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9
489화. 통보결(通寶決)
한립은 기이한 광경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솥에 대고 있던 손바닥을 통해 푸른 기운을 계속해서 주입했다. 대량의 영기가 주입되자 솥도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가 지켜보는 동안 남색의 고대 문자가 하나 둘 솥에 나타나 나부꼈고 허공에 괴상한 법결 경문을 형성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한립이 영기 주입을 줄이자 허공의 문장도 어두워지며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변해버렸다.
놀란 그가 재빨리 영기를 주입하자 다시 허공의 문장들이 안정을 찾아 빛을 발산했는데 겨우 천 개 남짓한 글자였다. 그것을 살피던 한립은 잠시 희색을 드러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바로 이 문장 속에 허천정을 다를 방법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천정을 부리는 조건은 두 개였다.
하나, 반드시 허천정이 지닌 건람빙염을 제련할 것, 둘, 반드시 ‘통보결(通寶決)’이라는 상고공법을 익힐 것.
이 법결은 통천령보 등급의 보물을 부리기 위해 특수하게 고안된 것으로 각각의 보물이 자신만의 통보결을 지니고 있었다. 즉 통보결을 지닌 고보만이 통천령보라고 불릴 수 있다는 뜻이었다.
이런 법결을 수련해야 통천령보를 자신의 몸에 봉인해 천천히 제련할 수 있었고, 보통 법보처럼 의식을 융합할 수도 체내에 보관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통천령보와 주인의 의식이 완전히 일치 되었을 때 그 무서운 위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지만 수도자의 의식은 보조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본명법보와 달리 다른 수사에게 빼앗길 수도 있었다. 다만 통천령보를 빼앗은 수도자는 통천결을 익히고 오랜 세월 본래의 영성의 자취를 개선하는 과정을 거쳐야 그것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내용에 한립은 크게 기뻐했지만 정작 통천결 자체를 보고는 난색을 표했다.
보기에는 간단해서 겨우 3성에 불과했지만, 1성을 수련하는데 원영 중기의 수행이 2성과 3성을 수련하는 데는 원영 후기 그리고 화신기의 수행이 필요했다.
통천결의 1성만 수련하면 통천령보의 일부 위력만을 빌려 사용할 수 있었다. 그가 손바닥을 거두자 영기의 주입이 끝난 허천정의 문장들도 붕괴되어 사라졌다.
한립을 솥을 응시하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대경검진과 자라극화보다 더 대단할까? ’
묵묵히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던 그가 일단 통천결 1성을 수련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에는 체내에 봉인해 제련을 하며 키워나가면 될 것이다.
그가 소매를 털어 푸른빛을 쏘아 보내니 거대한 솥이 다시 작아져 되돌아왔다. 한립은 다시 가부좌를 틀고 두 눈을 감은 채 통천결 제1성을 묵묵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통천결 자체는 복잡하지 않아 한 달 정도면 될 것 같았는데 허천정의 영성을 제련하는 것은 날짜를 확실히 알 수 없었다. 1년이 될 수도 있고 길면 10년이 넘게 걸릴 수도 있었다.
* * *
두 달이 훌쩍 넘어 한립이 밀실에서 걸어 나왔다.
통천결은 예상보다 빨리 익힐 수 있어서 겨우 스무 날 정도 만에 허천정을 체내에 봉인 할 수 있었다.
남은 시간은 정 노인이 구해준 재료와 이전에 허천전에서 얻은 꼭두각시 잔해를 이용해 원영기 급 꼭두각시를 제련하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재료의 양이 적어 겨우 한 명 밖에 제련할 수밖에 없었다.
물을 필요도 없이 대연 신군이 제련하고자 하는 꼭두각시는 이런 것들보다 훨씬 복잡할 텐데, 그럼 성공률은 극히 낮을 터였다. 하나를 제련할 재료를 구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그 몇 배를 구해야 하다니!
다행히 이 문제에 대해 상의하자 대연 신군은 득의양양해서 설명을 해주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제련법이니 실패할 걱정은 없다는 것이다. 만일 실패한다면 제련법 자체의 문제이니 다시 재료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 말에 한립은 정말 한시름을 놓았다.
밀실을 떠난 그는 금지로 가 남궁완을 살피고, 다시 며칠에 걸려 결단기 수사에게 도움이 될 만한 단약을 잔뜩 제련해 모패령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정 사형과 려락에게 작별을 고하고 지양 상인과의 약조를 지키러 출발했다.
