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2
492화. 비석의 잔해
한립은 세 사람이 보는 앞에서 거침없이 보물들을 살펴보았다. 그 중 세 가지는 양기가 강하고 불 속성을 지닌 보물들인데 반해 검은 깃발은 반대로 마도의 유명한 보물이었다.
합환 노마의 말에 따르면 깃발은 본래 귀기가 서린 바람을 부릴 수 있는데 마기를 흡수하는 효과도 있어서 몸을 보호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한립도 흥미가 생겨 한참을 살펴보다가 저물대에 넣었다.
한립은 보물들을 모두 챙기고는 수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소용돌이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몇 시진 후, 한립은 순조롭게 소용돌이 밑으로 내려갔다.
한립은 빛의 장막 하부의 마기를 보자 곧바로 양손을 부딪쳐 벽사신뢰를 일으켰다. 그의 전신에 굵은 금빛 뇌전이 번뜩이며 금빛 그물이 그의 보호막을 타고 흘렀다.
그제야 한립은 입술을 꿈틀거리며 비웃었다. 위무애 등이 아무리 간교해도 그가 뜻밖에 일흔두 개의 금뢰죽 비검을 지니고 있을 거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예상대로라면 마기의 심연을 한번이 아니라 두 번을 왕복해도 넉넉할 양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위험을 감수하고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섰을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 그들을 속인 것은 지양 상인이 백교원에 있을 때 언급했던 낙운종에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을 확인하기 위해서였고, 또한 그들이 자신의 능력을 착각하기 바라서였다.
앞으로 천남에서 그에게 위협이 될 존재들은 저 셋을 제외하면 모란의 신사들뿐이었으니 말이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한립은 금빛 뇌전의 비호를 받으며 칠흑 같은 마기의 심연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천둥소리가 점점 작아지며 벽사신뢰의 금빛도 어둠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그때 해수면 위에는 지양 상인 등 나머지 수사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지양 형이 보시기에 한 수사의 벽사신뢰가 마기를 뚫고 다녀오기에 부족하다고 여기십니까?”
위무애가 뒷짐을 지고 지양 상인을 보았다.
“빈도가 한 이야기를 믿지 못하시겠다는 겁니까?”
“하하! 그럴 리가요. 다만 한 수사가 너무 쉽게 이번 일을 수락한 것이 이상해 그러합니다.”
“그런…… 빈도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기의 심연으로 향할수록 법력 소모가 커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무사히 다녀오려면 엄청난 양의 벽사신뢰가 필요할 텐데 그렇게 많은 양을 지니고 있을까요?”
“아마 벽사신뢰 외에도 마기에서 버틸 수 있는 다른 신통력을 지니고 있을 지도 모르지요.”
“하긴 수도계에서 기이한 효과가 있는 공법과 비술이 어디 한두 가지입니까? 어찌 되었든 이번 일을 순조롭게 해결하기만 하면 됩니다.”
위무애가 웃으며 시선을 합환 노마에게 주었다. 그러나 합환 노마는 팔짱을 끼고 소용돌이 중심을 주시한 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 * *
마기 내부 삼천 장 아래, 금빛 보호막에 둘러싸인 한립이 꼼짝 않고 있었다.
그는 보호막 속에서 진법 원반을 설치할 위치가 기록된 옥간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잠시 후 그가 의식을 불러 주위를 살폈다.
새까만 빛으로 보건데 이미 심연의 가장 밑까지 내려온 듯 한데 도저히 거리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가 입을 벌려 일촌 길이의 비검을 분출했다. 금빛이 반짝이는 작은 비검이 보호막을 빠져 나와 그의 머리 위를 선회하는 모습이 빛으로 만든 고리 같았다. 한립이 수결을 맺자 비검은 곧 금색 빛줄기로 변해 쏘아져 나갔다. 그 역시 주저 없이 그 뒤를 쫓았다.
수백 장을 횡으로 이동한 비금이 돌연 방향을 틀어 밑으로 쏘아져 내려갔다.
펑!
비검은 무언가에 부딪쳤는지 날의 절반이 박혀서 꼼짝하지 않았다. 주위는 여전히 어두컴컴했지만 비검에서 금빛 뇌전이 번뜩였기에 어느 정도 주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검이 박혀 있는 것은 평평한 거대한 돌 같아 보였다. 한립이 고민하다 양 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호막 위에 올렸다.
보호막 위의 뇌전이 더욱 밝아지며 그 안에서 금빛 뇌전이 튀어나와 구렁이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자 방원 십여 장 범위의 마기가 금빛 구렁이의 꿈틀거림에 순식간에 깨끗하게 사라졌다.
