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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497화 (254/2,000)
  • # 497

    497화. 냉담

    이번 원정에 선발된 여인들은 당연히 각 부락에서 손꼽히는 인재였고 외모도 뛰어났다. 영로가 뒤에서 들리는 웃음소리에 고개를 저으며 그들을 단속하려고 했다.

    ‘선사께서 화라도 내시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그런데 그때 허공에서 날카로운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독수리 같기도 한 야수의 울음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노인이 그 소리를 듣고 바로 안색이 변해 옆의 거한을 바라보았다. 거한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장 모두 말에서 내려 피하거라. 요수 원취(猿鷲)가 나타났으니 어서 한 선사님을 모셔와!”

    노인이 급히 일갈하자 거한도 자신의 부락민들에게 비슷한 명을 내렸다.

    “마차 뒤로 숨고 어서 풍 선사님께 요수가 나타났다고 알리거라!”

    원취라는 이름을 듣자 무리가 시끄러워지더니 다들 대경실색해서 말에서 내렸다. 사람들은 창백해진 얼굴로 마차 뒤에 숨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하늘에 새까만 점 세 개가 나타나 점점 커지더니 순식간에 갈색 요수가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원숭이 머리에 새의 몸을 한 원취들은 두 날개를 펴고 모골을 송연하게 하는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원취는 초원에 서식하는 이급 요수에 불과했지만 동급의 다른 요수에 비해 훨씬 흉포했다. 일단 무언가를 잡아채면 돌이든 쇠든 부숴버렸고 기이한 울음소리는 사람의 혼백을 홀리는 효과가 있어 범인은 물론이고 축기기 저계 선사들도 상대하기 어려웠다.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이냐?  겨우 2급 요수 몇 마리를 가지고는 호들갑은.”

    홍랑부의 마차 안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리고는 붉은 빛이 반짝이며 비단 수건이 허공에 펼쳐졌다. 그걸 본 영로는 조금 놀랐다.

    홍랑부 선사 역시 삿갓을 쓴 청년이었던 것이다.

    “풍 선사님 조심하셔야 합니다. 원취가 무려 세 마리나 됩니다.”

    거한이 주의를 주었다. 고용 전에 풍 선사가 겨우 축기기 초기의 선사라는 소리를 들었기에 걱정이 된 것이다.

    노인이 서둘러 한립이 타고 있던 마차를 쳐다보니 삿갓을 쓴 청년이 푸른빛을 내며 마차 위에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때 원취들도 남색 장포의 선사를 발견했는지 백여 장 위를 선회하며 머뭇거렸다.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남색 장포의 청년은 원취가 자신을 보고도 바로 달아나지 않자 참을성이 다했는지 바로 한 손을 들어 부적 몇 장을 꺼내들었다. 부적들은 순식간에 기다란 불 뱀이 되어 요수들을 향해 날아갔다.

    ‘화사술(火蛇術)? ’

    마차 위에 서 있던 한립은 의아했다.

    불 뱀을 만들어 내는 화사술은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부적을 여러 장 지니고 있는 것은 일개 축기기 선사에게는 사치스런 일이었다.

    상대가 절대 평범한 수도자가 아닐 거라는 생각에 한립은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곧 미간을 좁히며 탄식했다.

    원취 세 마리가 불 뱀들을 가볍게 피하고 만 것이다. 남색 장포의 청년은 화사술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졌다. 중간에 불 뱀을 조종해 적을 쫓게 할 생각을 못하고 아깝게 부적만 날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요수들만 열 받게 된다. 세 마리 중 체구가 가장 큰 원취가 날개를 접고 남색 장포 선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남색 장포 선사는 부적이 통하지 않고 요수들이 자신을 향해 달려들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는 허둥거리다가 하얀 검을 꺼내 무언가 중얼거리더니 공격을 하려했다. 한립은 그 모습을 보고 쉼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요수가 공격을 가하는데 바로 보호막부터 펼쳐야지 뭐하는 건가?  정말 전투 경험이 없는 초보가 틀림없었다. 그나마 법결을 빠르게 읊어 요수들이 지척에 왔을 때 겨우 법기를 발동할 수 있었다.

    검이 몇 척의 기다란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고 원취 중 하나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하얀 빛줄기를 잡으려다 발이 잘려나갔다.

    하지만 다른 두 마리는 그의 왼쪽과 오른쪽에서 여전히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며 달려드는 중이었다.