정 사형과 려락은 새로 얻게 된 영석 광산 및 자질구레한 일들로 아직까지도 정신없이 바빴지만 그가 떠나는 것은 직접 배웅했다.
* * *
한립은 낙운종을 떠나 북쪽으로 날아갔다.
칠령해는 계국 북쪽 무변해에 속해 있었기에 일단 해변에만 도착하면 소용돌이와 일곱 섬들까지는 하루 거리였다.
이레 후 해수면 위에 나타난 한립은 이곳의 변화를 감지했다.
혼탁하기 그지없던 바다가 맑은 것은 아니지만 거의 짙은 남색으로 되돌아와 있었고 흉포한 해양 요수들 대신 작은 물고기나 갑각류가 나타나 활동을 하고 있었다.
특히 인근의 영기가 이전에 왔을 때에 비해 천양지차로 달라져 있었다.
다시 반나절을 날아가자 거대한 영기의 발원지가 나타났다.
그 거대한 영기의 발원지 주위로 일곱 개의 영기의 파동이 느껴졌는데, 그게 바로 칠령도일 것이다. 한립이 호기심을 느끼며 속도를 높였다.
그때 멀리서 검은 점들이 보이더니 예닐곱 명의 수사들이 다가왔다. 결단기 수사 한명을 선두로 한 축기기 수사들이었는데 결단기 수사는 고운 얼굴의 궁장 차림을 하고 있었다.
한립이 자신의 수행을 숨기지 않았기에 그들의 태도는 한없이 공손했다.
“합환종 문하의 제자들이 선배님을 뵙습니다. 다른 선배님들의 명을 받아 주변 해역을 봉쇄하는 중인데 어쩐 일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봉쇄? 지양 수사의 말대로 문제가 생긴 것이로구나.”
한립이 그녀에게 답하지 않고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혹시 낙운종 한립 선배님이 아니십니까?”
궁장 여인이 다시 그를 살피더니 놀라며 정중히 물었다.
“맞다. 지양 상인의 요청으로 이곳에 온 것이니 알리거라.”
그 말에 수사들이 소란스러워졌다.
현재 천남 수도계에서 한립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한 선배님이시라면 보고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양 선배님께서 벌써부터 기다리고 계시니 영귀도로 바로 모시겠습니다.”
궁장 여인이 즉시 대답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자 궁장 여인이 다른 수사들에게 몇 마디 당부하고는 그를 안내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곧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작은 섬이 나타났다.
“이곳은 저희 합환종이 점유하고 있는 영봉도이옵고, 태진문이 있는 영귀도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한립은 여인이 말한 방향을 보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다른 방향에서 거대한 영기의 파동이 느껴졌는데 분명 거대한 소용돌이가 위치한 쪽일 것이다.
한참을 날아간 후, 그녀가 말하던 영귀도에 도착했다. 이 섬은 합환종이 있는 영봉도에 비해 조금 컸고 위에서 내려다보니 정말 거북이를 닮은 모양이었다.
인근에 이르러 궁장 여인이 전음부를 보냈고 둘이 섬에 도착했을 때는 하얀 빛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지양 수사 아니십니까. 친히 마중을 다 나와 주시고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익숙한 둔광에 한립이 멈추더니 멀리 빛줄기를 향해 전음을 보냈다.
“한 수사가 이렇게 약조를 지켜주었는데 빈도가 마중을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요.”
지양이 한립을 보고 기분이 좋아져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후 그는 한립 앞에서 영기의 빛을 거두고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이 그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우선 제 거처로 가시죠. 이미 위무애 수사에게 연락을 하였고 합환종의 노괴는 잠시 일이 있어 오지 못할 듯합니다.”
지양이 궁장 여인을 돌아가라 이르고 한립을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예, 수사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한립이 그를 따라 섬으로 날아갔다. 가는 도중 의식으로 섬을 살피던 그가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은 만든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동굴로 들어갔다. 별 볼일 없는 돌산에 파낸 동굴이었지만 거대했고 내부가 아주 정결했다.
대청에 들어가 두 수사가 자리를 잡자 두 명의 수사들이 영차를 내왔다. 한립은 차를 한 모금하고는 지양 상인과 담소를 나누었다.
