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507화 (264/2,000)

# 507

507화. 선박

“이상한 일이군. 이전에 누군가 강 속에 던져 넣은 것이 날이 풀리며 녹아 떠내려 온 건가?”

왕철창이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왕 형, 무슨 일입니까?”

“고 형제도 오셨군요.”

그는 왕철창과 오래 손을 맞춰온 표사였다.

“얼음 속에 누군가 있습니다 그려. 신기한 일입니다.”

“시체가 신기할 게 무엇입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죽은 자는 최소한 선박을 약탈하지는 못할 것 아닙니까.”

거한이 자신의 까칠한 수염을 긁으며 미소 지었다.

“무슨 일인데 그리 시끄럽게 구는 것이냐?  부인께서 휴식 중이란 걸 모르는 것이냐?”

문사 차림의 중년인이 선실에서 걸어 나와 하인들을 꾸짖었다.

그는 주 사야(師爺)라고 불리는 인물로 관부 고관의 심복이었다. 그가 바로 왕철창 등 두 표사를 고용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것이 아니라 강에…….”

황영이라는 하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강을 가리켰다. 주 사야는 왕철장 등 표사들도 그곳에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하곤 하녀가 말한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얼음덩어리 속 사람을 발견하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죽은 사람 사체를 구경해서 무엇 하겠다는 건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거라. 내가 왕 집사를 데려와야만 하겠느냐?”

문생이 그들을 엄하게 꾸짖자 왕 집사라는 말에 하인들의 안색이 변해서는 분주히 어디론가 사라졌고 나머지 두세 명의 선원들도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왕철창과 거한도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는 걸음을 옮기려는데 고대봉이란 거한이 무심코 강 쪽을 쳐다보고는 놀라 소리쳤다.

“헉! 살아 있잖아?”

그 말에 왕철창과 주 사야도 놀라 강 쪽을 바라보았지만 얼음덩어리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문생이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거한을 쳐다보았다.

“정말 얼음 속에 있는 사람이 눈꺼풀을 깜빡였습니다. 제가 봤다고요.”

“고 형제가 저희를 속일 이유가 없습니다. 보아하니 정말 살아있는 듯하군요.”

왕철창은 주저 없이 동료의 말을 믿어 주었다. 주 사야는 그것을 보고 반신반의하기는 했지만 생각 끝에 고개를 저었다.

“어찌 되었든 괜한 일 만들지 마시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괜히 먼저 나설 것 없습니다.”

왕철창도 그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얼음 속의 인물은 정말 괴이했고, 오랜 강호 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이상한 일은 최대한 피해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대봉은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주 사야, 잠시만요! 그래도 사람 목숨을 구하는 일인데 자비를 베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살아 있는 생명은 구하고 봐야지요.”

선실 안에서 여인의 고운 목소리기 들려오더니 잠시 후 비단 장삼을 걸친 수려한 소녀가 걸어 나왔다. 그 뒤를 방금 자리를 떠난 황영이 따르고 있었다.

보아하니 하녀가 소녀에게 이 일에 대해 고한 모양이었다.

“둘째 아가씨, 그러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어찌 낯선 이를 선박에…….”

“얼음 속에서 죽을 뻔하다 겨우 살아난 사람입니다. 이렇게 만난것도 덕을 베풀라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빈 선실이 이리 많은데 하나 내주시지요. 설마 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람 하나 어찌하지 못할까요?”

“아가씨께서 그리 분부하신다면야……. 바로 사람을 불러 구하겠습니다.”

문생이 고민을 하다 답했다. 비단 장삼의 소녀는 미소 지으며 더는 무어라 하지 않고 하녀를 데리고 선실로 돌아갔다.

그러나 주 사야의 안색이 좋을 리 없었다.

“들으셨지요?  저 자를 구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얼음덩이가 저렇게 크니 두 분께서 나서주셔야겠습니다.”

주 사야가 쓴웃음을 지으며 표사들에게 일렀다.

“예! 제가 다른 건 몰라도 힘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고대봉이 개의치 않고 힘차게 답했다. 왕철창도 다시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암흑 속에서 얼마나 머물렀는지 모르겠으나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이 지나가자 한립은 겨우 의식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눈을 뜨기도 전에 귓가에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이 사람은 언제 깨어나는 거예요?  벌써 이틀이나 지났는데 괜찮겠죠?  아가씨가 계속 물어보신단 말이에요!”

