 문제가 생긴 것이로구나. 그래도 상관없다. 네 부왕께서 전수해주신 명하천시결(冥河天尸決)을 계속 수련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대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이야. 그리 분노하다니 아직도 스스로를 통제하기 어려운 것이냐.”

나머지 조금 작은 석관 속에서 달콤한 여인의 목소리가 유유히 퍼져 나왔다.

“허, 허나……저의……금강……조가!”

커다란 검은 그림자가 두 손을 모으고 중얼거렸다.

“금강조! 지난번에 깨어나 늙은 중을 죽이고 그 사리를 이용해 제련한 금강조 말이냐?  네 대신 거의 제련을 마치고 넘겨주었거늘 아직도 주인을 인식시키지 못한 것이냐?”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그게…….”

검은 기운 속의 인영이 상대의 질책에 당황해 일순 할 말을 잃었다.

“대왕, 왕이의 탓이 아닙니다.”

제일 작은 석관이 ‘삐그덕’ 하며 뚜껑이 열리고 매혹적인 자태의 신영이 나타났다.

“그게 무슨 말이오, 부인. 설명을 해주시오. 금강조는 굉장히 구하기 힘든 보물로 왕이의 법력이 낮아 호신용으로 넘겨주지 않았다면 벌써 제련해서 내가 사용했을 것이오.”

여인의 목소리가 잠시 주저하다 탄식하듯 말했다.

“몇 년 전 대왕이 깊은 잠에 빠지신 사이, 왕이가 홀로 지상에 달빛의 기운을 빌려 그 보물을 제련하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금제가 풀린 틈을 타 외부 수사들이 침입했지요.

어쩔 수 없이 왕이는 운공을 멈추고 그들을 공격하려 했고 그 중 한 명이 영특하게도 시왕 신분을 알아보고는 바로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였습니다. 금제를 걸어도 좋으니 목숨만은 살려 달라는 것이었지요. 왕이가 보기에 그 자가 쓸 만하다고 여겼는지 그때부터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금강사리와 무슨 상관이오?”

“노여움을 푸시지요. 문제는 상대가 왕이에게 외부 수사들의 원신을 힘들이지 않고 모을 방법을 제안했다는 것입니다.”

“무엇이오?”

“그는 왕이에게 신기한 보물에 의식 한 줄기를 담아 내줄 것을 청했습니다. 홀로 다니는 산수를 유혹해 그들이 왕이의 무덤으로 직접 찾아올 수 있게 하겠다고 했지요.

그들이 정말 찾아온다면 죽이면 되고,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분신을 이용해 보물에 숨겨둔 금제를 발동하면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분신이 죽은 수사의 원신을 데리고 무덤으로 돌아올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런 보물은 반드시 신기하고 보기 드문 데다 왕이의 분신과 시화 그리고 시기(尸氣)까지 완전히 감출 수 있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소. 왕이는 아직 주인을 인식시키지 않은 금강조를 내준 것이로군. 사리의 불성으로 강시의 기운을 완전히 가려주었을 테니까.”

사내가 여인의 말을 끊으며 냉랭히 말했다.

“예, 대왕의 말씀 대로입니다. 주인을 인식시키면 금강조도 더 이상 강시의 기운을 감춰 주지 않았기에 그랬던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왕이의 수련에 수사들의 혼백이 대량으로 필요해서 위험을 무릅쓸 수밖에 없었지요.

제가 그 자에게 절대 결단기 이상의 수사들은 건드려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해서인지 몇 년 간은 순조롭게 적잖은 이들이 스스로 찾아와 혼백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슨 실수를 한 것인지 보물을 빼앗기고 왕이의 분신을 잃게 하다니 금제를 발동해 그 자의 원신을 잡아다 심문해봐야 겠습니다.”

여인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그런 식으로 수사들의 혼백을 얼마나 모을 수 있겠소?  이미 과 장군과 일을 도모하는 중이니 성공만 한다면 수사들의 원신을 끝도 없이 사용할 수 있을 것이오. 불가 종문의 수도자들의 주의를 끌 필요도 없고 말이지.”

