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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488화 (245/2,000)
  • # 488

    488화. 제련

    엄청난 한기로 자신을 제압한 한립의 실력이 과연 대단했다. 하지만 본명법보는 비검이고 주로 수행하는 공법도 얼음 속성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이렇게 다양한 비술을 지니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 지도가 아깝지 않구나. 건람빙염을 이렇게 세밀하게 조종하다니 얼음 속성 공법 위주로 익히지 않은 것이 아쉬울 정도구나.”

    돌연 대연 신군이 그의 머리를 울리며 웃어댔다.

    “그런 말씀 마시지요. 건람빙염의 위력이 강하기는 하지만 제 주공법에 미치지는 못합니다.”

    전음으로 대답한 그가 등 뒤의 날개를 거두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거대한 얼음덩이로 날아갔다.

    그가 대충 소매를 털자 푸른빛이 날아들어 남색 얼음이 수축하더니 다시 연꽃 모양으로 돌아갔다. 연꽃은 곧 한립의 이마로 스며들어 사라져 버렸다.

    세 비검이 자유를 되찾고 울부짖더니 다시 금 노괴에게로 날아갔다.

    다만 남색 얼음에 봉인된 시간이 있었기에 영성을 조금 잃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금 노괴가 아쉬운 얼굴로 입을 벌려 비검을 회수할 때 한립은 벌써 산 정상을 향해 하강하고 있었다.

    그가 다양한 비술로 순식간에 승리하는 것을 지켜본 노괴들은 치열한 접전을 기대하다가 실망하기도 했지만 한립에게 대한 경외심은 그만큼 높아졌다.

    한립이 정상에 내려서자 그가 서둘러 다가왔다.

    “한 수사의 실력이 명불허전입니다!”

    “낙운종이 앞으로 운몽산 제1종파에 오른 것을 감축 드립니다!”

    백교원 노괴들이 축하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서열 3위가 되지만 크게 개의치 않은 듯 했다.

    고검문 중년인은 얼굴이 좋지 않았지만 한립을 향해 예의상 미소를 짓더니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명형 역시 놀란 기색이 가시자 곧 평정을 되찾았다.

    정 사형과 려락은 매우 기뻐하며 서로 시선을 교환해 기쁨을 나누었다. 이번 일전 이후, 낙운종은 천 년 간 다른 두 종파를 압도할 것이다.

    다들 몰려들어 방금 펼친 신통력에 대해 묻자 한립은 겸손하게 대꾸하며 대충 넘어갔다. 그러자 다른 이들은 감히 자세히 묻지 못했다.

    잠시 후, 땅으로 내려온 금 노괴는 안색이 평안해 보였다. 이에 한립은 그에 대한 평가를 높였다.

    그리고 이제 다시 세 종파의 운몽산 내 이익을 분할하고 귀중한 보물을 서로 교환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이런 작은 교환회에 한립의 마음에 차는 물건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수련 상의 깨달음에 대한 논의는 큰 도움 되었다.

    반나절 후, 교류를 마치고 한립은 수련 경험과 깨달음에 대한 논의를 하는 자리에 앞으로는 종종 참여를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그 후 한립이 먼저 백교원의 지폐화지를 구경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열화 노괴는 조금 놀라긴 했으나 바로 허락했다.

    지하에 흐르는 불의 연못을 확인한 한립은 다시 반나절 후 인사를 하고 백교원을 떠났다.

    낙운종으로 돌아오면서 려락은 흥분에서 정 노인에게 앞으로 얻게 될 영석 광산과 진귀한 재료 산지에 대해 떠들어댔다. 본래 고검문이나 백교원이었던 것들이 이제 낙운종에 귀속된 것이다.

    정 노인은 려락처럼 흥분하지는 않았지만 즐거워 보였다. 한립은 그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낙운종에 들아 오기 전 노인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모든 것이 한 사제 덕분이네. 우리 낙운종이 계국 제1의 종파로 거듭나는 것은 몇 대에 걸친 오랜 심원이었지. 사제가 이런 대업을 이뤄 내다니. 려 사제와 상의해봤는데 노부가 세상을 떠나면 본 종의 대장로를 사제에게 넘겨주고 싶네. 사제의 뜻은 어떠한가?”