    남색 장포 청년이 대경실색해서 비단 법기를 쓰려다 두 마리 원취들이 처절한 울음소리를 내지르자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신형을 가누지 못했다.

    퍼펑!

    어디에선가 주먹만 한 불덩이 두 개가 날아와 두 마리 요수들을 공격했다.

    폭음이 들리고 붉은 빛이 가신 뒤 화염에 둘러싸인 원취 때문에 주변 온도가 올라갔다. 덕분에 원취의 처절한 울부짖음도 멈추었다.

    남색 청년은 살아남은 것에 희색을 표하며 바로 법기를 발동해 몸에 부적 한 장을 붙였다. 그러자 곧 노란 보호막이 주변에 나타났다.

    겨우 안심한 남색 장포 청년은 수련과 실제 전투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막 축기에 성공하고서 요수의 손에 죽을 뻔한 것이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상대 부족의 삿갓을 쓴 한립을 바라보았다.

    수행이 봉인되어 축기기의 한립이 쏘아 보낸 불덩이로는 당연히 이급 요수 두 마리를 단번에 죽일 수 없었다. 원취들이 바로 화염에서 솟아올라 더욱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깃털이 불타버린 요수는 이번엔 곧장 한립을 향해 달려들었다. 물론 다리 하나가 잘린 원추는 남색 장포 선사를 향해 달려들었지만.

    한립은 날아오는 요수들을 보며 영수대를 스쳐 하얀 빛 두 줄기를 방출했다.

    그러자 새하얀 지네 두 마리가 나타났다. 원취에 비해 크기는 아주 작았지만 지네는 영수대를 나서자마자 흥분해서는 두려움을 모르고 돌진했다.

    원취들은 지네를 보고는 급격히 안색이 달라져서는 신형을 멈추고 당장이라도 달아나려고 했다. 상고 기충의 기운에 감히 접근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네들은 요수들을 놓아 줄 마음이 없는지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하얀 기운에 휩싸여 원취들 사이로 사라졌다.

    이에 한립은 더 이상 지켜보지 않고 남색 장포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구슬땀을 흘리며 비검 법기를 사용해 중상을 입은 원취를 상대하고 있었다.

    원취는 부상을 당하고도 어찌나 흉포한지 날카로운 발톱으로 보호막을 찢을 듯 달려들었다. 게다가 요수가 내는 기이한 울음소리는 계속해서 청년의 의식을 흐트러뜨려 제대로 정신을 집중할 수 없게 했다.

    비검은 상계 법기로 나름 좋았지만 조종이 서툴러 그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니 다른 법술을 쓰거나 부적을 쓸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한립이 차가운 눈빛으로 원취를 보고는 어찌할까 생각하는데 요수가 무슨 낌새를 눈치 챘는지 돌연 남색 장포 청년을 놔두고 두 날개를 펼쳐 달아났다.

    남색 장포 청년이나 한립 모두 의외의 상황이었으나 한립은 즉시 손을 뻗어 붉은 선을 쏘아 보냈다.

    쉭!

    달아나던 요수는 몸을 떨더니 허공에서 조각나 떨어져 내렸다.

    모란 초원의 원취들은 원한을 품으면 기억해 두는 습성을 지녔기에 한 마리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한립의 수법에 놀란 남색 장포 청년의 표정이 달라졌다.

    “비침?  바늘 형태의 법기를 가지고 계시군요.”

    “안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한립이 상대를 힐끗 보고는 손짓해 붉은 바늘을 거둬 들였다.

    “그건 아니지만…….”

    상대가 무언가 해명하기도 전에 푹! 푹! 하는 소리가 두 번 울렸다.

    수정 같은 거대한 얼음덩이들이 떨어져 내린 것이다. 얼음덩이들 속에는 원취가 들어 있었고 꽁꽁 언 요수들은 이미 생기가 없었다.

    남색 장포 청년이 두 눈을 부릅뜨니 얼음덩이에서 하얀 빛 두 개가 빠져나와 한립의 양 어깨에 내려앉았다. 새하얀 지네 영수들이었다.

    “키우시는 영충들입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키우는 한설오공들입니다.”

    놀란 청년의 물음에 한립은 지네 중 한 마리를 쓰다듬으며 담담히 답했다.

    한설오공은 그가 멋대로 지어낸 것이 아니라 실존하는 기충이었다. 다 자라면 육익상공의 모습과 아주 흡사해서 영충을 부리는데 능한 수도자가 아니면 구별하기 어려웠다.

