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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493화 (250/2,000)

# 493

493화. 깃발

한립은 죽은 음라종 장로의 의식을 통해 어떻게 깃발을 발동하는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음라종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보물이라 피를 통해 주인을 각인시키는 절차도 필요 없었다.

한립이 주술을 외자 깃발이 펄럭이며 그 위로 구멍이 뚫려 음기 가득한 바람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주변에 빼곡하게 있던 마기가 순식간에 그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립은 음라번이 마기를 흡수하는 것을 보고 크게 기뻐했다.

‘과연 마기를 흡수하는 구나!’

잠시 후, 깃발은 대량의 마기를 흡수해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그리고 본래 청록색이던 색깔은 절반은 녹색, 절반은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깃발이 주변의 마기를 잡아먹는 것을 보며 한립은 눈을 빛냈다.

일단 복구가 되면 마기를 그만 빨아들일 것이라고 여겼는데 끝도 없이 마기를 잡아먹고 있었다. 그러면서 절반의 녹색은 점차 옅어지고 검은 색이 눈에 띄게 늘어나는 것이 보였다.

한립은 머뭇거리면서도 깃발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깃발은 엄청난 양의 마기를 흡수하고는 울부짖었고, 깃발 위에 생긴 동굴 역시 사라져버렸다. 이때 깃발은 전신이 새까만 빛을 내고 있었다.

한립은 즉시 깃발을 불러들였고 자세히 살펴보다가 저물대 속으로 집어넣었다. 기회가 되면 위력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이미 꽤 많은 시간을 지체 했기에 한립은 바로 수십 개의 비검을 분출해 머리 위의 영기를 헤치고 허공으로 치솟았다.

그가 푸른 빛 줄기로 변해 소용돌이 중심부에서 나타나자 수사들은 내심 안심했다. 혹시나 한립에게 무슨 일이 생겨 진법 원반을 제대로 설치하지 못하면 큰일이었기 때문이다.

“한 수사 어찌 되었습니까?”

“다행히 무사히 설치하였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확인을 해보지요.”

위무애가 곧바로 한쪽 소매를 털어 또 다른 진법 원반을 꺼냈다. 그가 수결을 맺으며 주술을 외워대자 진법 원반에서 하얀 빛이 반짝이다가 오색찬란한 빛을 내며 흩어졌다.

“진법 원반은 제대로 설치되었습니다. 그럼 이제 다른 수사들에게 연락해 바로 봉인결계를 복구하시지요. 한 수사가 큰 공로를 세워주었습니다.”

위무애가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일이 일단락되었으니 저는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럼 보물들은 이만 돌려드리지요.”

한립이 네 가지 보물을 돌려주며 말했다.

“이리 급히 가실 필요가 있으십니까. 칠령도에서 며칠 쉬다 가셔도 될 텐데요.”

“말씀은 감사하지만 정말 급한 일이 있어서요.”

지양 상인의 권유에도 한립은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지었다.

“그렇다면 붙잡아 둘 수 없겠습니다. 어서 가보시지요.”

“예, 그럼 이만 저는 물러가 보겠습니다.”

한립은 세 수사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는 즉시 푸른 빛줄기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 * *

보름 후, 낙운종으로 돌아온 한립은 정 사형과 려락에게 칠령도와 관련된 일을 이야기하고 폐관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이번에야 말로 두 번째 원영을 완전히 제련할 때였다. 한립은 남궁완의 상태를 살핀 후 바로 밀실로 들어가 폐관수련에 들어갔다.

그러는 동안 수도계는 다시 안정기에 접어들어 제자들을 육성하고 실력을 기르는데 힘을 쏟았다.

* * *

4년 후, 은월이 밀실 앞에서 공손히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젯밤 한립이 전음을 보내 오늘 폐관을 마칠 것이라 일렀기 때문이다.

쿠릉.

오랫동안 열리지 않던 석문이 드디어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립은 보이지 않고 새까만 바람이 불어와 그녀를 덮쳤다. 이에 그녀는 깜짝 놀라 연달아 뒷걸음을 치고 말았다.

“이것은…….”

“두 번째 원영을 이 정도로 제련했으면 성공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느냐?”

검은 구름이 응결해 일촌 크기의 녹색 갓난아기로 변했다.

“두 번째 원영을 완전히 제련하신 것을 경하 드립니다.”

은월이 빙긋 웃으며 원영을 향해 예를 취했다. 한립의 주 원영에 비해 약간 작은 것을 빼면 외양은 아주 흡사했다.