    “대장로 직위를 제게요?”

    그 말에 한립은 일순 멍해졌다.

    “솔직히 처음에는 려 사제가 대장로 직을 맡고 사제가 힘을 보태 낙운종을 꾸려나가 주었으면 했네. 하지만 이제 자네는 원영 중기의 수사가 되었고 우리 종파를 위해 큰 공을 세웠네. 어쨌든 보통 대장로는 가장 신통이 뛰어난 수사가 맡기 마련이 아닌가.”

    정 노인이 미소 지었다.

    “……사형의 호의에는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대장로 직은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침묵하던 한립이 뜻밖에도 단번에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사제 거절하지 말게. 계국 제1종파의 대장로를 원영 초기의 내가 맡는 것보다는 사제가 맡아야 명분도 살고, 실리도 얻을 수 있는 것 아닌가.”

    려락도 쓴웃음을 지으며 그를 설득하려 했다.

    “예의상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저는 정말 대장로 자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두 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오로지 수련에만 매진하는 수사입니다. 게다가 앞으로 길게 폐관 수련을 하게 된다면 종문을 관리하기도 어려울 텐데 어찌 낙운종의 발전을 꾀할 수 있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저는 나중에 본 종에 합류했기 때문에 저계 제자들은 물론 결단기 수사들조차 안면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대장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장로면 만족하니 대장로 자리는 려 사형이 맡아주십시오.”

    “하지만 사제…….”

    정 사형이 미간을 좁히며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다시 이 일을 거론하신다면 제가 낙운종에 머물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한립이 정색을 하며 과감히 선언했다.

    “……알겠네.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 이 일은 이후에 다시 상의하도록 하세.”

    정 노인이 려락과 시선을 교환하고 한립이 정말 예의상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대장로직을 맡기 싫어한다는 것을 확신했다.

    “제가 대장로 직은 거절했지만 그래도 낙운종의 장로입니다. 엄청난 변고가 있지 않은 다음에야 본 종이 번창할 수 있도록 천 년은 힘쓰지 않겠습니까.”

    한립이 안색을 풀고 얘기하자 정 사형도 애써 미소 지으며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그리고 화제를 돌려 지양 상인이 왔던 것에 대해 물었다.

    숨길 일도 아니라 한립은 담담히 사정을 설명했다.

    “지양 상인의 어투로 보아 칠령도와 소용돌이에 관한 일 같습니다. 이곳은 계국과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데 관련된 소식을 들으신 것은 없습니까?”

    “별 다른 소식은 없었네. 운몽산 은근에서 일어난 일이라 우리도 제자들을 파견해 보았지만 소문처럼 영맥이 있는 일곱 개의 섬과 소용돌이가 있을 뿐이었지. 섬의 귀속을 따지는 대회에 본 종은 참가하지 않았었네.”

    “그렇다면 약조한 때가 되어야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다. 지양 상인의 말대로 벽사신뢰의 힘만 빌려주고 위험한 일은 생기지 말아야 할 텐데요.”

    “어찌 되었든 조심하여야 하네. 삼대 수사가 나서야 하고 심지어 천남의 원영 중기 수사들을 전부 소집할 거라니 보통 일은 아닐세.”

    려락이 근심했다.

    “주의하겠습니다. 그들도 과분한 일은 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사제의 나이에 이런 실력을 지녔는데 그들이라고 함부로 하겠는가.”

    한립과 려락이 동시에 미소 지었다.

    낙운종으로 돌아온 정 사형과 려락은 즉시 한립과 헤어져 의사대전으로 향했다. 바로 핵심 제자들에게 본 종이 운몽산 제1종파가 되었음을 알리고 앞으로의 일을 상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립은 바로 남궁완이 봉인된 금지로 향했다가 몇 시진이 지나서야 피곤한 기색으로 그곳을 빠져와 거처로 돌아왔다.

