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1
511화. 거대 묘지
“대연 선배님, 이런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한립이 미간을 좁히고 한참 고민하다 대연 신군에게 전음을 보냈다.
“흠, 나라고 뭐 세상 만물을 다 아는 줄 아느냐. 나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거다. 허나 네 의식의 침투를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이보라 불릴 만 하구나. 상대에게 어떻게 이것을 구했는지 상세히 물어보고 거둘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거라.”
대연 신군의 친절하지 않은 대답에 한립은 피식 웃으며 의식을 회수했다. 그리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거품이 담긴 옥함을 탁자위에 돌려놓았다.
“어떤 물건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경험이 일천하여 알아볼 방법이 없군요.”
“한 형도 모르신다는 겁니까? 그래도 방금 이상한 현상이 일어난 것을 보고 용도를 알아내셨나 했습니다.”
“조금 전 일어난 현상은 대량의 의식으로 보물을 감싸서 벌어진 것입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보라고 불릴 만한 것은 맞는 듯하군요.”
“그렇습니까?”
노인이 반신반의하며 자신의 의식을 이용해 실험해 보았다.
한참이 지나 과연 거품이 아까처럼 금빛으로 빛나며 미세하게 크기가 줄었다 늘었다 했다.
노인은 길게 숨을 토해내며 피곤한 기색으로 두 눈을 감고 있다가 잠시 뒤에야 눈을 떴다.
“우스운 꼴을 보였습니다. 한 형은 의식이 정말 강대하십니다 그려.”
금원이 부럽다는 듯 한립을 보았다. 한립은 그저 웃으며 무어라 반박하지 않았다.
“금 형, 이것은 어찌 얻으신 겁니까? 혹시라도 말하시기 불편하시면 이야기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뭐 비밀도 아닌 것을요. 오히려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도 수사께서 믿지 않을까 걱정이구려.”
금원이 조금 머뭇거리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말씀해주시면 물건의 내력을 알게 되어 떠오르는 바가 있을 지도 모릅니다.”
“사실 숨길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것을 얻으려다 목숨을 잃은 벗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습니다.”
뜻밖의 숨은 사연에 한립은 잠시 놀랐지만 상대가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것을 알고 조용히 기다렸다.
“수사께서도 예상하셨겠지만 노부는 흙 속성 공법을 수련한 산수입니다. 다른 실력은 몰라도 태생적으로 토령지체를 타고나 토둔술에는 상당히 뛰어난데 영근 자질이 부족하지만 않았어도 여러 문파에서 이 노부를 제자로 거두려 하였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하며 노인이 안타깝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그리하여 어느 정도 수행에 이르러서는 자주 황산이나 오지를 탐색해 상고수사의 동부를 찾고는 하였습니다. 상고수사의 유적을 찾아내 하루아침에 수행을 늘리고 기연을 얻고자 한 것이지요. 하지만 상고수사의 동부를 찾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아무 소득도 없었다고 하면 거짓이겠으나 공을 들인 시간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들뿐이었습니다. 그러다 3년 전…….”
금원이 다시 말을 멈추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3년 전, 절친한 벗이 노부에게 상고수사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했다고 알려왔습니다. 저의 토둔술을 이용해 무덤을 탐색을 해보자는 것이었지요. 저는 기뻐하며 약속된 일자에 그를 찾아갔는데 다른 수사들도 여럿이 모였더군요. 이번 탐사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역시 상고수사의 무덤에 들어가고 나서야…….”
노인의 목소리가 점점 떨려왔다.
“……들어가고 나서야 그곳이 상고시대 때 명성이 자자했던 어떤 제왕의 묘인 것을 알아냈습니다. 잔인하기로 이름 높았던 현엽왕은 대단한 인물이었지요. 하지만 우리는 크게 낙담했지요. 아무리 범인들 중에 유명한 인물이라고 해도 수도자에게는 의미가 없는 존재였으니까요.
그런데 무덤의 주요 묘실에 들어가자 수도자들이 썼던 진귀한 재료들과 법기들이 같이 매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행들은 크게 기뻐하며 보물을 챙기려 했는데 그때 곁에 매장된 시체들이 일어나 강시로 변해 달려들었습니다. 법기든 비술이든 강시의 단단한 몸에 상처를 낼 수가 없더군요. 대부분이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강시의 손에 찢어 발겨졌을 때 묘실 주인의 관에서도 이상이 감지되었습니다. 전설 속의 현엽왕이 당장이라도 부활할 것 같았죠. 저는 토둔술에 능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그 안에서 죽을 뻔 했지요.”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며 여기까지 말한 금원은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럼 이것이 바로…….”
한립이 놀라 옥함을 가리켰다.
