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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499화 (256/2,000)

# 499

499화. 호원단(昊元丹)

약병을 뒤집자 새빨간 단약이 굴러 나왔다. 고계 요단을 제련해 만든 영약이었기에 한립도 쓰기 아까운 것이었다.

만일 법력이 봉인당하지 않고 은월도 큰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간단히 추혼술을 사용해 정보를 알아냈을 것이다.

그가 남색 장포 청년의 턱을 당겨 푸른 기운에 싸인 붉은 단약을 집어넣었다.

곧 그의 손에는 빛이 반짝이는 가느다란 침 하나가 들려있었다.

피피피핏!

서늘한 빛을 뿜어내는 은침은 몇 개의 은실로 변해 남색 장포 청년의 전심을 찔러댔고 그 사이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와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한립은 뒷짐을 쥔 채로 한쪽으로 물러나 그 자가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렸다.

일다경이 지나자 풍악은 독이 깃든 피를 거의 배출했는지 겨우 신음을 내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한립이 눈을 빛내며 열손가락을 튕기자 끊임없이 빠져 나오던 독혈이 멈추고 어깨에 앉아 있던 두 번째 원영도 새까만 기운과 같이 한쪽 숲으로 사라졌다.

“당신은…….”

남색 장포의 청년이 드디어 눈을 뜨고 한립을 알아보았다. 그가 놀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어찌 눈앞에 제가 서있어서 놀라셨습니까?”

“수사께서 저를 구해주신 겁니까?  풍침 그 영감탱이는 어찌 되었습니까?”

“보라색 장포를 입은 수사를 말하는 거라면 저쪽에 있습니다.”

한립이 한쪽으로 눈짓했다.

풍악이 최선을 다해 고개를 돌리다가 노인이 형체도 남지 않고 핏덩이가 된 것을 보고 곧 시선을 돌려 의아하다는 듯 한립을 보았다.

“저 영감탱이는 한 형에게 당한 것입니까?  보아하니 한 형의 능력이 대단하십니다. 목숨을 살려주신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풍악이 그를 떠보며 동시에 허리춤에서 단약을 하나 꺼내 입에 놓고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완전히 다리를 펴기도 전에 무릎이 풀어져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잖습니까?”

풍악이 바닥에 엎어져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가 금제라도 걸었을까봐 그러십니까?”

“이게 어찌 된 일이냔 말입니다.”

청년이 한립을 노려보았다.

“내가 금제를 걸었을 거라 생각하다니 스스로를 너무 높게 평가하는 군요. 그럴 필요나 있나 확인해 보시지요.”

한립은 냉소하며 손을 뻗어 무언가를 풍악에게 던져주었다. 평범한 청동거울이었다.

풍악이 의문을 품고 한립을 쳐다보았지만 상대는 별 다른 표정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문 그가 거울을 들어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이, 이런! 내 얼굴이……. 이런 독기라니, 언제 중독이! 설마 그 교활한 영감탱이가 내게 독을?”

풍악은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고 기함을 해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는 서둘러 저물대를 뒤집어 대량의 약병들을 쏟아냈다.

그 중 여러 약병을 뒤적여 이것저것 삼켜대는 풍악을 보며 한립은 여전히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단약을 복용한 풍악은 한립에게 다시 고마움을 표하거나 사과를 할 틈도 없이 바로 가부좌를 하고 운기조식에 들어갔다. 약의 힘을 빌려 독 기운을 몸 밖으로 밀어낼 생각인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얼굴엔 분노만 짙어졌다.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야!?  해독용 성약들이 전부 무용지물이잖아! 대체 무슨 독에 중독이 되었기에…….”

그가 드디어 극독의 위력을 깨닫고 조급해하기 시작했다.

“이전에 본 적은 없지만 아마 십절독 중 하나인 고독일 겁니다.”

그제야 한립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고독이요?  그런 독까지 사용하다니! 그 영감탱이가 과연 공 가와 한통속이었군요. 공 가에 그런 독약이 있다고 들은 바가 있습니다.”

‘공 가? ’

한립은 슬쩍 미간을 좁혀다가 폈다.

“그런데 정말 고독이라면 내가 어찌 살아 있단 말입니까?”

청년이 갑자기 무언가를 깨닫고는 한립을 의심했다.

“흥, 알면 다행입니다. 몇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없었다면 어찌 귀한 호원단(昊元丹)을 낭비해가며 당신을 살려두었을까요. 거기에 당신 목에 걸린 물건이 잠시 독기를 막아 주어 심장을 보호했기에 깨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걸 건드렸소?”

