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494화 (251/2,000)
  • # 494

    494화. 창로부(蒼鷺部)

    정오가 되자 뜨겁게 내려 쬐는 태양을 보고 노인은 마차 속의 어린 아이들을 생각하며 탄식했다.

    보통 부락은 크고 작고에 상관없이 선사 한 명쯤은 모시고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재난이 일거나 요수와 마주쳤을 때 범인의 힘으로는 막아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이 있는 창로부는 선사를 양성할 시간도, 영석을 대가로 선사를 고용할 여력도 되지 않았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저계 수사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는 했지만 너무 많은 영석이 들어 안 그래도 어려운 부락의 사정이 더욱 악화만 되었다.

    다행히 스무 해에 한 번 씩 열리는 개령일(開靈日)이 드디어 가까워졌다.

    아무리 힘들어도 놓치지 말아야할 기회였다. 그는 부락 내에 영근이 있다고 확인된 제자들을 데리고 가장 가까운 천란 성전을 향해 가는 길이었다.

    천란 성전은 본래 천란수를 봉양하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돌올인들의 성지이자 돌올족 저계 선사들을 배양하는 곳으로 변했다.

    각 성전에는 몇몇 고계 수사들이 머물며 그들에게 기본적인 수련법을 전수해주고 자질이 떨어지는 이들은 부락으로 돌려보내고, 자질이 뛰어난 이들은 제자로 거둬 키워냈다.

    개령의식을 거치지 않은 범인에게 사적으로 고계 선사가 선술(仙術)을 전수하는 것은 엄하게 금지 되었다.

    성전의 수는 예닐곱 개 뿐이었지만 균일하게 퍼져있어 주변에 천 개 이상의 부락이 존재했다. 큰 규모의 부락들은 당연히 성전에 가까웠고, 창로부는 3개월은 가야하는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노인은 어쩔 수 없이 서둘러 무리를 이끌고 부락을 나선 것이다. 지난 번 개령일에는 공물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기회를 잡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공물을 지니고 광활한 초원을 지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듣기로 저번에 인근 부락은 공물로 가져가던 거의 천년 된 영약을 도중에 빼앗긴데다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고 했다. 어떤 큰 부락의 고계 선사가 보물을 얻고자 벌인 일이라는 소문이 돌자 성전에서도 조사를 했다고는 하는데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노인은 한 숨만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뒤로 따라오는 일고여덟 개의 마차 중 네 개는 전부 공물이었고 부락에서 가장 튼튼한 준마가 끌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눈길을 끌지 않기 위해 튼튼한 홍화목으로 만들었지만 겉보기에는 낡고 오래돼 보이도록 했다.

    하지만 조만간 무슨 일이 일어나고 말 것이다. 얼마 전에는 겨우 늑대를 만났을 뿐인데 늑대의 공격에 어쩔 수 없이 마지막 마차 두 개를 버리고 왔다.

    두 마차에는 큰돈이 될 만한 물건은 없었지만 식량이 실려 있었다. 기억대로라면 이틀 후면 작은 골짜기 인근에 도착하니 야생 소나 양 등을 사냥해 식량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노인이 이런 생각을 하며 말에 매달아 놓은 활을 매만졌다.

    “엇?  저게 뭐지?”

    노인 옆에서 맑은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이름은 영산으로 부락에서 영근이 있다고 판명된 아이 중 하나였다.

    노인이 놀라 고개를 드니 무성한 관목 사이로 푸른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노인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한 부락의 수령으로서 어찌 선사가 내는 영기의 빛을 모르겠는가.

    노인은 바로 한 손을 들어 무리를 멈추게 하고 관목을 바라보며 경계 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잠시 후, 노인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숲에서 푸른빛이 계속 반짝였지만 선사가 나타나지도 선술이 뻗어 나오지도 않았던 것이다. 노인은 눈을 밝히며 자세히 그쪽을 살폈다.

    “토맹! 가서 정말 선사께서 계시는지 확인해 보거라.”

    “알겠습니다. 족장님!”

    무리 중 체구가 가장 건장한 사내가 용맹한 얼굴로 서 있다가 대답했다. 그는 바로 스무 장 거리에 있는 관목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대여섯 장을 남기고 머뭇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혹시 선사님께서 계십니까?  저희는 창로부 부락민들입니다.”

