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6
506화. 급변
잠시 후, 두 마리 모래 교룡이 달려들면서 터질 듯한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터져나간 교룡들은 거대한 모래 누에로 변해 그를 물 샐 틈 없이 가둬버렸다.
허공에 떠 있던 여인은 한립이 돌올인들의 성정과 비슷한 솥을 꺼내자 흠칫 놀랐지만 그가 손쉽게 모래에 갇힌 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돌올인들의 성물인 솥의 위력은 그녀가 가장 잘 알았다.
모래에 갇히면 대선사 몇 명이 합심을 해도 한동안은 빠져나오기 어려우니 이제 상대의 생사는 자신에게 달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쿵!
남색 방패가 변한 보호막이 부서져 내리고 모래 구름이 몰려들어 한립을 덮쳤다. 모래가 만들어낸 누에 모양은 점점 더 크기를 키웠다.
이제 완전히 안심한 여인이 신형을 움직여 솥을 밟고 서서히 내려왔다. 그러나 십여 장 가량 하강했을 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강철처럼 굳은 모래 누에를 무수히 많은 남색 빛이 뚫고 나와 그녀가 법결을 날려 회복하기도 전에 무너져 내려 모래 구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눈부신 남색 기운이 번뜩이며 한립이 손에 작은 솥을 들고 서서 성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천란 성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대로 서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한립이 낮게 조소하고는 손에 들고 있는 허천정의 뚜껑을 두드렸다. 그러자 그 안에서 남색 빛이 물결처럼 도처로 퍼져나갔다. 남색 물결이 퍼져나가는 곳마다 푸른 모래가 사라졌다. 마치 물결이 모래를 집어삼키는 듯 했다.
성녀는 서둘러 수결을 맺어 남은 모래들로 한립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모래들은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그녀와의 연계가 끊긴 것이다.
성녀가 놀라 다급히 발아래의 솥을 가리켰다. 그러자 거대한 솥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더니 더욱 눈부신 푸른빛을 한립을 향해 내뿜었다.
한립이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통보결 제1성 공법을 운용해 작은 솥을 움직이자 웅장한 포효 소리가 전해지고 솥뚜껑이 단번에 남색 빛줄기로 변해 허공으로 치솟더니 솥 가운데에서 다섯 가지 색깔의 광채가 퍼져 나갔다.
천란 성녀가 쏘아 보낸 푸른빛은 강줄기가 바다로 스며들 듯 그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
기이한 현상에 천란 성녀뿐만 아니라 한립도 크게 놀라 잠시 멍해졌다.
웅!
바로 그때 천란 성녀가 밟고 있던 거대한 솥이 공명하더니 푸른빛줄기로 변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녀는 대경실색해 수결을 맺어 솥을 불러들이려고 했지만 푸른빛줄기는 전혀 개의치 않고 그대로 작은 솥 속으로 들어가 사라져버렸다.
천란 성녀는 대노했지만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립이 손에든 허천정이 홀연히 떠올라 빙글빙글 돌더니 하얀 안개를 조준한 후 노을빛이 스쳤다. 그러자 하얀 안개 속에서 공포에 질린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더니 서둘러 달아나기 시작했다.
바로 소의 머리에 교룡의 몸을 한 천란 성수였다. 하지만 눈부신 남색 기운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요수를 따라잡아 감싸 안았다.
천란 성수는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대며 발버둥 쳤으나 그 속에서 점점 몸집이 줄어들어 그대로 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솥뚜껑이 다시 허공에서 떨어져 내려 솥을 덮자 천란 성수는 그대로 안에 갇히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에 천란 성녀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분명 자신이 우위에 있었는데 어째서 순식간에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이제 보물과 성수마저 빼앗겨 버렸다. 그렇지만 성녀도 평범한 수사가 아니므로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냉랭한 눈빛으로 한립의 허천정을 노려보았다.
모든 것이 성정과 비슷하게 생긴 저 물건 때문인 것이 분명했다.
‘저 것을 반드시 빼앗아야 해!’
