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2
502화. 출수(出手)
청년이 나타난 이후 이들은 대진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기에 돌올인들은 무슨 일인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미리 대진의 언어를 배워온 한립은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궁주에? 통령? 평범한 수도 종파에서 쓸 호칭이 아닌데……. 대진도 난성해처럼 크고 작은 세력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인가? ’
비록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범인들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몰래 뒤로 후퇴하는 중이었다. 물론 돌올인 수사는 오해를 살까봐 함부로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불 구름과 안개가 충돌하자 열기와 냉기의 극렬한 싸움 속에 수증기가 사방으로 가득 퍼졌다. 아무리 설정주가 신묘한 보물이라도 겨우 축기기 수사가 부릴 수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냉기의 안개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청년은 최선을 다해 구슬에 영력을 불어넣었지만 불 구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어느 정도 시간을 끄는 것은 가능했다.
“고 통령이 나서주시지요. 쓸 데가 있으니 생포해야 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인이 옆의 사내를 돌아보았다.
“걱정 마십시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하얀 빛줄기로 변해 냉기의 안개 속으로 쏘아져 나갔다. 여섯 축기기 수사들은 동시에 불 구름을 거두어 들렸다.
곧 안개가 출렁이고 안에서 ‘펑’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점차 시야가 밝아졌다. 사내는 거만하게 서서 기절한 청년과 설정주라는 구슬을 양 손에 각각 들고 있었다.
결단기 여인이 그것을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기색을 나타났다.
“잘 지키거라.”
사내가 청년을 수하 중 하나에게 던져 주고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한립 등을 향해 서늘한 시선을 보냈다.
사내가 잠자코 돌아가려다가 무의식중에 땅에 떨어진 무언가를 발견하고 놀라 외쳤다. 한립도 재빨리 무엇인지 보니 반투명한 돌멩이가 한 덩이 놓여 있었다.
“금염석(金焰石)! 아니, 금염석이라니! 녀석아, 네게 정말 천운이 따르는 모양이구나.”
한립이 무언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엇인지 떠올리지 못했는데 대연 신군이 놀라 소리쳤다. 그러자 한립도 생각이 났다.
저 돌멩이가 바로 칠염선을 제련하는데 가장 필요한 재료였던 것이다. 천남에서는 사라진지 오래였고 대진에서도 찾기 어렵다는 그런 진귀한 보물이었다.
이때 사내도 돌덩이가 무엇인지 알아보았는지 기뻐하며 금염석 옆으로 이동해 허리를 굽혔다.
쉭!
사내의 눈앞에서 금빛이 번쩍이더니 금염석이 허공으로 떠올라 어딘가로 쏘아져 나갔다. 대진 수사는 물론이고 아무 것도 모르고 있던 돌올인들까지 놀라 어안이 벙벙해졌다.
사내가 손을 쓰기도 전에 금염석이 빛줄기로 변해 한립에게 들어간 것이다. 한립은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돌멩이를 들고 살피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결단기 사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걸 당장 내놓는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그는 한립을 노려보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한립은 대연 신군에게 돌멩이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고는 그대로 저물대에 넣어버렸다.
“저도 이게 마음에 들어서 말입니다. 수사에게 넘기기도 싫고 불구가 되기도 싫으니 그냥 가시지요.”
한립의 말에 사내가 열이 받았는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당장이라도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고 통령, 무슨 일입니까? 그 돌멩이가 대체 무엇이기에 그러십니까. 중요한 게 아니라면 그냥 가시지요.”
결단기 여인이, 한립의 정체가 보이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눈치 채고 입을 열었다. 고 통령도 그 말에 잠시 주저하다 입을 달싹이며 전음을 보냈다.
잠시 후, 하얀 장포를 입은 여인도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 그런 물건이……. 착각한 것은 아니지요?”
“절대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전 연기부(煉器部) 출신입니다. 을 달달 외우고 있는데 어찌 이런 보물을 알아보지 못할까요. 만일 저것을 궁주께 가져가면 겨우 설정주를 회수하는 것이나 배신자를 잡아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사내의 말에 여인은 다시 한 번 한립의 몸을 훑어 확실히 축기기 수행인 것을 확인하고는 차갑게 눈을 빛냈다.
“움직이시죠! 저 자 뿐만 아니라 이곳에 모인 돌올인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없애야 합니다. 증인이 없으면 천란성전에서도 겨우 저계 선사 몇과 범인들을 위해 우리 선궁을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기껏해야 이번에 거래하는 물건의 가격을 조금 덜 쳐주면 될 일입니다.”
