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0
510화. 천기옥(天機屋)
지하 스무 장 깊이의 밀실 속에서 검은 관의 뚜껑이 들썩이며 새하얀 손이 틈을 비집고 나왔다. 손이 뚜껑을 밀어내자 옥관(玉冠)을 쓴 노란 장포의 사내가 홀로 그 안에 앉아 있었다.
서른 살 정도로 청아한 얼굴을 지닌 사내였다.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몸이 떨리다니. 누군가 이곳을 몰래 훔쳐보기라도 한 것인가?”
사내가 중얼거리며 조심스레 의식을 방출해 산봉우리 곳곳을 뒤졌지만 다른 원영기 수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 죽지도 않는 영감탱이가 이곳을 지나갔나보군. 흑옥관(黑玉棺)이 내 시기(尸氣)를 가려줄 테니 의심을 사지는 않았을 것이야.”
옥관을 쓴 사내가 다시 몸을 관 속에 누이자 관 뚜껑이 저절로 닫혔다.
지상의 한립은 남색 장포를 입은 수사의 안내를 받아 장원 중심에 만들어진 거대한 광장으로 걸어갔다. 그 안에는 다양한 복색의 수사들이 5, 6백 명쯤 모여 있는 것 같았다.
수사들이 곳곳에 모여 거래를 하거나 가격을 흥정하는 모습이 참으로 시끌벅적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한립은 미소를 보였다.
당초 수도계에 처음 들어와 참가했던 태남소회의 정경이 떠오른 것이다. 그 때를 생각하니 정말 감개무량하였다.
광장 중심에는 임시로 만들어진 거대한 천막이 있었는데 그 위로 하얀 빛이 찬란한 것이 자세히 보니 법기였다. 천막은 거의 백여 장 크기로 여러 수사들이 그 안을 드나들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광장 좌우를 살피자 영기를 발산하는 청석으로 만든 전당이 있었고 몇몇 수사들이 내부에서 활동하는 듯 했다.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세 가문의 몇몇 저계 제자를 제외하면 축기기 이상의 수사여야 했다. 심지어 결단기 수사만 해도 열댓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이곳은 겨우 대진 구석의 몇몇 세가들이 주최하는 교류회에 불과했는데 원영기 수사를 제외하면 모인 고계 수사들의 수가 천남의 웬만한 문파의 전력과 비슷했다.
안내한 수사의 말로는 오전은 자유 거래가 가능했고 오후가 되어야 경매회가 시작된다고 했다. 정해진 교류회 기간은 3일로 벌써 이틀째여서 내일이 되면 천년된 삼왕이 경매에 나올 것이라 했다.
한립이 잠시 그들을 살피고는 광장으로 걸어갔다.
낯선 얼굴의 축기기 수사였지만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다른 이들과 섞이니 아주 평범해 보였다.
노점에서 판매하는 물건들은 예상대로 축기기나 결단기 수사들이 흥미를 보일만한 것들로 각종 진귀한 재료를 수없이 다뤄온 그의 눈에 들 리가 없었다.
유일하게 그의 걸음을 멈추게 한 노점은 비교적 기괴한 법기와 재료를 팔고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한립은 몇 가지를 살펴보고는 연구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광장을 한 바퀴를 돈 그가 천막으로 향하려다 갑자기 돌아섰다.
그의 뒤에서 뾰족한 귀에 수척해 보이는 노인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축기기 초기의 수행을 지닌 수사였다.
“저를 한참 따라 걸어오신 것 같은데. 혹시 저를 아십니까?”
“오해 마십시오. 저는 금원이라 합니다. 이상한 짓을 하려던 것이 아니라 수사처럼 각종 물건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듯 돌아다니는 분은 처음이라 호기심에 여기까지 따라온 것입니다. 정말 탄복하였습니다.”
노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해명했다.
“눈썰미가 좋으신 분입니다. 허나 그 말씀을 하려고 이리 오래 저를 따라다니신 것은 아니겠지요.”
“허허! 맞습니다. 이 늙은이가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말해보시지요.”
한립이 팔짱을 끼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제게 이보가 하나있는데 도저히 용도와 내력을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수사께서 감정해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아는 물건이라면 수사에게 팔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수사 정도의 재력이면 분명 그만한 여유는 있을 테니 말입니다.”
노인이 한립의 허리춤의 영수대와 저물대들을 훑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이보? ’
“좋습니다. 저를 오래 따라다니신 성의를 보아 물건을 살펴보겠습니다. 밀실에 들어가 이야기 하시지요. 안 그래도 저도 알아볼 일이 있었습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곁의 편전을 가리켰다.