“현엽왕의 묘실에 안치되어 있던 것으로 그곳을 달아날 때 겨우 챙긴 보물입니다. 분명 대단한 보물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도 무엇인지 알아보는 이가 없더군요. 기이한 물건이지만 용도를 모르기에 매입하려는 수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줄곧 제가 지니고 다니게 되었지요.”
금원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상고시대 제왕의 묘에 합장된 물건이라면 정체를 아는 이가 없는 것도 당연합니다. 상고시대의 수많은 보물들은 지금의 수도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으니까요. 허나 범인 제왕이 그렇게 많은 수도자들의 물건을 지니고 강시로 묘실을 지키고 있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다른 수사들을 찾아가 묘실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당연히 바로 알리고 여러 고계 수사들을 안내해 상고시대 무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입구에 남겨 놓은 표식은 그대로였지만 상고시대 무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더군요. 그저 황량한 초원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그 무덤이 있었다는 자리가 어디인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설릉산맥으로 깊이 들어간 곳입니다.”
“그곳은 이전에 수사들이 빈번히 실종되었던 곳이라 들었는데, 이 일과 관련이 있을까요?”
한립이 이채를 띠며 물었다.
“노부도 그것은 모르겠으나 수사께서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곳의 위치가 적힌 옥간을 드리지요. 기회가 되실 때 살펴보십시오.”
노인이 주저하다가 놀랍게도 바로 품에서 옥간을 하나 꺼내 한립에게 건넸다.
“기회가 된다면 그러겠습니다.”
잠시 침묵하던 한립이 옥간을 받아들며 말했다.
“허허! 수사를 보니 옛 친우를 만난 듯 마음이 편안해 졌습니다. 오랜 세월 끙끙 앓기만 하던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풀어내게 해주셨으니 감사의 표시라고 생각해 주세요. 그리고 이것은 수사에게 싸게 넘기겠습니다. 영석 백 개면 팔 생각이 있는데 어쩌시겠습니까?”
“영석 백 개는 너무 저렴한 듯합니다. 영석 이백 개를 드리겠습니다.”
금원은 그가 건넨 중계 영석 두 개를 보고는 금색 거품이 든 옥함과 교환했다. 한립이 노인의 면전에서 옥함을 저물대 속으로 챙겨 넣자 아까워하는 기색이 만연하기도 했다.
이때 갑자기 한립의 영수대 중 하나가 꿈틀거리며 속에서 무언가가 작게 울부짖었다.
“이건 무슨…….”
노인이 놀라 한립의 영수대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기르는 저계 영수인데 이 물건을 보고 흥미가 생겼나 봅니다.”
한립은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다.
금원은 그래도 의혹이 가시지 않은 눈빛이었지만 더 캐묻지 않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가 석실 문을 나서는 것을 확인한 한립의 얼굴에서 미소가 점점 사라졌다. 그는 어두운 얼굴로 다시 옥함을 꺼내 뚜껑을 열더니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었다.
“저 자가 말한 무덤에라도 가볼 생각이더냐?”
의식 속에서 돌연 대연 신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리가 있나요. 수도계에 처음 발을 들인 얼뜨기도 아닌데 상대의 말만 믿고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왕의 무덤이라니 수행을 회복하고 한번쯤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다만 저 자의 의도가 좋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나를 보니 옛 친우를 만난 듯 마음이 편안해 진다니……. 무슨 세 살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저런 노인이 이런 비밀을 누군가에게 쉽게 누설할 일이 있겠습니까? 게다가 처음 보는 낯선 수사에게요. 이렇게 공을 들여 수작을 부리는 것을 보니 더욱 의심스럽습니다.”
“막 사문을 나와 세상 물정 모르는 녀석들은 속아 넘어갈 수도 있겠구나. 상대가 자신에게 마음을 주었다고 생각해 경계심을 늦추겠지. 예전에 노부 역시…….”
대연 신군이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았다.
“오, 선배님께서도 저런 수작에 속으신 적이 있으신 겁니까?”
한립이 가볍게 웃자 대연 신군이 콧방귀를 뀌며 민망함을 감추었다.
“노부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 그것이 이상하더냐?”
“선배님의 과거를 캐묻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제혼이 반응을 보인 것은 뜻밖입니다.”
한립이 신중한 얼굴로 영수대를 스쳤다. 검은 빛이 그 안에서 빠져나와 탁자 위로 떨어지더니 새까만 털을 지닌 작은 원숭이가 나타났다.
작은 원숭이는 즉시 코를 킁킁거리고는 시선을 황금빛 거품에 고정시켰다.
