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5
495화. 방심
예상초는 그가 항상 지니고 다니는 산호에서 손쉽게 성장을 촉진할 수 있었고, 오랜 시간 아무 일도 없었기에 한립은 한순간 방심하고 말았다. 근처에 고계 은닉 결계를 펼쳐두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돌올인 고계 수사는 한립의 머리 위에 날아다니는 수만 마리의 서금충을 보고 깜짝 놀라 추격하던 요수고 뭐고 한립에게 당장 그를 따라 성녀(聖女)를 만나러 가자고 했다.
그런데 그를 보고 한립의 살심이 인 것이다. 그는 즉시 몇 가지 신통력을 발휘했고 심지어 두 번째 원영까지 내보내 상대의 육신을 멸하고자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돌올인 장로의 주 공법이 매우 특이해서 원영을 일곱 개로 분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곱 개로 나뉜 원영이 나무 속성 둔술을 발휘해 달아나 한립이 그 중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한립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남쪽으로 날아갔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원영기 고계 선사 몇 명에게 추격당하고 말았다. 그 중에는 돌올인의 4대 신사도 한 명 끼어있었다.
한립은 며칠을 연달아 싸우고 그 중 몇몇을 죽였으나 상대편 대선사에게 중상을 입고 말았다. 만일 만년영유를 이용해 연달아 혈영둔을 시전하지 못했다면 이번에야 말로 꼼짝없이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추격자들을 떨치고 나자 벌어졌다. 며칠 밤낮을 싸우며 원기가 크게 상해서 인지 체내에 쌓여있던 살기가 발작하기 시작한 것이다.
의식이 강해 미리 예상하고는 있었고 비술을 사용해 간신히 억누르긴 했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연 신군이 제안한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대연 신군은 즉시 그에게 오귀쇄신대법을 알려주었다. 이 방법은 당장에 살기를 억누를 수 있는 대신 후환이 심각했다.
전신의 살기를 해결하기 전에는 수행의 대부분이 봉인당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동안 법력을 함부로 사용하면 살기는 물론 오귀가 동시에 발작해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
위기에 처한 그는 급히 근처의 관목 속에 숨어들어 결계를 칠 틈도 없이 오귀쇄신대법을 펼쳤고, 그 순간 창로부 일행이 그곳을 지나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필 그의 얼굴이 다섯 악귀로 변하며 공법을 마무리 하는 광경을 창로부 청년이 보고 만 것이다. 한립은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살기는 잠시 억눌렀지만 수행을 봉인당해야 하다니. 일단 천란 성전으로 가는 무리에 섞여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행은 봉인 당했어도 비검이며 고보 같은 보물들은 넘치지 않더냐. 거기다 서금충과 두 번째 원영은 법력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으니 평범한 수도자를 처리하는 데는 문제없을 것이다.
네가 낙운종을 떠나올 때 새로 제련한 원영기급 꼭두각시를 려 사형에게 남겨주고, 귀한 단약들을 시첩에게 전부 주고 오지만 않았어도 목숨을 보전하는 일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낙운종과 완이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천남을 떠나 언제 돌아갈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정 사형이 세상을 뜬다고 해도 원영기급 꼭두각시가 있으면 려 사형 홀로 어느 정도는 꾸려나갈 수 있겠지요.
거기에다 모패령과 거북 꼭두각시들의 도움이 있다면 충분할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마음 놓고 대진으로 향할 수 있었겠습니까.”
“정말 그리 여긴다면 앞으로 불평불만은 하지 말거라.”
대연 신군의 말에 한립은 잠시 침묵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오귀쇄신대법을 잠시 동안 풀 방법은 없습니까? 두 번째 원영과 서금충으로 결단기 수도자는 넉넉히 상대하겠지만 원영기 수도자라면 위험할 겁니다. 몸의 살기를 없앨 방법을 찾기도 요원하고요.”
“잠시 푼다고? 다른 이들은 절대 안 되겠지만 네 녀석이라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그리하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어떤 대가 말입니까? 앞으로의 수행에 영향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감당할 수 있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는 법력을 써야 할 테니까요.”
