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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503화 (260/2,000)

# 503

503화. 천란성녀(天瀾聖女)

며칠 후 그 소식이 널리 퍼졌다.

단번에 선사 여럿이 죽어나간 사건은 아무리 저계 선사들이라도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돌올인들 그리고 성전과 거래를 하러온 대진 수사들이 연관이 되었으니 더욱 그랬다.

성전에서 몇몇 선사들을 파견해 알아본 결과 흉수가 밝혀졌다. 그와 같은 일을 벌인 이는 도망치고 있던 그 외지인 수사였다.

그날 일을 목격한 범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자는 대진 10대 종파 중 하나인 음라종 장로 같다고 했다. 음라종의 보물인 음라번을 사용했으니 돌올인들이 그 위력을 모를 리 없었다.

저번 전투에 참가했던 몇몇 선사들은 특히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런 보물을 남겨두고 사용하지 않았다니 그 정도라면 음라종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중요 인사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몇몇 돌올인 선사들은 그런 자가 왜 초원에 나타났는지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수십 년 전, 성전에서 그들의 숙적인 모란인들의 배후에 음라종이 있다는 것은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들로 인해 계획이 틀어진 음라종에서 고의로 이번 기회에 보복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외지인의 정체와 목적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을 한 돌올인들은 크게 안심했다. 적이 얼마나 강하든 정체와 목적을 알고 있으면 어느 정도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천란 성전은 즉시 대량의 수사들을 대진과 초원의 경계 지역으로 파견해 혹시나 다른 음라종 수사들이 올 것을 대비하여 순찰을 돌게 했다. 또한 둔술이 빠른 원영기 수사들을 따로 모아 그 음라종 장로를 찾아서 죽일 것을 명했다.

상대의 신분이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이대로 천란 초원을 빠져나가게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만일 그런 소문이 퍼져나간다면 천란 초원을 대표하는 천란 성전의 위신이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 뻔했다.

하여 이번 개령 의식은 이틀 만에 다급하게 마쳐버렸다.

개령일이 지나고 성전의 뒤편 금지구역에 백여 명의 돌올인 고계수사들이 모여들었다.

천 장에 이르는 광장 중간에는 거대한 진형이 그려져 있었고 곳곳에 백여 개의 중계 영석이 박혀 있었다.

진법의 중간, 진법의 눈에는 대여섯 장 높이의 네모난 회백색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평범한 백석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고색창연했다. 그리고 사면에는 알 수 없는 주술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진법을 중심으로 원영기 상계 선사들만 열댓 명은 되었는데 각자 숙연한 얼굴로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 시진이 지나자 곧 두 명의 여인과 사내 하나가 나란히 금제 밖에서 걸어들어 왔다.

그 중간에 선 은색 장포의 여인은 하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새까만 머리카락과 하얀 피부, 맑은 눈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또 다른 여인은 풍만한 자태를 가진 미녀로 노란 장삼을 걸치고 있었다. 그녀의 보라색 머리카락도 신기했지만 양 어깨에 주먹만 한 해골 두 개가 그녀의 어깨를 물어뜯고 있는 모습이 무척 기이했다.

또 그 옆에 있는 사내는 준수한 용모의 청년으로 겨우 서른 남짓 되어 보였지만 그의 눈빛은 온갖 풍파를 겪은 듯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성녀님과 대선사님을 뵙습니다.”

돌올인 선사들이 그들을 향해 허리를 굽히며 존경을 표했다. 그들은 주변을 돌아보며 제단 서너 장 앞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었다.

“그만 예를 거두시지요. 이번 의식은 성조의 분신을 성전에 머물도록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외지인을 추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번 의식을 성공시키기 위해 두 분 대선사께서 드디어 적합한 제물을 찾아 내셨습니다.”

천란 성녀의 맑은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울렸다.

다들 그녀의 긍정적인 말에 기분이 고조된 듯했다.

사내와 보라색 머리의 여인도 미소를 짓고는 동시에 손뼉을 쳤다. 그러자 둔중한 울림이 광장 밖에서부터 들려왔다.

쿵! 쿵! 쿵! 쿵!

다들 놀라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광장 양쪽에서 두 장 크기의 거대한 청동인간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으며 목갑(木匣)을 짊어지고 광장 중심으로 향했다.

그들이 제단 앞에 이르러 거대한 목갑을 열자 안에는 푸른빛이 반짝이는 들소 모양의 요수와 집채만 한 새하얀 구렁이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두 요수가 발산하는 요기로 보아 두 마리는 모두 7급 최상계로 거의 8급에 가까운 듯 했다. 대선사 두 명이 오랜 시간을 들여 겨우 생포했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청풍우(靑風牛)와 빙갑망(氷甲蟒)은 상고시대 이종이니 제물로 적당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수의 분신이 인계에 머무를 수 있을지는 저희 일족과 인연이 따라야겠지요. 그럼 이제 제를 올리겠습니다.”