그러나 제혼은 약간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는데 금색 거품을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가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갑자기 제혼의 전신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풀쩍 뛰어올랐다. 금색 거품 안으로 뛰어든 것이다.
이어 금빛 거품의 빛이 크게 번지더니 그 속에서 회색 화염이 일어 제혼을 둘러쌌다. 한립이 인상을 찌푸렸다.
비록 무슨 일이 생긴 지는 모르겠으나 제혼은 화염 속에서도 고통스러워하지는 않았다. 마치 수련을 하는 것 같았고 그럴수록 거품의 빛은 짙어졌으며 굉장한 영기의 파동을 내뿜어댔다.
“잠깐, 이런 광경을 내가 어디서 봤더라? 분명 본 기억이 있는데…….”
그때 대연 신군이 말했다.
“무언가 생각이 나신 것입니까?”
“생각 좀 하게 놔두거라.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일 텐데…….”
한립은 그를 재촉하지 않고 금빛 거품 속의 제혼을 보며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
“생각났다. 예전에 유람을 다니며 만년 된 시왕에게서 본 물건이야. 그 시왕은 생전에 불문의 고승이었다가 강시의 몸이 된 후 자신의 사리를 제련해 강력한 보호막으로 만들었지. 굉장히 강력하고 체내에서 방출하자마자 순식간에 발동하는 보물이라 나도 상대하며 고전을 면치 못했었어. 너무 오래 전 일이고 그 당시에는 은색 보호막이었기에 기억나지 않았던 게지. 그런데 어찌 시왕의 체내에 있지 않고 금원이라는 축기기 수사의 수중에 떨어진 것일까.”
“당시의 선배님께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면 굉장한 보물이기는 하겠습니다. 그 자가 어떻게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제혼의 안위입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네 영수는 지금 사리 속에 있는 강시의 염화를 흡수하고 있다. 네 녀석만 괴상한 게 아니라 데리고 다니는 영수들도 하나 같이 괴상하단 말이지. 귀신과 요괴에 상극인 영수라니, 제혼이라는 이름도 생소하고 말이야.”
“강시의 염화를 흡수하고 있다고요?”
대연 신군의 말에 한립이 자세히 살피니 제혼이 음기를 분출해 조금씩 회색 화염을 삼키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고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저 영수는 본래의 배양 방법에서 너무 동떨어져 있습니다. 몇 차례 진화를 걸친 지금의 모습을 아직 제혼이라고 불러도 될지 망설여질 정도입니다.”
“어쩐지 등에 이상한 요귀 문양이 있더라니 일종의 이화(異化) 영수로구나. 강시의 화염이 회백색인 것으로 보아 분명 만년 이상 된 정순한 시화(尸火)일 것이다. 웬만한 수사나 영수들은 닿자마자 죽을 것인데 그것을 흡수하는 영수라……. 정말 보통이 아니야! 그런데 보물이 아직 제련이 끝나지 않아 주인을 인식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상하구나. 만일 제련이 끝났다면 시왕이 의식을 통해 당장 불러들였을 텐데 말이야.”
“그렇다면 시화를 제혼이 전부 흡수한 후에는 보물은 제 수중에 떨어지겠습니다. 아직 불가 공법도 얻지 못했는데 벌써 불가의 보물을 얻다니. 사리를 제련해 만든 금강조(金剛罩)의 위력이 얼마나 신묘할지 벌써 기대가 됩니다.”
“게다가 그냥 사리가 아니라 이건 금강사리이다. 대부분 사리들은 하얀색인데 이것은 금색이지 않더냐. 사리 중에서도 매우 드문 종류로 이것을 제련해내는 불자는 문중에서 금강호법(金剛護法)이라는 특수한 직책을 맡는다고 하더구나. 아마 다른 종문의 집법장로와 비슷한 것이겠지.”
“그럼 금강사리로 만든 보호막은 선배님이 보셨다는 것보다 위력이 더욱 강할까요?”
“그렇겠지. 금강사리는 불가 문중에서 유명하니까. 허나 나도 직접 비교해본 것이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다.”
대연 신군은 약간 주저했다.
한립이 웃으며 무어라 답하려는데 돌연 탁자 위의 금빛 거품이 진동하며 작은 녹색 빛이 그 안에서 빠져나왔다.
놀란 그가 빛을 주시하며 의식을 집중하자 천장으로 치솟았던 녹색 빛은 무엇에 부딪치기라도 한 듯 튕겨 나왔다. 바로 한립이 화형술을 통해 만들어낸 의식의 벽이었다.
동시에 제혼이 콧방귀를 뀌며 기운을 내품어 금빛 거품을 뱃속으로 끌어당겼다. 한립이 그것을 지켜보면 무언가를 짐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