“간단하다. 봉인을 풀 때마다 네가 지닌 만년영액 두 방울이 필요하다. 거기에 내가 알려준 다른 비술을 이용해 다섯 악귀의 주위를 돌리고 잠시 살기를 중화하면 대략 한 시진 정도 법력을 쓸 수 있다.
다만 매번 봉인을 풀 때마다 살기가 너의 의식에 파고들 것이고, 그것이 반복되면 맹렬히 발작이 일어나 대법의 다섯 악귀로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만년영액이 아무리 귀해도 목숨보다 귀하지 않겠지만 그 뒤가 문제로군요. 나중에 살기를 제거할 일이 더욱 어려워지는 것은 아닌지요.”
한립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그야 당연하지. 게다가 네 몸 상태로 보건데 기껏해야 대여섯 번 정도 잠시 봉인을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잘 생각해 보고 선택해야 한다.”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그런 것들을 고려할 여유 따위는 없겠지요. 우선 관련 비술을 전수해 주십시오.”
“법결을 한 번만 말해줄 것이니 잘 외우거라!”
한립이 두 눈을 감고 의식을 이용해 그가 알려주는 비술의 법결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으니 며칠만 살펴보면 될 듯합니다.”
“그렇겠지. 봉인을 푸는 평범한 공법에 불과하니까. 그런데 정말 이 무리를 따라 천란 성전에 갈 생각이더냐? 그곳에는 수많은 돌올인 수도자들이 모여 있을 텐데?”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어딘가에 숨는다면 한동안은 들키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살기가 발작해 지금은 급히 대진에 가야합니다. 추격자들이 사방을 뒤지고 있을 텐데 홀로 돌아다니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 듯합니다.
오히려 성전 인근에서 다른 선사들과 섞여 있는 것이 나을 겁니다. 많은 수도자들을 일일이 검사할 일도 없고, 만약 검사한다 해도 몇 달 간 초원에서 생활을 해봐서 저계 선사들에게는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상황을 보아 해결해야겠지요. 어쨌든 성전 방향이 곧 대진으로 가는 방향이 아닙니까.”
“다 생각이 있었구나.”
대연 신군이 헛웃음을 짓고는 입을 다물었다. 한립은 대연 신군과 얘기를 마치고 이번엔 은월에게 말을 건넸다.
“은월, 괜찮느냐? 며칠 전 일전으로 입은 부상이 심각할 터인데.”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기령이라 본신에는 무리가 없으나 요수의 몸은 크게 상해 한동안은 주인님의 분부를 따라 움직이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괜찮다. 나도 한동안은 조용히 다닐 것이니 네가 나설 일은 없을 것이다. 요양하는 데만 집중하거라.”
“예, 주인님!”
은월은 정말 몸이 안 좋은지 간신히 대답하고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 은월과 대화를 마친 한립은 갑자기 미간을 좁히며 저물대로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그의 손에는 곧 반 자 길이의 커다란 옥함이 들려 있었고, 그 위에는 하얀 부적들이 붙어 있어 무언가를 봉인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립과 싸우다 육체가 사라진 원영 중기 돌올인 신사는 혼백의 일부가 원영에 깃들어 달아나기는 했지만 성체가 된 서금충까지는 챙기지 못했다. 그래서 한립이 두 번째 원영을 이용해 성체인 서금충을 잡고는 옥함에 가두었다.
한립은 본래 자신의 서금충과 이 성충이 무엇이 다른지 살펴보려 했지만 수행이 낮아진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해결해야 했다. 만일 성충인 서금충의 위력이 예상보다 커 금제에서 풀려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한립은 심호흡을 하며 손바닥을 펼쳐 각양각색의 진법 깃발 몇 개를 꺼내 마차 내부에 보호막을 펼쳤다. 그리고 옥함을 무릎 위에 두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머리에서 검은 빛이 반짝이더니 어두운 녹색의 원영이 정수리에서 빠져나와 양손으로 새까만 음라번을 들고 나타났다. 처음에는 별 생각 없이 두 번째 원영에게 주었는데 이제는 유일하게 오귀쇄신대법의 영향을 받지 않는 법보가 되고 말았다.
서금충의 몸은 너무 단단해 음라번의 정순한 마기를 이용해 영충의 원신을 뽑아낸 다음, 깃발의 해골이 제련하게 해야 했다.