“나도 이렇게 빨리 성공할 줄은 몰랐구나. 성공은 했지만 느낌이 좀 묘하구나.”

익숙한 목소리가 밀실 안에서 들려오며 한립이 천천히 석문을 지나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때 어두운 녹색 원영은 키득거리며 한립의 머리 위로 날아가 앉았다.

“한 사람이 원영을 둘이나 지니고 있으니 느낌이 이상할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익숙해지시면 괜찮아지실 겁니다.”

“말투로 보아 두 번째 원영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 것 같구나?”

“어쩌다 이런 말이 나왔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비슷한 신통력을 이전에 지녔을 지도 모르지요.”

한립의 말에 은월이 순간 멈칫하더니 사실대로 답했다.

그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인 한립은 별 다른 말이 없었다. 하지만 머리 위의 원영이 손바닥을 뒤집어 작은 깃발을 들더니 갖고 놀기 시작했다. 새까만 깃발은 엄청난 마기를 흡수한 음라번이었다.

“주인님의 두 번째 원영은 마도 공법을 수련한 것입니까?”

“두 번째 원영을 제련하는데 성공했으니 당연히 특별한 신통력을 쓰게 하는 것이 옳겠지. 하지만 육신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홀로 공법을 수련하기는 무리다. 일단 내 몸과 음라번의 정순한 마기의 도움을 받아 현음대법 속 몇 가지 공법을 익히게 할 것이다.

허나 이후 두 번째 원영이 육신을 지니게 할 것인지는 아직 고민 중이다. 육신이 생긴 두 번째 원영이 반격을 가하는 일이 드문 일도 아니지 않더냐.”

한립은 미간을 좁히며 자신의 머리를 한 손으로 두드렸다. 그러자 검은 빛 이 반짝이며 원영이 머릿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단전 내부에 주 원영이 가부좌를 하고 있는 곳 바로 앞에, 두 번째 원영 역시 가부좌를 하고 앉았다.

“신중하게 고민하심이 옳습니다. 현모화영대법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비술이 아닌지요. 다른 수사들이 화신을 만들어 내는 수법은 대부분 의식과 영혼을 나누어 쓰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화신의 수법은 근본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러 상대와 동시에 대적하거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효용이 있겠지만 말이야. 됐다, 그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그동안 거처에는 아무 문제도 없었더냐?”

“주인님께서 폐관에 들어가신지 1년 후, 모 소저가 결단에 성공하였습니다. 분부하신대로 전봉배원공과 결단기에 도움이 되는 단약을 전해주었습니다.

또한 남궁 소저께서는 금제 속에서 무탈하십니다. 봉혼주가 화섬의 내단에 의해 나날이 약해지고 있으니 저주를 풀 법결을 구하지 못해도 백년 내로는 본래 모습을 회복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건 제 추측에 불과하니 주인님께서 직접 확인해 보십시오.”

은월은 대청을 향해 걸어가는 그를 뒤 따르며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 했다.

출관을 하자마자 들려온 두 가지 희소식에 한립은 기뻤다. 그가 뭔가를 물어보려는데 은월이 먼저 입을 열었다.

“또 하나 보고 드릴 일이 있습니다. 육익상공의 유충들에게 몇 년간 예상초를 먹여 몸집이 커지기는 했으나 그간 껍질을 한번 벗었을 뿐, 알 수 없는 이유로 성장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껍질을 벗었다고?”

한립이 걸음을 멈추며 의혹을 드러냈다.

“예, 껍질을 벗은 후 지네의 위력이 강해졌고 요 며칠 흉포해진 것이 다시 한 번 껍질을 벗을 듯합니다.”

“일단 직접 가서 보자꾸나.”

한립은 방향을 바꿔 통로를 지나 영충들을 키우는 밀실로 향했다. 밀실에 도착하자 안을 들여다보기도 전에 이미 한기가 전해졌고 눈이 닿는 곳마다 수정처럼 빛이 반짝였다.

밀실의 벽이 두꺼운 얼음으로 얼어붙어 빙산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 얼음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놓고 몇 마리 새하얀 지네들이 바삐 돌아다니고 있었다.

피를 통해 주인을 각인시켰기에 지네들은 한립이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를 감지했다. 잠시 소란이 일었지만 바깥쪽에 있던 지네부터 한립을 향해 날아왔다.