    “혹시 그 비검 법기와 영충을 제게 넘겨주실 수 있습니까?  얼마를 원하시든 구입하고 싶습니다.”

    청년은 한립의 상상을 초월하는 제안을 했다. 한립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미소 지었다.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영충은 이미 주인을 인식했고 비검 법기는 팔 생각이 없습니다.”

    “영석의 양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립이 그 말에 상대를 한참 응시하다 한결 서늘하게 말했다.

    “안됐지만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정 그러시다면 됐습니다. 하긴 저라도 그리 좋은 법기를 쉽게 팔지는 않겠지요. 저는 풍악이라 하는데 목숨을 구해주신 분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청년은 크게 실망했지만 다시 공손히 물었다.

    “한 가입니다. 일단 정리를 시키지요.”

    “정리요?”

    청년이 주위를 둘러보니 언제 숨어 있다 나왔는지 범인들이 경외감이 어린 눈빛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영로와 발 씨 거한 역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데 노인은 너무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이것들은 너희가 처리하거라. 발톱과 꼬리의 깃털 몇 개를 제외하면 가죽과 살코기는 필요치 않으니 알아서 하고.”

    한립이 거한과 노인을 향해 분부했다. 초원의 원칙상 요수를 죽인 자가 요수의 잔해를 갖게 되었다.

    비록 저계 재료라 한립은 성에 차지 않았지만 축기기 선사인 척 하고 있었으니 그냥 버려두어서는 안 되었다.

    “선사의 명대로 따르겠습니다.”

    노인이 희색이 만연해 대답했다. 원취의 살과 가죽이 수도자에게는 별 것 아니지만 범인들 사이에서는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거한도 옆에서 공손히 답했다.

    이어 두 족장들의 분부를 받아 몇몇 건장한 청년들이 걸어 나왔다. 세 마리 요수의 시체를 옮기고 한립의 명에 따라 조각을 내려는 것이었다.

    그나마 침 형태의 법기를 이용해 죽인 것은 상태가 괜찮았는데 얼음덩이가 된 두 마리는 일단 망치로 깨야할 것 같았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저는 쉬러 가겠습니다.”

    한립이 청년에게 냉담히 말하고는 상대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자신의 마차로 돌아가 버렸다.

    이런 태도에 청년은 내심 놀랐다. 상대와 교분을 좀 쌓아 볼까했는데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다.

    애석한 일이었다. 하지만 방금 목숨을 구해 준데다 능력도 상당해 보이니 따질 수 없었다. 한참 후 길게 숨을 내쉬며 청년도 자신의 마차로 돌아갔다.

    그는 마차로 돌아간 한립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주인님, 무언가 남다른 배경이 있는 것 같은데 어찌 이리 멀리하십니까?”

    한립의 머릿속에 은월의 목소리가 울렸다.

    “저 자는 돌올인이 아니다.”

    “예?”

    한립은 입을 열자마자 은월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게 무엇 같으냐?”

    한립이 허공에서 무언가를 쥐자 푸른빛이 번뜩이며 옥패 하나가 나타났다.

    “대진의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아마 내가 나서지 않았어도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풍악이라는 자는 최상급 법기인 이 옥패를 지니고 있었다. 위급한 상황이 되면 저절로 보호막이 발동됐겠지. 대진 문자는 알아보겠느냐?”

    “예. ‘저중풍’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런 칭호라면 경전에 적힌 대진 세가들이 좋아하는 방식이 아닙니까?  풍 씨 성은 그렇다 치고 ‘저중’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대진의 서른여섯 개 거대한 군 중 저천군(宁川郡)일 수도 있고 백팔개의 주 중 하나인 서저주(西宁州)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것만으로는 도통 정체를 파악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대진으로 향하기 전에 한립은 다양한 대진 관련 풍속을 찾아보았고 은월도 꽤 많은 서책을 읽었기에 알고 있었다.

    “대진의 어떤 세가 출신이든 홀로 천란 초원에 나타난 것은 무언가 성가신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뜻일 거다. 그러니 상대와 멀리할수록 좋겠지. 우선 어서 초원을 벗어나 살기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말을 마친 한립은 다시 두 눈을 감았다.

    “맞습니다. 축기기 신분으로 최상급 법기를 지니고 있으니 풍 가의 중요한 인물일 가능성이 높겠네요.”

    은월이 작게 웃으며 한립의 의견에 동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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