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1
491화. 마기의 심연(深淵)
지양 상인은 한립이 원영 후기에 이른다 해도 천남을 통일하는 등의 헛된 일에 시간과 힘을 소비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미 그의 실력이면 낙운종이 아니라 계국 전체를 거느릴 수도 있지 않은가.
정도맹이 계국 내에 심어 놓은 첩자의 보고에 따르면 한립은 원영 초기부터 중기에 이르기까지 오직 수련에만 힘쓰며 권력에 대한 욕심은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반 시진이 지나자 한립은 거의 만 장 가까이 내려왔다고 생각했다. 사방을 선회하는 비검이 느끼는 압력으로 보아 여기까지 내려올 수 있었던 건 그가 원영 중기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다.
그때 옆에서 같이 내려가고 있던 지양 상인이 입을 열었다.
“한 수사! 곧 바닥에 도착하니 조심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한립도 서둘러 정신을 집중하고 아래쪽을 바라보았다. 과연 수십 장 아래쪽에 눈을 찌를 듯한 하얀 빛이 보였다. 마치 두꺼운 빛의 장막이 쳐져 있는 것 같았다.
한립이 속도를 줄이자 지양 상인도 빛의 장막을 대여섯 장 앞두고 멈추었다. 명청령안의 도움을 받은 한립은 빛의 장막 뒤에서 꿈틀거리는 엄청난 양의 마기 흐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게 바로 봉인된 마기로군요. 정말 성가시게 되었습니다.”
한립이 빛의 장막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마기가 너무 많아 이미 마기의 심연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솔직히 노부도 사기를 어느 정도 물리치는 공법을 수련했으나 직접 들어갔다가 겨우 백장 밖에 버티지 못하고 돌아 나왔습니다.
이곳의 마기는 마성이 강하고 양이 엄청나 보통 수사들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상고 마공을 익힌 마수라 해도 저 안에 들어가면 곧 마기가 침투해 이지를 상실하고 말겁니다.”
한립이 지양 상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빛의 장막 뒤의 마기를 주시했다.
“지양 형,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내려가서 직접 마기의 위력을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지양 상인은 한립의 말을 이미 예상했는지 전혀 놀라지 않았다.
한립이 바로 신형을 빛의 장막 가까이로 이동했다. 그의 발끝에서 푸른 검기가 솟아나오더니 그대로 빛의 장막을 뚫고 들어갔다.
“……?”
한립은 흠칫 놀랐지만 뜻밖에도 빛의 장막은 마기에만 구속을 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되면 비술을 펼쳐 금제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을 뺄 필요는 없었다.
잠시 후, 그의 주변에서 금색 검빛들이 선회하며 천동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검에서 나타난 금빛 뇌전들이 곧 커다란 그물이 되어 그를 감싼 것이다.
그가 수결을 맺자 금빛 그물이 급속도로 작아지며 남색 방패가 만든 보호막에 달라붙어 거대한 구체를 형성했다. 그리고 비검들은 다시 작아져 물고기 떼처럼 한립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곧 한립의 신형이 빛의 장막 속으로 가라앉으며 마기로 진입했다.
쿠르릉!
새까만 마기가 달려들었지만 천둥소리가 울리자 흩어졌다가 곧 그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한립은 바로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조용히 마기가 금빛 뇌전에 흩어졌다 다시 모여드는 것을 관찰했다.
벽사신뢰가 소모되는 속도를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 들어온 후로 그는 감히 의식을 내보내 주위를 살펴보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 정도로 농밀한 마기라면 수사의 의식까지 오염시킬 것이다.
이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명청령안 뿐이었다. 그러나 칠흑 같은 마기의 심연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가 이백 장 가량을 둘러보다가 멈춰 서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벽사신뢰가 대단하긴 합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을 버티고도 멀쩡하다니요. 명성이 자자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한립이 빛의 장막을 빠져나오는 것을 보고 지양 상인이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누군가 마기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쉽게 흩어버릴 수 있었던 것이지 아니었다면……. 나머지 이야기는 올라가서 이야기 하실까요?”
한립의 말에 지양 상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은 곧 위로 올라갔다.
* * *
“어떠합니까? 한 수사의 벽사신뢰라면 마기 속에서도 무탈했겠지요?”