“몇 년 전 대왕께서 과 장군과 무덤을 잠시 떠나셨다 홀로 돌아오신 것이 그 때문이셨습니까?”

“그렇소. 과 장군은 벌써 다른 누군가로 변해 어떤 수선세가를 장악하고 있소. 심지어 신분을 숨기기 위해 다른 세가들과 연합해 불가 종문을 계승하는 가문 하나를 몰살시키기도 했지.

무언가를 눈치 챈 가주가 불가 종문으로 소식을 전하려 하기에 내가 친히 나서 그들 내부의 결단기 이상 수사들을 멸살하고 과 장군이 다른 수사들을 이끌고 그곳을 피바다를 만들어 버렸소.”

“그럼 대왕의 계획은…….”

사내가 한동안 음산하게 웃자 여인이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저번에 방문했던 방첨산(方尖山) 천풍 진군이 제안한 것인데 그도 이런 식으로 몰래 움직였지만 아직까지 뒤탈이 없다고 하오. 조심하기만 하면 적어도 2, 3백 년간은 수사의 원신을 찾으려 고생할 필요도 없고, 일이 틀어지더라도 묘실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되지 않겠소?  대진에 몇몇 노괴들을 제외하면 나를 막을 자가 얼마나 되겠느냐는 말이오.”

“천풍 신군의 속내가 간단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자신의 비밀을 대왕에게 알려주다니 다른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른 속셈이야 당연히 있었소. 겨우 입을 놀려 정보를 준 대가로 본 왕에게 혈심환을 세 개나 받아 갔다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습니다. 방첨산 쌍마는 평판이 좋지 못하니까요. 혹시 대왕을 묘실 바깥으로 유인하려는 것은 아니겠죠?  저희 셋은 원신과 생명이 모두 이 무덤과 융화되어 있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저희에게 부상을 입힐 자가 손에 꼽히지 않습니까.”

“부인의 말대로 미리 대비는 해야 하오. 그래서 이번에는 묘실의 금제를 전부 개방하고 외출을 할 때에는 조용히 움직여 그들이 내가 무덤을 빠져 나왔다는 것을 모르게 해야 하오.”

“대왕께서 경계를 하고 계시다니 다행입니다. 사실 대왕께서 친히 나서실 것도 없지요. 무엇이든 신첩과 몇몇 화신들을 시키시면 될 일입니다. 어쨌든 대왕께서만 무사하시면 저야 어떤 강적을 만나도 대부분 대왕의 체면을 고려해 줄 테니까요.”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매혹적으로 변했다.

“부인이 모르는 것이 있소. 이번 계획을 성공하려면 반드시 관녕부의 세가들을 손에 넣어야 하는데, 지난 번 공 노괴를 죽이려다가 가벼운 부상을 입고 말았소. 그래서 아직 다른 두 가문은 건드리지 못한 것이지. 나머지 두 가문은 원영기 수사는 없지만 우리와 같은 이류에 상극인 몇몇 이보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만만치 않소. 아마 그 두 가문의 배후 종문도 본 왕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제자들을 파견해 세가를 세운 것인지도 모르지. 본래는 본 왕의 동태를 감시하려했겠으나 세월이 천여 년이나 지났는데 누가 그것을 기억하겠소?

본 왕이 나서서 이들을 일망타진하면 다른 종파들이 알아채기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르는 일이오. 일이 잘 해결되면……. 조만간 인류(人類) 수사의 혼백을 모아 마지막 경지를 돌파하고 천시지체(天尸之體)를 완성할 것이오!”

“신첩 미리 경하 드리옵니다. 천시지체를 제련하는데 성공하시면 묘실을 벗어나 더 이상 이곳에 구속받을 필요가 없지요.”

“허허, 그때가 되면 본 왕이 당신과 왕이 역시 이혼술을 써서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주겠소.”

여인이 그의 말을 듣고 기뻐했다.