아마 급히 그를 청한 이유를 지금 밝히고 싶지는 않은지 주요 화제는 인근의 변화와 칠령도를 점유하고 있는 문파들의 정황이었다.
보아하니 위무애가 오기 전에는 어떤 정보도 노출하지 않을 생각 같았다. 약간 불쾌하기는 했지만 한립은 모른 척하며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반 시진 만에 위무애가 동굴 밖에 도착했고 도사의 마중을 받으며 대청으로 들어왔다.
그도 한립과 잠시 한담을 나누었는데 뽀얀 피부와 혈색 좋은 얼굴이 추마골에서 크게 상한 원기를 거의 회복한 듯했다.
이에 한립은 약간 이상해졌다.
저번 대전에서 원기를 크게 상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단시간에 원기를 회복하다니 대량의 단약을 복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위무애는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양 형, 사정을 설명해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중대한 일은 셋 중에 적어도 둘은 모여야 이야기하기 쉽습니다. 이제 위 형도 오셨으니 한 수사에게 이야기를 해주시지요. 빈도는 옆에서 몇 마디 거들기나 하겠습니다.”
“그러지요! 후환을 남길 수 있으니, 더 미룰 수 있는 일도 아니니 말입니다.”
‘후환? ’
한립이 그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한 수사 복잡한 이야기지만 단순명료하게 말하겠습니다. 이 일은 그 고마와 연관된 일입니다.”
위무애는 시작부터 한립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 고마는 중상을 입고 멀리 달아난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기는 합니다만……. 소용돌이가 나타난 시기가 너무 공교롭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고마가 사라지고 무변해에 이상한 현상이 생긴데다 조사를 통해 어느 정도 증거를 찾아냈습니다.
고마가 토벌되기 전에 몇몇 수도 가문과 작은 종파들을 도륙한 것은 알겁니다. 알고 보니 전부 마기나 마기로 소문이 난 보물을 지닌 가문이더군요. 고마는 그 중에서 세 개의 마기를 찾아내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소용돌이 인근에서 그 중 하나의 잔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마가 일단 무변해로 와 무슨 짓을 벌이고는 토벌대에게 유인당해 중상을 입고 천남을 떠났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소용돌이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서는 세 분께서 이리 신중하게 움직이실 리는 없을 텐데요.”
“한 형의 말이 맞습니다. 그저 영기를 분출하고 영맥이 흐르는 섬이 생긴 것이라면 이렇게 모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관건은 조사를 통해 거대한 소용돌이가 놀랍게도 아주 오래 전에 설치된 거대한 봉인결계의 눈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일곱 개의 섬들이 그 결계의 일부에 불과하다면 사안의 중요성을 아시겠지요.”
“봉인결계가 봉인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거대한 결계를 쳐서 봉인해야하는 것이라니…….”
위무애의 말이 이어질수록 한립의 안색이 크게 변했다.
거대한 소용돌이를 봉안으로 하고 일곱 섬을 망라하는 규모의 결계라면 그 크기가 얼마나 거대한지 짐작해 볼만 했다.
“그건 우리도 알고 싶습니다. 아직 아무런 실마리도 찾지 못했지만 상고마계와 고마가 연관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지양 수사가 말해 주시지요. 어쨌든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 상황을 살피고 오셨으니까요.”
위무애가 지양 상인을 보았다.
“무슨 할 말이 있을까요. 나머지 두 분도 이미 확인하지 않으셨습니까? 거대한 소용돌이의 하부는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마기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깊이는 알 수 없었지만 소용돌이 속에 정순한 영기가 내리누르고 있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양새였습니다.
만약 폭발해 마기가 빠져 나온다면 우리 천남은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고 천남 지역의 천지 영기에도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심지어 무변해가 이전에 보였던 공포스러운 모습도 전부 해저 깊숙이 마기를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지양 상인이 담담하게 설명했다.
“한 수사도 보셨다시피 봉인결계의 영안이 이미 망가졌습니다. 벌써 영기가 새어나오고 있어 가두고 있던 마기를 억제하지 못할 날이 멀지 않았어요. 마기가 빠져나오면 천남 지역의 절반은 수도자들이 수련할 수 없는 불모지가 되겠지요. 그리고 한 형이 몸담고 있는 낙운종이 바로 무변해 근처에 있지 않습니까.”
위무애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말했다.
“저를 여기까지 부르신 것은 이미 세 분이 해결책을 찾으셨다는 뜻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