여인이 눈썹을 끌어올리며 즉시 입에서 은빛을 분출해 축기기 돌올인 선사에게 날렸다.
돌올인 선사는 불똥이 튈까 이미 남색 보호막을 두르고 있었지만 결단기 선사의 공격을 막을 리 없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보호막과 함께 두 동강이 나서 쓰러졌다. 은빛은 한 바퀴를 돌아 원래 모습을 드러냈는데 한 자 길이의 비도였다.
다른 축기기 대진 수사들도 여인의 명령을 듣고는 바로 법기를 발동해 나머지 돌올인 선사 세 명을 덮쳤다. 멀리 도망간 범인들은 나중에 처리해도 충분했다.
대진 수사들이 갑자기 공격을 해오자 돌올인 수도자들은 놀라면서도 분개했다. 하지만 겨우 축기 초기 한 명과 연기기 선사 두 명이서 어찌 여섯 명의 축기기 수사의 협공을 막아 내겠는가.
그들은 최선을 다해 대항했지만 순식간에 하나둘씩 죽어나갔다.
두 명의 대진 수사가 바로 풍악이 있는 마차로 방향을 틀어 아직도 나서지 않는 그를 죽이려고 했다.
거대 박쥐 위의 결단기 여인은 그것을 보며 아무런 표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결단기 사내를 보고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사내는 여인의 명이 떨어지자 바로 본명 법보인 비검을 분출해 한립을 베어버리려고 했지만 놀랍게도 한립이 발동한 보호막에 부딪혀 튕겨 나온 것이다.
사내가 다시 법결을 날렸고 하얀 빛줄기는 허공을 돌며 몇 자 길이의 거대한 구렁이로 변해 검은 보호막을 휘감았다. 구렁이는 붉은 입을 벌려 당장이라도 보호막을 뜯어낼 것 같았다.
하지만 검은 보호막은 강철로 만들어지기라도 한 듯 조금의 균열도 없이 단단함을 드러냈다. 백의 여인은 그것을 보고 마음이 무거워졌다.
상대가 결단기 수사의 물건을 탐한다면 분명 믿는 구석이 있을 것이다. 여인은 즉시 비도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그녀의 법보가 몸을 떨더니 은색 빛줄기로 변해 검은 보호막을 사납게 내리쳤다.
그러나 하얀 구렁이와 은빛 비도의 공격에도 검은 보호막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에 백의 여인과 사내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너희는 마차 안의 녀석은 신경 쓰지 말고, 일단 화염진을 펼치거라.”
그 말에 축기기 수사들이 바로 붉은 진법 깃발을 꺼내들었다. 진법이 발동되자 커다란 불 구름이 상공에 떠올라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했다.
“좋구나. 더 이상 시간 끌 필요가 없어졌어.”
이때 보호막 속에서 한립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어두운 녹색의 원영이 까르르 웃으며 손에 검은 깃발을 들고 나타났다.
“원영! 워, 원영기 수사셨습니까! 자, 잠시만 멈춰주십시오! 저희가 당장 물러나겠습니다. 절대 선배님의 것을 빼앗으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영을 본 여인은 심장이 철렁했다. 그녀는 서둘러 애원하며 자신의 법보를 거둬들이려 했다. 하지만 한립의 두 번째 원영은 냉소하며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깃발을 내던졌다.
순식간에 몇 배 크기로 거대해진 깃발에서 검은 기운이 마구 용솟음쳐 큰 마기의 구름을 형성했다. 막 돌아가려던 비도나 거대한 구렁이 그리고 불 구름 까지 모두 마기의 구름에 휩쓸려 들어갔다.
사내와 여인 그리고 축기기 수사들은 곧 자신의 법보와 연계가 끊어진 것을 느꼈다.
“음라번! 음라종의 진법 장로셨습니까!”
사내가 깃발 모양을 보고 혼비백산해서 소리쳤다. 그는 온 몸의 영기를 불러 일으켜 달아나기 시작했다.
백의 여인도 사내가 음라종의 보물인 음라번의 정체를 알아차리자 곧바로 거대 박쥐의 체내에 법결을 던져 넣으며 순식간에 방향을 틀었다.
거대 박쥐는 몸집이 불어나서는 녹색 빛을 내뿜으며 울부짖었다. 곧 녹색 빛줄기가 된 거대 박쥐와 여인은 사내와 정반대 방향으로 날아갔다.