성녀는 마음을 굳혔다.
그런 그녀의 속내를 바로 알아챈 한립은 크게 비웃고는 은색 날개를 이용해 수십 장 밖에 나타났다.
거검을 불러들인 후 열손가락을 튕기며 기이한 수결을 연달아 맺자 그의 몸에서 강한 영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가 입을 벌려 정혈 몇 모금을 뱉어내자 핏덩이들이 핏빛 안개로 변해 푸른빛과 붉은빛에 둘러싸여 요사스럽기 그지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겉으로 드러난 두 손과 얼굴 등이 기이하게 붉어지기 시작해 거의 핏빛에 가까워지니 정말 누가 봐도 소름끼치는 모습이었다. 핏빛 안개 속의 한립은 그대로 신형이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안 돼!”
천란 성녀는 한립의 움직임을 짐작하고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그녀가 재빨리 두 팔을 펼쳐 두 줄기의 은색 실들을 쏘아 보냈지만 한립은 거검을 회수한 후 핏빛 그림자를 남기고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천란 성녀는 무거운 마음으로 의식을 퍼트려 그를 찾으려 했지만 백리 밖에서 존재를 드러낸 한립은 혈영둔을 펼쳐 다시 한 번 그녀의 의식 밖으로 사라져 찾을 수가 없었다.
이에 여인은 파랗게 질려 허공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천리 밖의 모처, 준수한 청년이 아홉 개의 청록색 바퀴에 둘러싸여 초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둔술(木遁術)? 그렇게 중상을 입고도 초목의 힘을 빌려 은신을 하다니! 그 마기의 위력이 대단하구나. 허나 이제 다른 수도자의 몸을 빼앗을 힘조차 남지 않았을 테니 잠시 후면 스스로 붕괴해 흩어져 버리고 말겠지. 그런데 느낌이 좋지 않단 말이야……. 설마 다른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청년의 눈빛이 흔들리며 고개를 들어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는 머뭇거리다 아홉 개의 바퀴를 하나로 합쳐 회수하고는 청록색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그리고 초원의 작은 관목 아래에는 새까만 빛이 반짝였다. 작은 깃발이 땅에 꽂혀 있었는데 그 위로 반 척 크기의 구멍이 허공에 뚫려 있었다.
그 안에는 어두운 녹색의 작은 원영이 정신을 잃고 누워서 깃발 속의 정순한 마기를 흡입하며 스스로 부상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보라색 머리의 여인이 옥으로 만들어진 고보를 이용해 수천 마리의 서금충을 가두고 자신을 화들짝 놀라게 만들었던 청년의 몸을 꿰뚫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의 몸이 반짝이더니 놀랍게도 요염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가 빛으로 산산이 부서져 사라져 버렸다.
여인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 * *
몇 시진 후, 준수한 청년과 보라색 머리 미녀가 천란 성녀와 다시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말씀은 상대가 어떻게 서금충을 길러냈는지 알아내는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성물과 성수까지 잃었다는 겁니까?”
“성정이야 예비용으로 하나가 더 있으니 앞으로 소환의식을 하는 데는 문제 없겠으나 성수의 분신을 빼앗긴 것은 큰일입니다. 분명 상계 성수께서 진노할 텐데. 반드시 되찾아 와야 합니다.”
준수한 청년의 말에 보라색 머리 여인도 난색을 표했다.
“이번 일은 제 불찰이 큽니다. 성정만 믿고 제가 너무 방심한 것이지요. 제가 직접 대진으로 가서 성수의 분신을 회수하겠습니다. 또한 그 자가 지닌 솥의 내력이 기괴합니다.
아무래도 성정을 제련할 때 본 뜬 통천령보의 본체가 아닐까 의심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일을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요.”
“통천령보라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보물이 아직 인계에 남아있을 리가요? 상고수사들에 의해 상계로 전부 옮겨지지 않았습니까. 돌올인의 보물인 성정만 해도 엄청난 기재를 가진 선조께서 비술을 이용해 성수에게 알아낸 복제 방법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보라색 머리 여인이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고마까지 출현한 마당에 통천령보 몇 개가 아직 인계에 남아 있다해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고마의 존재가 언급되자 보라색 머리 여인과 천란 성녀의 안색이 달라졌다.