“밀실이요? 영석 하나를 지불해야 하는데 너무 낭비가 아닐지…….”
“영석은 제가 내겠습니다. 수사의 이보가 그만한 가치가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걱정 마시오, 수사! 이 늙은이도 위험을 무릅쓰고 구한 물건입니다.”
금원이 헛웃음을 지었다. 한립은 두 말할 것 없이 노인을 데리고 편전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ㅤㄴㅓㄺ은 대청이 나왔고 중간에 푸른 장삼을 걸친 축기기 중년 여인이 방석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한립과 노인이 들어오는 소리에 여인이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본 전이 소장한 법결과 비술을 보시기 위해서 찾아오신 건가요? 아니면 밀실을 필요로 하시는 건가요?”
여인이 한립과 노인을 보며 미소 지었다.
“밀실 하나면 됩니다.”
“영석 하나를 지불하셔야 하고, 이곳을 나가시면 밀실은 회수됩니다.”
중년 여인이 허리춤을 짚어 몇 촌 길이의 소형 석실을 꺼냈다. 한립이 그것을 보고는 영석 하나를 꺼내 여인이게 건네고 석실을 건네받았다.
“수사께서는 천기옥(天機屋)을 처음 보시는 건가요?”
한립이 그것을 살피며 흥미를 보였다.
“예, 처음 봅니다. 법기입니까?”
한립은 수중의 물건을 만지작거렸지만 전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법기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요. 사용 방법이 무척 간편해서 영기를 주입하기만 하면 됩니다. 저계의 천기옥은 크기만 변할 수 있어 법기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고계 천기옥은 진법이나 금제를 가할 수 있어 법보 못지않습니다. 물론 저희가 제공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으로 방음과 투시를 막는 효과 외에는 다른 특별한 기능은 없습니다.”
여인이 자세히 설명하자 듣고 있던 한립은 내심 놀랐다. 밀실을 빌려준다기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런 기이한 물건이 있을 줄이야! 이런 것은 천남에는 없는 물건이었다.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립이 인사를 하고 그녀가 가리키는 쪽으로 걸어가자 금원이 따라 붙었다.
“천기옥을 처음 보셨다니 놀랐습니다. 하긴 이런 물건은 산수들이나 멀리 떠나는 고계 수사들을 대상으로 천기각(天機閣)에서 독점으로 판매하니 못 보셨을 수도 있지요. 수사의 수행으로 보아 어떤 종문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우는 제자인 듯하니 저런 겉보기에만 번지르르한 물건을 살 일이 있겠습니까? 가격이 비싸니 차라리 법기나 영약을 구입하는 편이 낫겠지요.”
“이런 천기옥은 대략 얼마 정도에 거래가 됩니까? 다 이런 모양인 것입니까?”
“저계로 구입하시면 영석 백 개 정도, 고계로 구입하시면 딸린 금제나 진법에 따라 천차만별입니다. 동급의 법기보다 훨씬 비싸다는 것만 알아두시면 됩니다. 모양은 다양하지요. 탑, 누각, 저택 등등 각양각색인데 듣기로는 최상급 천기옥의 경우 소형 동부(洞府)를 그대로 재현해 편리하기 그지없답니다.”
노인은 한립이 관심을 보이자 아는 바를 줄줄 읊었다.
“소형의 동부요?”
“한 형, 꿈도 꾸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 천기옥이라면 영석 수만 개를 주어야 할 텐데 우리 같은 수사들이 언제 볼 기회나 있겠습니까.”
이때 눈앞에 드문드문 대여섯 개의 석실이 등장했다. 편전 속의 석실들은 한립이 지닌 소형 석실과 모양이 똑같았고 하얀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한립은 슬쩍 의식을 이용해 그 중 하나를 살폈다. 과연 의식이 금제에 부딪쳤다. 이런 간단한 금제를 뚫는 것은 간단했지만 그렇게 되면 석실의 주인이 바로 누군가 자신을 감시한다는 것을 알아챌 것이다.
어느 정도 효과를 확인하고 한립은 손에 들고 있던 소형 석실에 영력을 주입했다. 손바닥에서 푸른빛이 반짝이고 석실이 약간 뜨거워지자 한립은 거침없이 그것을 빈 공간을 향해 던졌다.
쿵!
하얀빛이 가시고 수 장 크기의 석실이 나타났다.
“금 형, 들어가시지요.”
한립이 노인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일렀다.