한립과 지양 상인이 소용돌이에서 날아오는 것을 보고 기다리고 있던 수사들이 나타났다.
“한번 시도해 볼 수는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진법 원반은 어디에 둬야 하는 것입니까? 너무 깊은 곳까지 들어가야 한다면 벽사신뢰라도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위무애의 물음에 한립이 차분히 대답했다.
“구체적인 위치는 돌아가서 이야기 하시지요. 진법 원반도 진법 대사들의 수중에 있으니 먼저 그것을 찾아 상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법 원반도 상당히 어렵게 제련해낸 것이라 실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합환 노마가 말했다.
합환 노마의 말에 수사들은 서둘러 영귀도로 돌아갔다.
영귀도로 돌아온 수사들은 한립에게 밀실 하나를 주어 쉴 수 있도록 해주었고, 그 사이 나머지 수사들이 진법 대사들을 찾아가 진법 원반을 찾아오기로 했다.
이튿날 아침, 한립은 지양 상인의 전음부를 받고 즉시 대청으로 향했다. 대청에는 수사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위무애가 손바닥을 뒤집어 은은한 붉은 색의 옥간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한 수사 앉으시지요. 이것이 바로 진법 원반을 설치할 위치입니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한립이 손을 뻗자 옥간이 ‘쉭’ 하고 날아올랐고, 곧바로 의식을 불어넣었다. 한참을 살피던 한립은 어두운 안색으로 의식을 거둬들였다.
“제게 이렇게 깊은 곳까지 들어가 진법 원반을 설치하라는 것은 그냥 돌아오지 말라는 것 아닙니까.”
“그럴 리가요. 진법 원반을 설치해야 하는 곳이 조금 깊기는 하지만 한 수사는 벽사신뢰라면 별 문제 없을 겁니다.”
합환 노마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가요? 합환 형께서는 제 벽사신뢰가 무한한 줄 아시나 봅니다. 아니면 진법 원반만 제대로 설치되면 그 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겁니까.”
“수사의 말투는 마치 벽사신뢰로도 들어가는 것 밖에는 버티지 못한다는 뜻으로 들립니다. 하지만 제가 기억하기로…… 추마골에서 고마와 싸울 때 상당히 많은 양의 벽사신뢰를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까?”
위무애가 미간을 좁혔다.
“수사들께서는 깊은 곳까지 가보지 않으셨군요.”
한립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모두를 훑어보았다.
“그 말씀은…….”
위무애가 멍해졌다. 합환 노마는 눈에 이채를 띠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고 지양 상인도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가만히 있었다.
“깊이 들어가 보셨다면 마기의 심연 아래로 내려갈수록 마성이 강해진다는 것을 아셨을 텐데요. 저도 2, 3백 장 정도 내려가 보고서야 벽사신뢰의 소모가 빨라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무리 많은 벽사신뢰를 지녔어도 수천 장 아래에서는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한립이 두 손을 탁자에 올려놓고는 냉정히 분석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지양 형, 우리 셋 중에 가장 깊이까지 가보셨으니 확인을 해주시지요.”
위무애가 인상을 찡그리며 지양 상인을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제가 비술을 이용해 마기 깊숙이 들어갔을 때도 법력 소모가 빨라지는 기분을 느꼈으니까요. 만일 한 수사가 감지하지 못했다면 제가 먼저 당부하려 했었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애초의 계획대로 수사 한 명이 마기에 효험이 있는 보물들을 가져가더라도 마화가 될 가능성이 높겠습니다.”
합환 노마 역시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그래서 빈도가 이전 계획을 크게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 수사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막지 않은 것입니다.”
지양 상인이 쓴웃음을 짓자 한립이 서늘하게 세 수사의 표정을 살피며 내심 울적해졌다. 정말 이런 사실을 몰랐는지 아니면 고의로 속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대충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일순 대청 안이 적막해졌다. 분명 죽을 것이 뻔한데 누가 가겠다고 하겠는가?
아무리 거창한 대의명분으로 한립을 설득한다고 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이 자리에 모여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수행이면 천남 절반이 아니라 천남 전역이 마기로 오염되더라도 자신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구할 이유는 없었다.