한립이 손을 내저어 석실 벽에 뚫어놓은 구멍의 금제를 거두었다. 지네들은 하얀 빛으로 변해 그의 주변을 날아다녔고 한립이 한 손을 들어 그 중 한 마리를 붙들었다.

유충 때와 똑같이 새하얀 몸이었으나 등에 두 개의 불룩한 혹 같은 것이 솟아 있었다.

한립은 손에 하얀 지네를 들고 생각에 잠겼고 은월도 그 뒤에서 조용히 서 있었다. 그때 그가 다른 손가락 하나를 지네의 입가로 가져갔다.

푹.

손끝에 남색 화염이 일어나자 지네가 입을 벌려 한기를 분출해 남색 화염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남색 화염이 몇 배로 커지며 한기를 휘감았다.

한립은 천천히 두 눈을 감고 무언가를 살피기 시작했다.

“껍질을 벗은 후 지네가 이전보다 훨씬 강해졌다. 보아하니 서로 잡아먹든 껍질을 벗는 것이든 별 차이가 없는 듯 해.”

한립이 눈을 뜨고 손끝의 남색 화염을 흩어버렸다.

“그리 말씀하시면 저도 안심입니다.”

한립의 말에 은월이 미소를 지었다. 한립은 은월을 힐끗 보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대청으로 걸어갔다.

“이제 출관을 했으니 잠시 쉬었다가 대진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체내의 살기도 해결해야 하고 찾을 재료도 상당하니 말이야. 게다가 완이가 걸린 저주가 화섬의 내단으로 완전히 해결 가능한지도 확실하지 않다. 음라종에 찾아가 저주를 풀 구결을 알아내는 것이 최선이겠지. 급히 두 번째 원영을 제련해낸 것도 대진에서 어떤 위험에 처할지 몰라서였다.”

“그러셨군요. 하지만 대진의 수사들도 주인님을 어찌하지 못할 것입니다.”

“수도계에 괴상한 공법과 보물이 허다한데 어찌 알겠느냐. 게다가 음라종 마수들과 척을 졌으니 발각당하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럼 일단 완이를 살피고 정 사형 등을 찾아 꼭두각시와 칠염선에 필요한 재료를 얼마나 수집했는지 알아봐야겠다. 별 이상이 없다면 열흘이나 보름 내로 출발을 할 것이니 준비 하거라.”

“예, 주인님! 저도 수련 성지라 불리는 대진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던 차입니다.”

* * *

보름 후, 푸른 빛줄기가 운몽산을 떠나 남쪽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낙운종의 한 장로가 유람을 떠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운몽산의 고검문과 백교원은 여전히 낙운종에 고분고분했고 계국 제1의 수도 문파라는 지위는 흔들림 없이 유지 되었다.

세월이 흘러 수명이 다한 수사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몇몇은 폐관에 들어가며 익숙한 얼굴들이 점차 천남 수도계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한립은 유람을 떠난 지 백여 년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서른 명 가량의 사람들이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지나고 있었다. 마차는 일고여덟 개 정도였고, 말을 탄 사람들은 하나같이 젊고 기운이 넘쳐보였다.

심지어 몇몇은 십대 초반처럼 보였다. 그리고 무리의 맨 앞에는 화려한 의복을 걸친 노인이 말을 타고 가고 있었다.

붉은 여우 가죽 모자를 쓴 노인은 벌건 안색에 주름이 가득했고 허리춤에는 신분을 나타내는 삼색의 비단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이 부락의 족장이었다.

그들은 성에 공물을 바치러 가는 돌올인들이었고 그들이 지나는 곳은 천란 초원의 남부였다.

천란 초원이란 돌올인들이 모란 초원을 일컫는 말이었다. 돌올인들이 전설 속의 천란수를 숭배하고 부족의 수호신으로 여겨 섬기고 있기에 생겨난 이름이었다.

본래 돌올인들은 천란 초원 남부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30년 전 대전을 펼쳐 오랜 원수인 모란인들을 격퇴하고 초원 전체를 손에 넣었다.

돌올인들은 작게는 수십만 명으로 이뤄진 부락부터, 많게는 일억 명이 넘는 초대형 부락까지 초원 전역에 분포하고 있었다. 게다가 전쟁 중에 공을 세워 부락을 만들어내는 곳도 있었다.

노인의 부락도 대형 부락에서 빠져나온 초소형 부락이었다. 노인은 젊은 시절 아주 용맹해 전쟁 중 모란인 귀족 몇몇을 잡아와 지금의 위치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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