청년은 한립이 은백색 목걸이를 언급하자 화들짝 놀라 자신이 목숨보다 아끼는 물건이 어느새 바깥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찌 축기기 수사가 고독에 당하고도 바로 죽지 않았는지 궁금해서 말입니다. 허나 호원단이라고 해도 독기를 잠시 억누를 수 있을 뿐 하루가 지나면 독기가 심장을 공격해 죽게 될 것입니다.”

“호원단을 어디서 들어보았는데……. 엄청 진귀한 단약이 아닙니까?  그것을 계속 복용만 하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습니까?”

풍악이 곰곰이 생각을 해보더니 긴장된 기색으로 물었다. 상대가 호원단을 들어보았다는 소리에 한립은 의아했지만 바로 냉담하게 대답 했다.

“계속 복용하면 잠시 목숨을 이어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무엇으로 제련 한 것인 줄이나 압니까?  본래 해독 따위가 아닌 결단기 수사들이 수행의 난관을 뚫을 때 사용하는 영단이라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귀한 보물이에요.”

“결단기 수사들의 수행을 늘려준단 말입니까?”

풍악도 단약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깨닫고 말이 없어졌다.

“허나 살고자 한다면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한 형이 어떤 조건을 제시한다고 해도 응하겠습니다.”

“큰 보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고. 몇 가지 궁금한 것 있으니 솔직히 대답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지요! 제가 아는 것이라면 절대 어떤 것도 숨기지 않겠습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극독에 중독되어 이미 몸은 구할 길이 없으니 아예 다른 육체를 구하는 겁니다. 십절독에 당한 수사들 중 상당수가 그런 식으로 목숨을 유지하곤 했지요.”

“다른 육체를요?”

청년이 아연해 하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찌, 문제가 있습니까?”

“한 형이 저를 위해 고민해 주신 것은 감사하나 다른 수사라면 몰라도 저는 안 될 듯합니다.”

한립의 물음에 청년이 주저하며 답했다.

“그렇다는 것은…….”

한립도 예상되는 바가 있어 내심 놀랐다.

“맞습니다. 이미 한번 다른 수사의 육체를 빼앗아서 그러합니다. 이 육체도 본래는 제 것이 아니고요.”

“그렇다면 방법은 없겠습니다. 어쨌든 십절독은 해약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독이 아닙니까.”

한립이 한숨을 쉬며 두 손을 들어올렸다.

“정말…… 정말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한 형은 견식이 넓으시니 다시 한 번만 생각해 주십시오.”

풍악이 간절히 빌기 시작했다.

“생각할 것도 없지요. 십절독이 해약이 있었다면 십절독이라고 불렸겠습니까?”

한립이 고개를 저었다.

“그 말은 제게 겨우 하루 밖에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말이군요.”

청년이 혈색 없는 얼굴로 굳어갔다.

“호원단을 계속 복용한다면 며칠 더 살 수는 있겠지만 약기운이 떨어지는 순간 죽을 겁니다.”

“한 형은 호원단을 얼마나 지니고 계신지요?  제게 파실 수는 없겠습니까?”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풍악이 한립을 쳐다보았다.

“풍 수사가 살 능력만 된다면 팔수는 있으나 수량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제 질문에 대답을 해주셔야 하고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몸이 이 지경인데 대답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럼 먼저 수사에 대해 묻겠습니다. 돌올인은 아닌 듯 한데 대진의 세가에 속한 수사입니까?”

“이미 예측하고 있으면서 물으십니다.”

풍악은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의 옥패와 가슴에 걸린 은백색 열쇠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마 한립이 그 두 가지를 보았다면 당연히 자신의 정체를 알 것이라 생각한 것 같았다.

“옥패에 쓰인 ‘저중풍’이 무엇을 뜻하는 겁니까?”

“당연히 관저의 풍 가이지 어디겠습니까?  관저부에서는 꽤 큰 세력입니다.”

“관저부라면 어떤 주에 있는 부(府)를 말하는 것인지?”

“대진에 관저부가 여러 개지만 관저부 풍 가가 있는 곳은 오직 료주 하나입니다.”

풍악은 한립이 이리 자세히 묻는 것이 이상했지만 한립은 그의 의문에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엔 옥패를 가리켰다.

“그럼 그것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난 것입니까?”