“허! 노부는 의술을 조금 익혔을 뿐인데 이 자가 언제 깨어나는지 어찌 알겠느냐?  허나 정말 이상하구나. 분명 안색이 창백하고 기혈이 크게 상한 것 같은데 맥을 짚어보면 건강한 것이 건장한 장사의 맥에 뒤지지 않으니 말이야.”

“그거야 할아버지가 맥을 잘못 짚으신 거겠죠!”

소녀는 노인과 가까운 사이인지 웃음을 터트렸다.

“헛소리는. 이전에 너희가 열이 나고 배가 아플 때 누가 돌봐주었더냐?  허나 노부가 의원은 아니니 이 자가 괴질에 걸린 것을 치료하지 못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노인도 조금 난감해 했다. 여기까지 들은 한립은 자신이 침상에 누워 두꺼운 이불을 덮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부드러운 감촉의 솜이불이 더없이 따뜻했다.

노인과 아이는 대진의 말을 사용해서 한립을 크게 안심시켰다. 보아하니 범인들의 손에 구출이 된데다 이미 대진 국경 안으로 들어온 듯 했다.

하지만 그의 상황이 묘했다. 깨어나는 순간 의식으로 체내를 살펴본 결과 쓴웃음이 절로 났다.

천란 성녀의 추격을 피해 달아나 봉인해제가 풀릴 시간이 임박하자 얼른 강으로 뛰어들어 대연 신군이 알려준 죽은 척하는 술법을 펼친 것이다.

스스로 얼음 속에 가둔 끝에 돌올인들의 추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깨어나 보니 몸 상태가 예상보다 더욱 안 좋았다.

혈영둔을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전신의 피가 너무 많이 소모됐고 몸은 지극히 허약해졌으며 진원을 크게 상해 수행이 큰 폭으로 떨어진 것이다. 지금 그는 겨우 연기기 정도의 수행이었다.

이렇게 되면 5, 6년 정도 요양을 하지 않고서는 본래 수행으로 돌아가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탄식하며 서둘러 체내의 비검들을 확인했다. 비검 중 하나에서 원신이 약해져 의식을 잃고 잠들어 있는 은월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마나 다행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두 번째 원영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거리가 멀어 정확하게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희미하게 연계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살아 있었다. 그러나 몇 년 내로 원영을 소환하지 못해 풀려나면 도리어 그의 몸을 빼앗으려 들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수행을 어느 정도 회복하면 두 번째 원영을 되찾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대연 신군에게 전음을 날렸다.

“선배님, 제가 의식을 잃은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인근에 대진 수사가 나타난 적이 있는지요?”

“드디어 깨어났구나! 1년 넘게 강 속을 흘러 다니다가 이제야 얼음에 실어놓은 법력이 바닥나 수면으로 떠오른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구나.”

“그래도 살아서 빠져나왔다니 불행 중 다행이 아닙니까?  어쨌든 그런 상황에서 원영 후기 수사들의 추격을 받으며 달아날 수 있는 이가 많지는 않으니까요.”

한립은 슬쩍 웃으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흥, 아주 마음도 넓구나! 허나 어째서 통천령보에 대한 이야기를 노부에게 미리 하지 않은 것이냐?  흠, 어쩐지 폐관 수련이 들어갈 때마다 노부를 밀실 밖에 던져두고 들어가더라니……. 쓸데없는 변명은 되었고, 직접 통천령보를 연구해보고 싶으니 시간이 날 때 솥이나 꺼내 보거라.”

대연 신군의 말투가 순식간에 변해서는 불만을 토로했다.

“선배님께서 연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수행을 회복해야 솥을 체내에서 방출할 수 있을 듯합니다.”

“약속한 것이다. 그럼 그 일은 되었고. 선박에 수도자가 하나 있으나 겨우 연기기 2, 3성 정도 되는 계집아이이니 신경 쓸 것 없다.”

대연 신군이 한결 온화해진 말투로 답했다.

“연기기 2, 3성이요?”

한립은 대연 신군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눈을 떴다.

“어?  할아버지! 이 사람, 깨어났나 봐요!”

그는 눈을 뜨자마자 열네 살 쯤 돼 보이는 소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다. 뽀얀 피부에 동그란 얼굴이 제법 귀엽게 보였다.