이런 제련법은 이전에 음라종 장로의 의식 속에서 알게 된 것인데 당연히 단시간에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서금충이 약해져 있지 않았다면 시도도 못할 일이었다. 성체인 서금충이라니 방심할 수 없었다.
이때 어두운 녹색의 원영이 들고 있던 깃발을 던졌다. 새까만 깃발은 어두운 구름으로 변해 원영을 감쌌고 곧 한립 무릎 위의 옥함까지 휘말려 들어갔다.
동시에 옥함 속에서 웽웽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크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분노한 듯 했다.
새까만 구름이 옥함을 휘감고 요동을 칠수록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날카로워져 갔다. 그러나 한립은 수결을 맺으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금제가 펼쳐져 있었기에 바깥의 창로부 범인들이 소리를 들을 걱정은 없었다. 이렇게 극히 어려운 제련이 시작되었다.
창로부 부락민들은 다들 한 선사에게 관심이 많았으나 그는 마차에 들어간 이후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특히나 족장인 영로가 상대의 수련을 방해하지 말라고 엄명을 내려놓았기에 실망스러웠다.
한 선사 덕분인지 창로부 사람들은 야생 양 떼를 만나 충분한 식량을 얻었고 이후 보름간은 아무 일도 없이 이동했다. 이에 영로도 크게 한 시름을 놓았다.
며칠만 더 가면 천란 성전에서 만든 임시 주둔지에서 쉬어갈 수 있었다. 물론 개령일이 지나면 그 주둔지도 바로 없어지겠지만 말이다.
영로가 이런 생각에 빠져있을 때 멀리서 눈을 찌르는 듯한 하얀 빛이 다가오다가 별안간 사라졌다. 노인은 그것을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전의 경험으로 보아 이 정도 빛은 고계 선사가 저공비행을 할 때나 내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은 고계 선사는 보통 아주 높은 곳에서 빠르게 지나가 범인은 그런 빛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인근에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인가? 그러나 가는 동안 고계 선사들이 순시를 도는 것이라면 안전할 것도 같다는 생각에 그는 청년들을 불러 더 빨리 이동하라고 일렀다.
노인은 몰랐지만 방금 본 하얀 빛은 방원 백 여리를 오랜 시간 돌고 있었다.
하얀 빛은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붉은 빛줄기와 맞닥뜨렸다. 빛이 가시고 각 빛줄기에서 사내와 여인이 나타났다.
평범한 인상의 사내는 사십대에 가죽옷을 걸치고 있었고, 여인은 스물 일고여덟 살 정도로 연녹색의 궁장차림을 하고 있었다.
“수 선사셨군요. 이쪽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쪽은 어떠합니까?”
중년 사내가 먼저 여인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그러나 궁장 여인 역시 난색을 표했다.
“하아……. 며칠 동안 방원 2천 리를 전부 뒤지고 있는데도 아무 흔적도 없다니! 이미 이곳을 떠났거나 은닉술이 매우 뛰어난 자입니다. 저희 둘이 다시 한 번만 더 찾아볼까요? 공물을 바치러 가는 무리에게도 일일이 물어보고 말입니다.”
“보아하니 려 선사께서는 보상으로 떨어질 독룡환이 정말 탐나시나 봅니다. 허나 겨우 환약을 위해 목숨을 거는 행동은 삼가세요.”
중년 사내가 조급해하자 궁장 여인이 냉소하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설마 수 선사는 독룡환이 탐나지 않는 겁니까?”
“임무를 받을 때 원영기 상계 선사께서 뭐라 말씀하시던가요?”
“상사께서는 외부인 원영기 수도자가 우리 천란 초원에 침입해 상계 선사 한 명에게 중상을 입혔으니 생포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자는 이미 다른 상계 선사들의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어 우리 같은 결단기 선사들도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려 형은 한발 늦게 오셔서 아는 바가 없으시군요. 만일 저였다면 절대 이렇게 열심히 그 수도자를 찾아다니지 않을 겁니다.”
“왜 그러십니까? 기왕 말이 나왔으니 분명히 말씀해 주시지요.”
중년 사내의 표정이 신중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