“흥! 다들 고마가 무서운 존재라고들 하지만 손속을 겨뤄볼 기회가 없어 아쉬울 따름입니다. 둔술이 어찌나 신묘한지 아무도 모르게 우리의 초원을 지나 대진으로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건 고마가 이미 중상을 입고 초원에 들어왔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초원에 얼마나 큰 재난이 되었을지 모를 입니다.”
청년이 탄식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자가 지닌 보물이 통천령보이든 아니든, 선사들을 죽이고 성수까지 빼앗아 달아났으니 절대 가만 둘 수는 없습니다. 성녀의 신분으로 성정과 성수를 잃어버렸으니 직접 되찾아 와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다음번 소환의식 때 성수께 질책을 받게 될 테니까요.”
성녀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그 말에 청년과 여인이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청년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기왕 성녀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대진에 다녀오시는 것을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허나 대진의 적잖은 문파들이 저희 돌올족에게 편견을 지니고 있으니 신분을 노출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겠지요.
그 자의 실력으로 보아 대진 내에서의 세력도 상당할 테니 일단 음라종에 가서 정말 상대가 음라종 장로인지부터 확인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상대의 신분이 명확해지면 초원으로 바로 연락을 주시지요. 이후에는 저희가 힘을 보태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자의 실력이 만만치 않으니 경솔한 행동은 당연히 삼가야겠지요.”
천란 성녀는 몇 가지 일을 마무리 하고 바로 대진에 잠입해 한립을 추적할 계획이었다.
* * *
대진 료주는 대진의 108개 주 중 면적이 큰 지역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지역이 극한의 날씨로 연중 눈이 쌓여 있어 인구가 희박했고 곡물이 나는 양도 크지 않았다.
료주의 지역을 지나는 순강은 이곳에서 두 번째로 큰 강으로 얼지 않은 몇 안 되는 지류였다. 그래서 매년 이맘때가 되면 거래를 하려는 상인이든 아니든 이 강을 따라 배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이렇게 배를 이용하면 말을 타거나 마차를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간편했다.
또한 일정 간격으로 뱃길을 따라 대진의 관선(官船)이 순찰을 돌기도 했다.
그러나 강은 길고 지나는 선박도 상당했기에 도적질을 하는 이들도 적잖았다. 그래서 커다란 선박들은 몇몇 솜씨 좋은 표사(鏢士)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왕철창이 바로 그 선박을 보호하는 보통 표사 중 하나였는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창법에서 꽤 실력자였다.
어려서부터 이 분야에 뛰어 들어 스무 해 째 표사 일을 하고 있으니 이제 젊은 청년은 속을 알 수 없는 강호인이 다 되어 있었다.
그는 지금 커다란 선박의 뱃머리에 서서 인근의 선박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번 일은 그에게 가장 익숙한 호송 임무로 특이한 점은 선박의 주인이 어느 관부 고위 관료의 가솔이라는 점이었다.
보통은 이런 관부와 연루된 선박은 강호의 비적들도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호송 임무도 별 탈 없이 끝나곤 했다.
이번에도 여정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왕철창은 여정이 끝나면 만날 어린 아들을 떠올리곤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여인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뭐야!? 빨리 좀 와보세요! 엄청 큰 얼음덩이 안에……. 사, 사람이 들어 있어요.”
왕철창은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오늘 같은 화창한 날씨에 순강에 얼음덩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그 속에 사람이라니.
강호에서 오랜 세월 생활해 왔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는 등에 맨 두 개의 짧은 단철 창을 만져보고는 소리가 난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선박의 한쪽 구석으로 가자 이미 일고여덟 명이 모여 있었다. 선박에서 네다섯 장 떨어진 곳을 보니 하얀 무언가가 강 위에 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과연 그것은 투명한 얼음 덩어리로 그 안에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