거대한 돌을 살피던 한립은 어안이 벙벙했다. 돌은 제단과 비슷한 모양으로 뇌전이 밝혀 놓은 빛에도 전부 보이지 않을 만큼 컸기 때문이다. 이런 곳에 진법 원반을 설치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금빛 뇌전을 이용해 이곳이 약 30평 규모의 사각형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면에 새겨진 무늬로 보아 무척 오래된 것이 분명했다.
한립이 제자리로 돌아와 비검을 향해 손짓하자 비검은 다시 금빛으로 변해 그에게 돌아왔다.
잠시 후, 사각형의 중심부로 날아가던 한립은 하얀 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속도를 높여 다가갔다. 그곳에는 윗부분이 부서진 비석이 서 있었다.
한립은 눈을 빛내며 비석의 잔해를 살폈다. 비석은 비록 훼손되었지만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주술이 새겨져 있었고, 제련된 영기도 아직 남아 있었다.
“금뢰죽 이상의 진귀한 재료인가?”
한립이 허공에 손짓을 하자 비석 조각이 허공에 떠올라 그의 손에 떨어졌다.
그는 그것을 반복해서 돌려보다가 힘을 주어 조각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괴상한 일이 일어났다.
비석이 하얀 빛을 번쩍이며 말랑말랑해진 것이다. 비석을 쥔 한립의 손가락이 비석 사이로 쑥 들어가 버렸다.
한립은 화들짝 놀라 대연 신군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대연 선배, 이게 무슨 물건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글쎄……. 노부도 처음 보는 물건이구나. 상고 시대에는 기상천외한 재료가 허다했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지. 괜찮다면 한 덩어리를 넣어 보거라. 마침 할 일도 없었으니 한번 살펴보마.”
대연 신군의 말에 한립은 들고 있던 조각을 등 뒤의 죽통으로 던져주었다. 그러자 죽통에서 하얀 빛이 흘러나와 돌 조각을 휘감아 들어갔다.
다시 살펴보니 비석은 본래 마기를 봉인하던 결계와 관련된 것 같은데 훼손된 지 얼마 안 돼 보였다.
그렇다면 비석의 재료 역시 평범한 물건은 아닐 것이다. 그는 생각을 마치고 푸른 빛줄기를 뿜어 남은 비석 잔해를 전부 저물대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푸른 검기를 내보냈다. 남은 비석의 하부 역시 부셔서 가져갈 심산이었다.
쿠쿵.
연달아 거대한 소리가 울리고, 푸른빛이 가신 뒤 검기가 소리 없이 비석으로 사라져버렸다.
“이상한 비석이로군.”
한립은 조금 놀랐지만 비석 하부는 그대로 나두기로 했다. 남은 벽사신뢰로 이곳에 더 머무를 수도 있었지만 이렇게 위험한 곳은 어서 빨리 나가는 것이 나았다.
연달아 충돌음이 들리고 비석 옆에 일장 깊이의 구덩이가 생겼다. 한립이 조용히 손을 털어 내니 진법 원반이 하얀 빛으로 변해 그 구덩이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수결을 맺으면서 한립은 반짝이는 원반을 한참동안 응시했다.
잠시 후, 진법 원반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고 팔뚝 굵기의 하얀 원기둥들이 원반 위로 솟아올라 위쪽으로 사라졌다.
한립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진법 원반이 정상적으로 설치 된 것이다.
한립이 다시 소매를 터니 푸른 바람이 불어와 곳곳으로 튀어나갔던 돌 조각들이 다시 구덩이를 메우기 시작했다.
본래 구덩이가 있던 자리를 돌아보며 한립은 만족스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가 손을 뻗어 법결을 날려 보내니 주위를 돌며 마기를 몰아내던 금빛 구렁이가 폭발해 사라졌고 멀리서부터 다시 마기가 차올랐다.
한립이 보호막에 금빛 뇌전을 두르고 해수면 위로 올라가려는데 갑자기 대연 신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 기다려 보거라.”
“돌아가기 전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이곳이 비록 진법의 눈이라지만 마기가 가장 농밀한 곳이다. 상고 시대부터 마기가 줄곧 이곳에 억류되어 있었으니 마수찬(魔髓鑽) 몇 덩이가 형성되었을 수도 있다. 상고 경전에 따르면 마도의 진귀한 보물을 제련하는 재료라고 하는데 이곳 주변과 지하를 좀 더 살펴볼 수 있겠느냐?”
“마수찬!”