천란 성녀가 눈을 반짝이며 거대 요수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은색 실 한 다발이 뻗어 나와 백여 개가 넘는 밧줄로 변해 요수를 칭칭 감았고, 들소의 방대한 몸이 허공으로 떠올라 제단 쪽으로 서서히 날아갔다.

그 순간 의식을 잃었던 청풍우가 깨어나더니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요수는 탈출하려고 몸부림쳤지만 이미 강력한 금제가 걸려있는데다 수백 개의 밧줄로 꽁꽁 묶여 있어 꼼짝하지 못했다.

천란 성녀가 돌연 몸을 돌려 제단을 바라보고 소매를 털자 주먹만 한 푸른 빛덩이가 날아가 들소의 거대한 몸 위로 떠올랐다. 그것은 푸른빛이 도는 작은 솥이었다.

푸른 화염에 휩싸여 끊임없이 빙글빙글 도는 솥은 한 눈에 보기에도 비범해 보였다. 성녀가 수결을 맺으며 주술을 외자 푸른 화염이 더욱 크게 불타올랐고 솥도 크기를 키우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솥은 놀랍게도 한립이 갖고 있는 허천정과 상당히 비슷했다. 허천정과 똑같은 모양에 똑같은 꽃과 새, 벌레, 짐승 등 만물이 그려져 기이하기 그지없었다.

한참동안 주술을 외던 천란 성녀가 손을 뻗어 솥을 가리키자, 솥에서 푸른 빛덩이가 솟아올라 푸른 모래로 흩어지더니 반짝이는 별처럼 제단 위 하늘을 곱게 수놓았다. 보는 이들의 혼을 쏙 빼놓을 듯한 엄청난 광경이었다.

성녀는 그것을 보더니 주술을 멈추고 제단 위에 묶여 있는 요수를 묶은 밧줄을 가리켰다.

그러자 반짝이던 은색 밧줄은 은색 실로 갈라져 칼날처럼 요수의 몸을 갈라버렸고 청풍우는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 피를 흩날렸다.

그때 푸른 모래가 비처럼 제단 위로 쏟아져 내렸다. 요수의 사체를 덮은 듯 푸른빛이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깜빡거리더니 마치 빛들이 피와 살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요수의 몸에서 빠져나온 청록색의 빛덩이가 달아나려는 듯했지만 무수히 많은 푸른빛들이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 청풍우의 원신을 휘감았다.

거대한 요수의 살덩이는 겨우 한 식경 만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요수의 피와 살을 흡수한 푸른 모래는 은은하게 핏기를 머금고 다시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를 지켜보던 천란 성녀는 이번엔 하얀 구렁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역시 은색 실이 사슬 모양의 밧줄로 변해 요수의 몸을 꽁꽁 감았고 제단으로 옮겨졌다.

두 번째 혈제(血祭)를 올리고 푸른 모래는 두 마리의 7급 요수의 영혼과 혈육을 먹고 천천히 핏빛 구름으로 변해 제단 위를 뒤덮었다.

성녀가 솥으로 법결을 날리자 솥이 천천히 제단으로 내려왔다.

“성수 소환을 시작합니다. 두 분께서 도움을 주시지요.”

“그러지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성녀의 말에 청년이 빙그레 웃으며 답하자 보라색 머리의 여인도 입술을 끌어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성녀는 곧 열손가락을 튕겨 법결을 진법 사방으로 날려 보냈다.

그러자 곳곳에서 영기의 빛이 일더니 진법이 발동되기 시작했다. 또한 제단의 거대한 솥이 진법과 호응해 반짝이더니 화염이 매우 약해졌다.

성녀가 앞으로 나아가 고개를 들고 알 수 없는 주술을 외우자 이번에는 양 쪽의 대선사들도 각자 한 손을 뻗어 여인의 어깨 위에 대고 영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드디어 성녀의 전신이 빛나며 이마 위에 소의 머리와 교룡의 몸을 지닌 괴이한 문양이 떠올랐다. 그녀가 두 손을 합장했다 펼치자 양 손바닥에서 빛기둥이 분출되어 솥으로 쏘아져나갔다.

솥은 쉼 없이 돌며 하얀 빛기둥을 빨아들였고 갑자기 푸른 안개를 분출해 머리통만한 빛덩이로 응결되었다. 또한 손바닥의 빛기둥은 가늘어졌다 굵어졌다 하며 솥의 안개를 미세하게 조절했다.