    청년은 예의 바른 말투로 물었지만 관목 숲에서는 푸른빛이 번뜩일 뿐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청년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노인을 보았다.

    그러나 노인은 그를 보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가야 했다. 청년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가 양손으로 작은 나무를 제쳤다.

    “악!”

    나무를 밀어내고 그 안을 들여다본 순간 청년은 소리를 지르며 연신 뒷걸음질 치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무슨 일이지?”

    창로부 사람들이 그곳을 주시하다가 청년의 소리에 바로 검과 도를 뽑아 위험에 대비했다.

    “모두 경거망동 말거라! 토맹, 무슨 일이냐?”

    “족장님, 안에 어떤 선사님이 계시기는 한데. 모습이…….”

    “모습이 어떠하다는 게지?”

    청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관목 숲의 푸른 기운이 사라지며 누군가 걸어 나왔다. 노인은 물론이고 부락의 사람들 모두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선사 복장의 하얀 장포를 입은 청년은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외에 눈에 띠는 것은 불룩하게 차오른 주머니 여러 개를 허리에 달고 있다는 것과 등에 한 자 길이의 목함을 매고 있다는 정도였다.

    “저는 창로부의 족장인 영로라 합니다. 선사 대인을 뵙습니다.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 여쭤 봐도 되는지요?”

    영로가 바로 말에서 내려 하얀 장포를 입은 청년에게 깊이 예를 올렸다. 다른 부락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창로부?  들어 본 적 없구나. 난 한 가이다. 이곳에서 공법을 수련하던 중이었는데 지나는 길이더냐?”

    청년이 노인의 일행을 훑으며 냉랭히 물었다.

    “저희가 아무 것도 모르고 선사님의 수행을 방해하였습니다. 혹시 대인께서는 어느 부락에 계신지요?”

    “사부님의 문하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머물고 있는 곳은 딱히 없다.”

    “아! 그러셨군요. 선사 대인께서 홀로 이곳에 계시는 것으로 보아 분명 성전으로 향하는 길이신 듯합니다. 스무 해에 한 번 있는 개령일이니 한 선사님도 기회를 놓칠 수 없겠지요.”

    영로는 상대가 뜻밖에 자유의 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말투가 더욱 공손해졌다.

    “그래, 성전으로 향하는 길이다. 너희도 성전으로 공물을 갖고 가는 길인가 본데, 함께 하는 선사가 보이지 않는구나.”

    “창로부는 작은 부락이라 머무는 선사께서 없어 그러합니다. 그래서 이렇듯…….”

    “고의로 방해를 한 것이 아니니 됐다. 그럼 그만 가 보거라.”

    하얀 장포의 청년이 손을 내저으며 그들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자 노인은 결심이 확고해졌다.

    “선사께서 기왕 성전으로 가시는 길이라면 잠시 저희 창로부에서 고용해도 될 런지요. 저희가 성전까지 가는 동안 함께 해주시면 영석 스무 개를 내어드리겠습니다.”

    “나를 고용하겠다고?”

    “예, 어차피 성전에 가시는 길이니 저희와 같이 가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아무 도움 없이 성전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 막막하던 차였습니다.”

    “너희와 같이 가는 것은 너무 느린데다, 영석 스무 개라니…….”

    하얀 장포 청년은 즉시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조금 꺼려진다는 듯 답했다.

    “선사 대인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노부가 스물다섯 개까지 내어드리겠습니다. 저희 창로부가 워낙 규모가 작아 정말 최선을 다해 제안해 드리는 액수입니다.”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영석 스물다섯 개면 적지는 않구나. 허나 어찌 아무것도 묻지 않고 가격을 제시하는 것이더냐?  내가 겨우 연기기 2, 3성의 초급 선사면 어찌하려고?”

    청년이 액수를 듣고 가볍게 웃었다.

    “허허! 노부도 전쟁에 참가해 대인들께서 내뿜으시는 영기의 빛을 본 적이 있습니다. 선사 대인은 결코 연기기 2, 3성의 선사가 아니십니다.”

    “뭐 그렇다면야 한번 같이 가보자꾸나. 영석은 일단 절반을 받고 나중에 나머지 절반을 받는 것으로 하겠다.”