“그러나 대왕! 금강조는 그래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제련에만 성공하면 단시간에 금강불의 몸이 되지 않습니까. 노승과 싸우실 때 그 자가 사리를 발현하자 아직 금강조의 형태를 갖추지도 못했는데 대왕의 시화(尸火)를 사흘 밤낮으로 견뎌냈던 것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금강조 같은 보물은 만년 시왕인 우리만이 달빛의 힘을 빌려 제련할 수 있소. 인류 수사는 꿈도 못 꿀 일이지. 천하에 만년 시왕은 본 왕을 제외하면 만요곡 부곡주인 그 만년 시웅(尸熊) 뿐 아니오. 만요번(万妖幡)이 있는데 인간 수사가 감히 만요곡에 갈 수 있겠소?”

“그렇기는 합니다. 하지만 저희에게 쓸모가 큰 이보인 것은 사실이니 어떤 자의 수중에 있는지 알아내는 대로 수하를 파견해 빼앗아 와야겠습니다.”

“금강조에 실린 왕이의 분신을 거두어간 것만으로도 상대가 일반적인 수사는 아니라는 뜻이오. 보물의 행방을 알게 되면 화신 두 명을 내보내리다. 원영 중기 이상의 수사만 아니라면 충분하겠지.”

“저……도 가겠습……니다.”

검은 기운의 커다란 인영이 사내와 여인의 말소리를 듣다가 끼어들었다.

“전신의 시기를 숨기지도 못하는 녀석이 어딜 나가겠다는 것이냐. 수사라면 누구라도 네 정체를 알아볼 것이다. 헛소리 말고 다시 들어가 수련에나 정진하거라.”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꾸짖었다.

커다란 인영이 그 말에 낙담해서는 멀리 날아간 뚜껑을 불러들였다. 그 순간 눈이 핏빛으로 빛나며 사나운 기운이 일렁이었다.

* * *

수천 리 밖 한립은 자신이 이런 큰 화를 불러들인 줄 모르고 있었다. 금색 거품 속의 제혼을 응시하는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그때 광장을 벗어나 자신의 처소로 돌아간 금원은 ‘푹’ 하는 소리가 울리고 순식간에 회색 화염 속에서 재로 변해 소멸되었다.

그 원신은 무언가에 의해 끌려가듯이 화염에 싸여 주먹만 한 빛덩이로 변해 창문을 뚫고 날아갔다.

천기옥 내부의 한립은 제혼이 시화를 제련하는 일이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자, 결국 금강조와 제혼을 함께 영수대에 넣어버렸다.

대청으로 나와 중년 여인에게 천기옥을 돌려준 한립은 광장으로 향했다.

오후가 되자 광장의 수사들은 대부분 또 다른 석전에 들어가 경매회에 참가한 듯 했다.

그도 주저하지 않고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석전 앞에 하얀 장포를 입은 수사 두 명이 그를 보고 인사했다.

“경매회에 참석하시려면 영석 3개를 지불하셔야 합니다.”

한립이 피식 웃고는 저물대를 스쳐 저계 영석 세 개를 건네주었다. 두 수사가 미소를 지으며 영석을 받은 후 그에게 옥으로 만든 손바닥만 한 판자를 내주었다.

한립이 옥판을 손에 들고 보니 ‘243’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긴 통로를 지나자 다시 네 명의 수사가 지키고 있는 문이 나왔는데 그들은 한립을 훑어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립도 그들을 개의치 않고 문을 열고 석전의 대청으로 진입했다.

“오백년 된 봉미화(鳳尾花), 790영석! 더 높은 가격 없으십니까?  그럼 이 영약은 저 분에게 돌아갑니다. 130번 수사께서는 뒤쪽에 영석을 수납하시고 물건을 찾아 가시면 됩니다.”

자세히 보니 대청 안에는 2, 3백 명의 수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탁자 위의 숫자가 적힌 옥판을 내려놓고는 무대 위의 푸른 장포 중년인을 주시했다.

한립은 차분히 안을 둘러보고는 빈자리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걸어갔다.

눈처럼 새하얀 탁자는 옥으로 만든 것 같았지만 진짜 옥은 아니었다. 흥미가 생겨 탁자를 만져보니 은은하게 온기가 감돌았다.

“이것은…….”

한립은 자신이 기억하는 옥석 종류를 떠올리며 비교를 해보았지만 일치하는 것이 없었다.

“온석(溫石)을 처음 보세요?”

어디선가 웃음기가 묻어있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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