시간이 지나자 빛덩이의 광채가 눈에 띄게 달라졌고 안에서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때 진법이 공명하며 사방에서 오색의 빛기둥이 솟아나 빛덩이를 향해 스며들었다.

천란 성녀는 더욱 정신을 집중해 주술을 외워댔다. 그리고 또 다시 한 식경이 자났다.

쿠르릉!

빛덩이가 수축했다 커졌다 하며 갈라지더니 푸른빛이 작열하다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 대신 달걀 크기의 푸른색 동굴이 나타났는데 그것마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졌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그 안에서 새빨간 빛이 빠져 나와 허공의 핏빛 안개 속으로 쏘아져 올라갔다. 핏빛을 머금은 모래알들이 자석이라도 되는 듯 붉은 빛줄기를 감싸 앉더니 한 자 크기의 거대한 핏빛 고치를 만들어냈다.

푸른 화염이 두세 장 높이까지 치솟아 솥을 뒤덮었고 제단 아래의 진법은 빛을 흩뿌리며 영기를 모아 푸른 화염 속으로 파고들었다.

천란 성녀는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

“소환 의식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수의 분신이 인계에 남을 수 있을지는 30일 가량 지나야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성공한다 해도 오래 머물지는 않겠으나 7, 8일 정도이면 충분히 그 외지인을 찾아 낼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 휴식을 취하고 성수의 육체가 만들어지면 저와 두 분 대선사를 따라 외지인 추격에 들어가면 될 듯합니다.”

성녀가 주변을 돌아보고는 맑은 목소리로 알렸다.

광장의 돌올인 선사들이 하나 둘 가고, 성녀와 두 명의 대선사만 남게 되었다.

“서 선사님, 손 선사님. 수고스럽겠지만 두 분께서 이틀간은 이곳을 지켜주셔야겠습니다.”

“당연하지요. 저희도 이 일을 위해 십여 년을 공을 들였습니다. 성공이 눈앞에 있으니 당연히 저희가 해야지요.”

천란 성녀의 말에 보라색 머리의 여인이 곧장 대답했다. 그리고 청년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말에 성녀가 안심하려는 찰나 솥에서 희미하게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세 선사들은 시선을 교환하며 제단에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 * *

이틀 후, 천란 성전에서 그윽한 종소리가 연달아 울리자 아직 그곳을 떠나지 못한 인근의 각 부락민들과 저계 수도자들은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며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전 방향에서 열댓 개의 빛줄기가 솟아올라 화려한 모습으로 남쪽으로 뻗어나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비록 너무 빨라 누가 움직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고계 선사가 내는 영기의 빛이라는 것을 알기에 모두 깜짝 놀라 할 말을 잃었다.

* * *

사흘 후, 천란 초원의 가장 큰 강인 천수강 남단의 수면 위에 푸른 빛줄기가 날아들어 크게 원을 그리더니 멈추었다. 뜻밖에도 소의 머리에 교룡의 몸을 한 새빨간 요수였다.

요수는 크기가 서나 장이나 되었고 전신이 푸른 안개로 둘러 싸여 머리 위에 천란 성녀를 얹고 있었다.

잠시 후 하늘에서 연달이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그것은 두 대선사를 선두로 한 선사 무리였다.

“임 선사, 성수가 그 자를 찾은 것입니까?”

보라색 머리칼의 여인이 입을 열었다.

“아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많은 서금충을 지니고 있으니 아무리 영수대 안에 숨겨 놓았어도 성수의 감각을 피할 길이 없을 테지요. 이곳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근방에 있을 겁니다. 간교하게도 강 아래에서 둔술을 이용해 이동하다니 그렇게 많은 분들이 나서도 종적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 그럼 정말 그 자가 음라종 장로인지 확인할 해볼 때입니다. 호 선사의 대오행금선수에 당하고도 이렇게 초원을 활보하고 다니다니 저도 그 자의 능력이 퍽 궁금해집니다.”

그들의 말에 준수한 청년이 냉랭히 말했다.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도 없고 무척 젊어 보인다고 합니다.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 확인해 보고 싶군요.”

보라색 머리 여인이 유유히 그의 말에 동조했다.

“기왕 두 선사께서 그리 마음이 급하시다니 어서 움직이시지요.”

성녀가 빙긋 웃으며 성수에게 무어라 일렀다. 그러자 성수가 콧김을 내뿜으며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나아갔다.

이에 다른 돌올인 수도자들이 서둘러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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