훌훌 털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 그만이었다. 그들의 수행으로 어디서든 못 살아남겠는가.
이때 한립이 눈을 빛내며 한결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다들 난감하실 것입니다. 사안이 중대한 만큼 제게 시도해 볼만한 계획이 있기는 합니다만.”
“어떤 계획인지요?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지양 상인이 서둘러 말했다. 위무애와 합환 노마 역시 정신이 번쩍 드는 눈치였다.
“간단합니다. 벽사신뢰로 간신히 원반을 설치하는 것까지는 가능하겠지만 돌아오는 것이 문제지요. 그러니 이전에 사용하려던 퇴마에 효험이 있는 보물들을 빌려주십시오. 물론 그래도 상당히 위험하기는 하겠지만…….”
한립은 여기서 잠시 호흡을 고르며 말을 멈추었다.
“문제없습니다. 진법 원반만 제대로 설치할 수 있다면야 보물들은 당연히 빌려드려야지요.”
위무애가 안색이 밝아져 서둘러 답했다.
“물론 한 수사가 그냥 이런 위험을 아무 대가없이 무릅쓰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합환 수사?
지양 상인이 돌연 합환 노마를 향해 빙그레 웃어보였다. 합환 노마가 잠시 당황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사실 별 다른 일이 없었더라도 우리 셋은 칠령도 중 하나를 한 수사에게 양도하려고 하였습니다.”
“칠령도 중 하나를요?”
그 말에 한립의 동공이 수축했다.
“칠령도를 일곱 개의 종파가 나눠서 차지했다고는 하나 결국에는 대부분 저희 3대 세력이 지니고 있습니다. 마침 나누기 어려운 섬이 하나 남았는데 원래 룡함, 봉빙 부부에게 맡기려고 했지만 공교롭게도 부부가 동시에 폐관 수련에 들어갔더군요.
한 수사가 위험을 감수해 주신다면 그 섬은 낙운종에게 드리겠습니다. 그렇다 한들 누가 군소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지양 상인이 유쾌하게 답했다.
“그런 일이 있었단 말입니까?”
한립은 멍해졌다. 칠령도 섬들은 질 좋은 영맥이 흐르는 것 외에도 상당히 많은 영석이 매장되어 있어 진귀하기 그지없었다.
“칠령도가 봉인결계의 일부분이라면 결계 보수가 끝나고 나면 다시 해수면 아래로 사라지지는 않을까요?”
“걱정 마십시오. 우리가 결계를 보수하는 방법은 원래의 봉인결계와는 차이가 있어 섬들이 가라앉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섬을 소유한 종문의 수사들은 앞으로 봉인결계를 수호할 의무를 지게 되겠지요.”
한립의 의문에 위무애가 설명했다.
“세 수사께서 그런 귀한 선물을 주신다니 다녀오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진법 원반을 설치한 후에는 어떤 일에도 참여하지 않겠습니다.”
고민하던 한립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명확히 말했다.
“진법 원반을 설치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공을 세우는 것인데, 어찌 다른 일까지 부탁하겠습니까?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기면 됩니다.”
위무애가 별일 아니라는 듯 큰 소리로 웃으며 단번에 대답했다. 합환 노마와 지양 상인 역시 이전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안심하는 눈치였다.
그때 위무애가 저물대에서 하얀 원형의 물건을 꺼냈다.
한립이 그것을 받아서 살피니 하얀 옥 원반이었다. 영기의 빛이 반짝이고 복잡한 주술이 새겨진 모양이 무척 비범해 보였다.
“이제 만반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한 형께서는 언제 일에 착수할 예정이십니까?”
위무애가 만족스럽게 물었다.
“봉인결계 보수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지요. 지난 밤 쉬면서 소모했던 법력을 대부분 회복하였습니다. 만일 세 분께서 보물들을 갖고 계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다녀오지요. 미루다가 어떤 변고가 생길지 모르니까요.”
한립의 말에 다른 수사들이 의견이 있을 리 없었다. 수사들은 어렵게 모은 퇴마용 보물들을 저물대에서 꺼내 한립에게 주었다.
교룡 머리 모양의 옥 여의(如意), 붉은 팔괘 거울, 금빛이 찬란한 갑옷과 새까만 깃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