    “그야 물론입지요. 당장 영석을 내어드리겠습니다.”

    노인이 크게 기뻐하며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열댓 개 영석을 그에게 넘겼다.

    하얀 장포 청년이 영석을 받자마자 손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영석이 사라졌다. 그것을 지켜보던 창로부 청년들이 놀라 감탄을 내뱉었다.

    “어찌 저물대도 처음 보는 것이더냐?”

    “우스운 꼴을 보여드렸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라 한 번도 선사 대인들을 뵌 적이 없어 그러합니다.”

    “그렇군.”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다 마차를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노인은 바로 무언가를 깨달은 듯 부락민들에게 명했다.

    “너희는 어서 가장 좋은 마차를 비워 한 선사님이 쉴 수 있도록 준비하거라. 신속히 움직여야 한다.”

    족장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던 청년들은 정신을 차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년은 거절하지 않고 기다리다가 노인을 바라보았다.

    “고생 했네. 그럼 들어가 쉴 테니 일이 있을 때만 부르게. 속세의 식사는 하지 않아도 되니 다른 때는 귀찮게 하지 말고.”

    “예, 물론입니다.”

    영로가 몸을 굽히며 웃는 낯으로 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된 마차로 가던 청년이 몇 걸음 가다 돌연 토맹을 향해 냉랭히 말했다.

    “방금 내 얼굴을 보았으렷다?  이 일이 퍼지는 것을 원치 않으니 알아서 처신하거라.”

    토맹은 즉시 안색이 창백해져서는 마차 안으로 사라진 그를 향해 고개를 흔들며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고 중얼거렸다.

    “됐다. 이제 우리도 선사 대인이 계시니 안심하고 계속 가자꾸나! 영산아, 너는 선사님이 계시는 마차 옆에서 무슨 분부를 하시든 잘 모시거라.”

    노인이 큰 소리로 무리를 재정비하고 옆의 소녀에게 말하자 소녀가 그 말에 신이나 바로 그러겠다고 대답하고는 뒤로 물러났다.

    무리가 다시 출발하자 청년들은 서로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지나가는 선사들이야 간혹 보았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청년은 완전히 가려진 마차에서 가부좌를 하고 꼼짝 않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대연 신군과 한립이었다.

    “네가 운공하는 모습을 본 돌올인 아이가 완전 기겁을 했더구나! 아마 며칠은 악몽에 시달릴 것이야. 허허허…….”

    대연 신군은 청년의 불행에 큰소리로 웃어댔다.

    “선배님이 전수해 주신 오귀쇄신대법(五鬼鎖神大法)이 정말 효과가 있기는 한 것입니까?”

    “걱정 말거라. 대연결을 통제하며 주화입마에 이르지 않기 위해 창안한 비술이니 살기에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살기로 다섯 귀기가 몸에 들어갔으니 살기만 금제에 걸려 봉인된 것이 아니라 수행도 봉인되었다. 그러니 지금은 기껏해야 축기기 중기 정도 된다는 것을 잊지 말거라!”

    “선배님께서 강조하지 않으셔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살기의 발작이 이렇게 빨리 일어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흉흉한 기세도 상상을 초월하고요.”

    “흥! 내 예측이 틀린 것이 아니라 네가 살기를 제거하기도 전에 다른 수사와 싸움을 해서 그런 것이다. 심지어 원기가 크게 상해 거의 죽을 뻔 했으니 살기가 미리 발작하는 것도 당연하지. 네가 내 꼭두각시 제련만 돕고 있지 않았어도 노부는 관심을 껐을 것이다.”

    한립이 낙운종을 떠난 지 반년이 지난 후였다.

    한립은 천남을 떠나 바로 천란 초원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신분과 수행을 숨긴 채 돌올인 부락에 들어가 돌올인 선사들과 교류를 나누었다. 그런데 초원을 절반쯤 건넜을 때 드디어 일이 터졌다.

    돌올인 부락과 멀리 떨어진 황야에서 평소처럼 서금충을 방출해 가장 강력한 무리를 따로 배양할 준비를 하려는데 돌올인 원영 중기 장로가 요수를 추격하다 그곳을 지나게 된 것이다.

    게다가 그는 서금충 한 마리를 부리는 수사였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