마도 종파의 습성을 알았기에 상대가 자신들을 살려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인은 괜한 일을 만들어 일을 이 지경까지 만든 사내가 원망스러웠다.
나머지 축기기 수사들도 두 결단기 수사가 달아나자 경악해서는 동시에 여러 방향으로 법기를 타고 날아갔다.
한립은 흩어져 달아나는 대진 수사들을 보며 저물대를 스쳐 새하얀 지네들과 검은 기운의 서금충 무리를 불러냈다.
새하얀 지네들은 여섯 축기기 수사들을 추적하고, 핏빛으로 빛나는 서금충들은 두 날개를 펄럭이며 금빛 빛줄기로 변해 결단기 사내를 뒤쫓았다.
그리고 원영은 서금충들이 날아간 후 몸을 날려 음라번에 앉더니 마기의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마기의 구름이 출렁였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백여 장 위의 상공에 나타나 거대 박쥐 쪽으로 뻗어나갔다. 검은 구름이 하늘에 드리우자 마신(魔神)이라도 강립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한립은 허공에 떠서는 무표정하게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돌올인 범인들은 이런 엄청난 광경을 생전 처음 보는데다가 자신들의 선사들이 비명횡사하자 질겁하고는 벌써 저 멀리 달아나고 있었다.
가끔 간이 큰 자들은 주변에 남아 지켜보기도 했지만 한립의 엄청난 기세에 감히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잠시 후, 새하얀 지네들은 여섯 축기기 수사들을 따라잡았다. 겨우 축기기인 수사들이 육익상공의 적수가 될 리 없었다. 아직 유충이지만 대량으로 뿜어대는 한기(寒氣)에 수사들은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변해 산산이 부서져나갔다.
또한 하얀 빛줄기로 변해 달아나던 사내는 본명 법기를 잃었기에 곧 서금충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그는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다 곧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나마 백의 여인이 탄 거대 박쥐가 둔술에 특화된 종으로 빠르긴 했지만 한립의 두 번째 원영이 부리는 마기의 구름에 수십 리를 쫓고 쫓기다가 결국엔 잡히고 말았다.
이렇게 여인을 비롯한 대진 수사들은 역시 소리 없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두 번째 원영이 마기의 구름을 몰고 돌아왔을 때 한립은 표정이 좋지 않았다.
한립은 죽은 대진 수사들이 청년에게 뺏은 설정주를 찾아냈지만 정작 그는 숨이 끊어져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청년을 깨워 대진 수사들의 정체를 물어보려 했는데 스스로 독을 써 자진한 것이다.
청년은 독하게 마음을 먹었는지 미리 극독을 복용하고 전투에 나선 것 같았다. 그러면 잡히더라도 혼백을 뽑혀 제련당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한립은 고개를 저으며 난감해했다. 그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청년의 시체를 재로 만들어 버렸다.
잠시 후, 마기의 구름이 돌아오자 두 번째 원영이 검은 깃발을 펄럭였다. 광풍이 몰아치고 마기의 구름이 깃발 속으로 사라지자 두 번째 원영도 한립의 정수리 속으로 사라져 종적을 감추었다.
그제야 한립이 사방을 둘러보니 돌올인 범인들이 먼 곳에서 이쪽을 바라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이제 여기서 더 머물 수 없으니 갑시다. 독이 발작하기 전에 비밀 동굴의 위치를 알려줘야 할 게 아니오.”
한립이 남겨진 마차 중 하나를 향해 말했다.
“음라종 장로셨군요! 어쩐지 풍침 그 사악한 영감탱이를 쉽게 죽인다 했습니다. 또 호원단 같은 귀한 단약을 지니고 계신다니 역시 음라종 장로셨군요.”
마차의 가리개가 천천히 올라가더니 풍악이 삿갓을 쓰고 걸어 나왔다.
“음라종 장로라…….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하고 일단 갑시다.”
한립이 냉소하고 즉시 비검을 방출해 날아올랐다. 풍악도 잠시 주저하다가 바로 그를 따라갔다. 동시에 두 빛줄기가 멀리 사라졌다.
그제야 멀리서 지켜보던 돌올인들이 마차로 돌아왔다. 다들 서로 눈치만 살피며 쓴웃음 지을 뿐이었다. 그들이 고용한 선사들이 죽거나 사라지는 통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