“그래, 노부도 보고 있다.”

소녀 옆에 앉아 있는 회색 장포의 노인도 선량해 보였다.

“할아버지가 잘 돌봐주고 계세요. 전 아가씨에게 다녀올게요!”

한립이 입을 떼기도 전에 동그란 얼굴의 소녀가 노인에게 재잘거리고는 쪼르르 달려 나갔다.

“허허! 저 아이 성격이 원래 저러하니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한립을 향해 선의를 담은 미소를 보였다.

“저를 구해주신 분들인데 나무라다니요. 그런데 이곳은 어디입니까?  어르신께서는…….”

한립이 미소로 답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곳은 순강입니다. 강에 빠져 생사가 불분명한 공자를 저희 둘째 아가씨께서 사람을 시켜 구해내신 것이지요. 노부는 하문이라 하고 부인께서 청한 문객입니다.”

“그러셨군요. 저는 한 가입니다. 목숨을 구해주신 아가씨께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저희 아가씨는 인자하시기가 보살 같으신 분이지요. 허나 한 공자를 만나주실 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어찌 얼음 속에 들어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아, 그것은……. 사정이 있어 말씀 드리기 어려울 듯합니다.”

한립이 주저하다가 솔직히 고백했다.

“괜찮습니다. 누구나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는 법이지요.”

노인은 성격이 호방해서 손을 저으며 별로 개의치 않아했다. 그때 동그란 얼굴의 소녀가 뛰어 들어왔다.

“할아버지! 아가씨께서 공자를 편히 쉬게 해주시고 앞으로의 일은 나중에 말씀하자 하셨어요.”

그녀는 노인에게 아가씨의 마을 전하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립을 쳐다보았다. 한립은 그런 소녀를 보며 웃어주었는데 소녀는 볼이 발갛게 변해 고개를 숙였다.

‘보기에는 별 다를 게 없어 보이는데?  아가씨가 이전에 어울리시던 친우들과 비교해도 훨씬 부족해 보이고. 그런데 어째서 아가씨가 이렇게 신경 쓰실까? ’

“아가씨의 분부대로 해야겠지요. 공자, 막 깨어나셨으니 휴식을 취하십시오. 노부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립도 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며 그들이 방에서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드디어 홀로 남은 한립은 나무로 만들어진 선실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이틀 간 하녀들이 끼니를 챙겨주러 들어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를 성가시게 하는 일은 없었다. 이에 그는 온전히 단약을 먹고 요양을 하며 보낼 수 있었다.

대연 신군이 말했던 연기기 2, 3성의 계집은 그가 의식을 방출하자마자 찾아낼 수 있었는데 수려한 외모에 젊은 여인이었다.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으로 보아 그녀가 바로 자신을 구해준 둘째 아가씨인 듯 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이 수도자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한립은 몰래 선상 위의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어 대강의 정황을 파악했다. 선박에는 료주 모처의 조씨 성을 지닌 현위의 가솔들이 타고 있었다.

조 현위가 급히 전근을 가게 되어 그먼저 움직이고 나머지 가솔들이 천천히 뒤따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진짜 가솔은 몇 되지 않았다. 정실부인과 두 명의 첩실 그리고 세 명의 공자와 아가씨들.

둘째 아가씨가 바로 정실부인이 낳은 자식이었는데 듣기로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하고 잔병치레가 잦아 몇 년간 여인들이 지내는 사원에서 요양을 하다가 최근에야 가문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나머지 두 명은 첩실의 자식으로 큰 아가씨는 이미 시집 갈 나이가 되어 정혼자가 있었고 셋 째 공자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그 외에 신분이 있는 이들은 하 노인과 주 사야 등이 있었고, 왕 집사라는 이가 하인들을 관리하며 잡다한 일을 도맡아 했다. 선박의 표사로는 왕철창과 고대봉이 있었다.

둘째 아가씨라는 여인이 저계 수사인 것 외에도 왕 집사가 지닌 진기(眞氣)가 상당했다. 오히려 포사라는 이들의 조잡한 실력을 훨씬 상회하는 고수였다.

그리고 하인들 중 몇 명도 동작이 유난히 민첩하고 은은하게 기운을 숨기고 있는 것이 평범한 종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조금 이상하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 선박 내의 사정을 파악한 한립은 의식을 회수해 수련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