한립도 무언가 생각났는지 바로 저물대를 스쳐 옥으로 만든 노란 늑대 머리 여의를 꺼냈다.
이것은 은월이 깃들어 있던 고보로 이제 기령은 없지만 여전히 간단한 토둔술 정도는 펼칠 수 있게 해주었다.
한립이 법결을 외자 한립 주변의 보호막이 더욱 커지며 그의 소매에서 하얀 빛줄기가 빠져나와 떨어져 내렸다. 바로 은월이 변한 새하얀 여우였다.
“시간이 긴박하니 나눠서 찾아보자꾸나.”
한립은 빠르게 설명하고 금색 뇌전 덩이를 은월에게 던져주었다.
“그 정도 벽사신뢰로는 오래 버티지 못하니 조금이라도 기운이 약해진다 싶으면 바로 돌아와야 한다. 알겠느냐?”
“예, 주인님! 허나 마수찬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
“마수찬은 칠흑 같은 검은색의 수정처럼 생긴 물건이다. 엄청난 마기를 지니고 있으니 알아 볼 수 있을 게다.”
한립 대신 대연 신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 그렇군요! 바로 움직이겠습니다.”
하얀 여우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로 만든 제단 아래로 모습을 감추었다. 한립 역시 곧바로 손에 들고 있는 옥 여의에서 노란 빛을 내뿜어 돌로 스며들었다.
은월과 한립이 사라지고 주위는 다시 마기 천하가 되어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다.
한참 후에야 벼락 치는 소리가 들리고 금빛 보호막으로 몸을 감싼 한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사방을 둘러보아도 은월의 흔적은 없었다.
걱정스런 기색이 스쳤으나 그는 새까만 수정을 꺼내보였다. 겨우 엄지손가락만 한 작은 수정이었다.
“내 예상대로 과연 마수찬이 있었어! 이런 보물은 상고 마수라도 오매불망할 물건이다. 기연이 따라주는 구나.”
대연 신군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습니까?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데요.”
한립은 그제야 수정을 눈높이까지 들어 살펴보았다. 수정은 마치 그 새까만 어둠 속으로 영혼까지 빨아들일 것 같은 요사스런 분위기를 뿜어냈다.
한립은 흠칫 놀라며 바로 시선을 거두었다.
바로 그때 발밑에서 은빛이 반짝이며 하얀 여우가 희미한 금색 뇌전에 둘러 싸여 한립의 보호막 속으로 뛰어 들었다.
“계속 돌아오지 않으면 소환이라도 하려고 하였다.”
한립이 발밑의 여우를 향해 손을 뻗으니 푸른 기운이 작은 여우를 휘감아 끌어당겼다. 여우는 곧바로 입에서 새까만 수정 세 덩이를 뱉어냈다.
“잘했다.”
한립이 희색을 드러내며 칭찬을 하자 여우는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소매 속으로 사라져 모습을 감추었다. 한립은 곧바로 마수찬 네 개를 모두 모아 저물대 속으로 집어넣었다.
“이제 가야할 때입니다.”
그는 다시 보호막에 금빛 뇌전을 씌워 천천히 올라갔다. 그의 속도는 상당히 느려 장장 일각을 올라가서야 하얀 빛의 장막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는 마기를 벗어나자마자 주위의 벽사신뢰를 거둬들였다. 하지만 바로 상공으로 올라가지 않고 저물대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바로 작은 청록색 깃발이었다.
“그, 그것은 일전에 보았던 음라번 아닙니까?”
은월이 놀라며 물었다.
“음라번은 깃발에 깃들어 있던 음귀는 사라졌지만 구하기 어려운 마도 보물이다. 이전에 보니 귀기를 흡수해 스스로 복구할 수 있더구나. 합환 노마가 퇴마용 마도 깃발을 빌려 주며 마기나 귀기 모두 극히 음한 성질을 지녔다고 했으니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해 봐야겠다. 이렇게 정순한 마기가 가득한 곳에서 복구가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말이다.”
한립이 담담히 설명하며 손에서 푸른 기운을 일으켜 작은 깃발을 감싸자 깃발은 푸른 빛줄기로 변해 마기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러자 깃발 주변의 영기는 마기에 의해 순식간에 잡혀 먹었고 훼손된 음라번은 그대로 마기에 노출되었다. 한립은 수결을 맺어 청록색 깃발을 향해 팔을 뻗었다.
죽은 듯이 잠잠하던 음라번에서 녹색빛이 발광하더니 점차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한 장 길이로 커진 거대한 깃발은 구멍이 숭숭 뚫려서 처량한 몰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