“그럼 이 늙은이도 염치불구하고 들어가겠습니다. 저도 천기옥을 여러 번 보았지만 정작 들어가본 적은 손에 꼽힌답니다, 허허.”
금원이 짧은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싱글싱글 웃었다. 노인이 먼저 석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립이 천천히 뒤따르며 석문을 닫았다
내부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돌로 만든 탁자와 의자, 청석을 깎아 만든 기다란 침상까지 나름 섬세하게 꾸며져 있었다.
한립은 손바닥을 벽에 대어 금제가 발동된 것을 확인하고는 노인 맞은편에 앉았다.
“일단 수사께서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어볼 수 있을까요?”
노인이 갑자기 진지하게 물었다.
“별 것은 아닙니다. 관녕부에 잠시 머무를 생각인데 이곳 세가나 종문들과 관련된 금기 같은 것은 없는지 알고 싶습니다. 수사의 말투로 보아 현지인인 것 같아 묻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라면 말씀 드려야지요! 자랑이 아니라 관녕부가 아니라 료주 전체에 관해서라면 이 늙은이가 모르는 게 없습니다. 어떤 것이 먼저 알고 싶으십니까?”
“이곳의 주인이 관녕부 삼대 세가라니 그들에 대해 이야기 해주시지요. 최근에 발생한 알아둘만 한 사건도 말씀해 주신다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관녕부의 수선세가들이라……. 기본적으로 이 지역이 유가 문종의 구역이라 대부분 크고 작은 세가들이 그 밑에 속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다만 관녕 사대 세가는 다르지요. 공 씨 가문을 제외하면 나머지 세 개의 가문은 각각의 전통이 있습니다.”
“사대 세가요? 관녕 삼대 세가가 아니고요?”
“관녕부에 세 가문만 남은 것은 요 몇 년 사이에 벌어진 일입니다. 십년 전까지만 해도 사대세가였지요. 그 중 풍 씨 가문이 무슨 이유인지 다른 세 가문의 눈 밖에 나 하룻밤 사이에 세력을 뿌리째 뽑히고는 적계 제자들도 전부 제거를 당했지요. 듣기로는 풍 가가 어떤 중대한 일을 상의 하느라 마침 직계 제자들이 모두 모였었다고…….”
노인이 서서히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한립은 앉아서 상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풍악이 했던 말과 비교해 보았다.
사대 세가에 대한 이야기 다음으로는 관녕부의 크고 작은 종문들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금원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노인은 확실히 다양한 곳을 유람한 탓인지 보고들은 바가 많아 관녕부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 대해서까지 아는 바가 많았다.
한립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단숨에 료주 일대의 수도계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고, 조몽용에게서 들은 이야기보다 훨씬 자세한 정보들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원래 말이 많은 편인지 한번 입을 열자 끊임없이 말을 이었다. 심지어 가끔은 자신의 견해와 해석을 늘어놓으며 장장 일각을 쉼 없이 떠들다가 약간 아쉬운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한립이 그 틈을 노려 가능한 밝게 미소 지었다.
“이리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다니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이제 슬슬 이보를 살펴볼까요?”
“당연히 살펴봐야지요. 한 형이 감별해 주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노인이 조심스럽게 저물대에서 옥함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한립이 의식을 이용해 그것을 훑고는 속으로 흠칫 놀랐다. 옥함 속의 물건이 괴이한 힘으로 의식을 밀어냈던 것이다. 이제 그도 정말 그것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금원이 신중하게 옥함의 뚜껑을 열어 금빛의 물건을 보여주었다.
“자세히 좀 봐주시지요.”
금원이 옥함을 한립 쪽으로 내밀었다. 한립이 눈썹을 끌어올리고 말없이 옥함을 들어 눈앞에 가져갔다.
그제야 흐릿한 빛 속의 물체가 눈에 들어왔는데 표면에 금빛이 감돌았고 속은 텅 빈 거품이었다. 영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범인들의 물건 같기도 했다.
그는 한참을 살펴보다가 손가락으로 거품을 살짝 눌렀는데 그대로 눌러 들어가 버렸다. 부드러운 표면이 정말 거품이라도 되는 듯 했다.
한립이 조금 놀라 다시 의식을 방출해 그것을 감쌌다. 그런데 거품이 반짝이며 또 다시 의식을 밀어냈다. 이번엔 한립도 의식을 더욱 강하게 밀어붙어 한 줄기씩 연달아 거품을 휘감아 보았다.
그러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옥함 속의 거품에 금빛이 반짝이더니 한순간 커졌다 작아졌다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강하게 뛰는 심장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