“이 령하패(玲霞佩)는 부친이 풍 가의 신물(信物)이라며 남겨주신 겁니다. 이건 왜 물어보십니까?”

“신물?  풍 가의 제자라면 누구나 그런 최상급 법기를 신물로 사용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요?”

“당연히 아니지요. 풍 가 전체에 이런 신물은 오직 서너 개 뿐입니다. 직계 혈맥인 제자가 아니면 지닐 수 없는 물건이지요.”

“그렇다면 수사의 지위가 가문에서 꽤 높겠습니다.”

“전 풍 가의 장손이니 이변이 없었다면 몇 십 년 후에는 풍 가를 물려받았을 지도 모릅니다.”

풍악이 입술을 꿈틀거리며 통한에 젖었다. 거기까지 들은 한립은 상대의 가문에도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했다.

“풍 가는 대진의 불가 종파와는 무슨 관계입니까?  신물에 그렇게 심후한 불가의 영력을 심어 놓은 것을 보면 분명 연관이 있을 텐데요.”

“인연이 있기는 하지요. 풍 가의 한 선조께서 이전에 관저부 천광사(千光寺)의 속가 제자였다고 합니다. 천광사는 대진의 불가 종문 중 하나인 금라종의 분파였고요. 그래서 저희 풍 가도 본래 불가 공법을 위주로 수련하였습니다. 하지만 천광사가 수백 년 전 료주 밖으로 이전을 해 저희도 유가 공법으로 수련 공법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풍악은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숨김없이 답했다. 그 말에 한립은 속으로나마 기뻐했다.

천광사는 처음 들어 보았지만 금라종이 대진의 4대 불가 종문 중 하나라는 것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풍 가도 이전에는 가장 정통한 불가 공법을 익혔을 것이다.

“그런 불가 공법에 대해 아는 바가 있습니까?”

“익히지도 않은 공법의 법결을 어찌 외우고 다닐까요. 하지만 가문 자체에서는 몇몇 공법과 수련 방법을 보존하고 있기는 합니다.”

주저하던 풍악이 대답했다. 눈앞의 정체 모를 상대가 불가 공법에 흥미를 보이니 점점 의아함만 커졌다.

불가 공법이 나중에야 위력이 크다지만 수련 속도가 극히 느리고 수련 방법이 고행에 가깝다는 것은 대진 수도계의 수사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솔직히 자기가 원해서 불가 종문의 법결을 배우고자 하는 이는 정말 소수였다.

“녀석의 어떤 선조가 어느 정도까지 불가 공법을 익혔었는지 물어 보거라. 사리자(舍利子)를 제련해 냈었는지도. 사리자를 제련해낸 불가 문중의 수도자만이 살기를 없앨 수 있다.”

대연 신군이 그를 일깨웠다.

사리자란 불가 문파의 특수한 물체였는데 어떤 이는 결단기에 또 어떤 이는 원영기에 이러서야 이것을 제련해낸다. 불규칙해 보이는 사리자는 불문 밖의 수사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신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불문의 상당히 많은 공법과 신통력들은 사리자를 지닌 수사만이 펼칠 수 있었다.

“사리자요?  제 선조께서도 그것을 제련해 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쉽게도 자질이 떨어져 원영기에 들지 못하자 저희 풍 가를 세우게 되셨고요.”

풍악이 미간을 좁혔다.

한립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보아하니 운이 따라주는 모양이었다. 대진에 이르기도 전에 살기를 제거할 공법을 구할 수도 있을 듯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절로 얼굴이 펴졌다.

“그런데 축기기 수사인 당신에게 상대는 어찌 고독을 썼을까요?  십절독은 어떤 면에서는 진귀한 단약보다 더욱 귀한 것인데요. 결단기 수행으로 그냥 죽이면 그만 아닙니까.”

“아……. 그건 풍침이란 늙은이가 본래 풍 가가 거둔 마도 수사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고계 수사에게 죄를 짓고 달아나던 그를 풍 가가 거둬 주고 이름까지 내려주었는데, 그때는 조부께서 건재하시고 풍 가 세력이 강력할 때였지요.

그 이후로 그는 줄곧 풍 가와 돌올인 부락 몇몇 사이의 교역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영감탱이가 공 가와 결탁해 주둔지에 있던 저를 유인해 고독을 쓸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의 몸에는 비술이 걸려 있어 풍가의 축기기 이상 직계 혈족은 그의 수행을 제한할 수 있기에 그런 방식으로 암습을 한 것입니다.”

풍악은 말을 하면서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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