    남궁완을 살피고 돌아오는 그는 기쁨과 근심을 동시에 안고 있었다.

    기쁜 소식은 화섬의 요단이 효과가 있어 남궁완에 걸린 저주가 약간 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걱정되는 일은 화섬의 요단이 예상보다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정말 저주가 풀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저주의 발작을 늦추고 위력을 감소시킬 수 있었으니 추마골 원정이 헛되지는 않았다.

    * * *

    밀실 안에서 눈을 감고 앉아있는 한립.

    지금은 남궁완의 일에 대해서는 잊을 때였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심란해 심마가 생길 수 있었다.

    그는 밀실에 들어와 줄곧 명상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가 입을 벌려 금색 실 뭉치를 분출했고 빙글빙글 도는 것을 향해 푸른 법결을 날렸다.

    쿠릉!

    천둥소리가 들리고 금빛 실 뭉치가 가느다란 뇌전으로 변해 흩어지며 그 안에서 콩알만 한 남색 불덩이가 나타났다.

    불덩이가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한립이 다시 입을 벌려 같은 색깔의 화염을 분출해 그것을 감쌌다. 계란만 해진 불덩이가 되돌아와 한립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괴상한 수결을 맺으며 그는 바로 두 눈을 감았다. 허천정에서 얻은 최후의 건람빙염을 제련하기 시작한 것이다.

    * * *

    보름 후, 한립이 두 눈을 뜨고 한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푸슉.

    손끝에 남색 불꽃이 생겨났는데 그는 그것을 말없이 바라보다 곧 손을 털어냈다. 불꽃은 순식간에 가느다란 남색 뱀으로 변해 그의 손끝에 똬리를 틀었다.

    “가라.”

    동시에 뱀의 몸에 날개가 돋더니 놀랍게도 살아있는 것처럼 밀실을 종횡무진 날아다녔다. 한립이 일다경 동안 뱀의 행동을 지켜보다 다시 한 손가락을 뻗었다.

    펑.

    그러자 뱀이 허공에서 폭발해 비처럼 쏟아져 내리더니 한립 체내로 사라져버렸다. 그제야 미소를 띤 한립은 중얼거렸다.

    “건람빙염 제련도 가면 갈수록 느는 구나. 처음에는 일 년이 지나야 겨우 한 줄기를 제련해 냈는데 이젠 보름 만에 같은 양을 해내다니.”

    그 후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저물대를 스쳐 작은 솥을 꺼냈다. 몇 촌 크기의 고색창연한 솥은 세공이 정교하기 그지없었다.

    그것은 바로 한립이 정성을 다해 보관중인 허천정이었다. 그가 허천정을 살짝 던지자 솥이 빙글빙글 돌아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한립은 손바닥 사이에서 남색 화염을 분출해내고는 주먹만 한 불덩이를 쏘아 보내 남색 불덩이를 맞추었다. 그러자 불덩이가 요동을 쳤고 빠르게 불어났다.

    잠시 후, 사람 머리만해진 거대한 불덩이가 그의 가슴 앞에 떠 있었다. 그 속에는 남색 화염이 타오르고 있었는데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불덩이였다.

    한립이 솥을 가리키자 불덩이는 빛으로 변해 날아갔다.

    그리고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화염의 공격에 솥이 날아가지 않고 물과 불이 서로 융합되어 빙염은 솥에서 활활 타오르고, 솥은 화염 속에서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한립이 뚫어져라 그것을 지켜보다가 의식을 분출해 무언가 달라진 점은 없는지 탐색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건람빙염에 둘러싸인 솥이 이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들고 체내의 영력을 집중해 명청령안을 펼쳐 허천정을 바라보았다.

    명청령안을 펼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그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손을 들어 솥을 가리키자 날카로운 푸른빛이 반짝이며 얇은 영기의 실이 뻗어나갔다.

    허천정은 남색 빛이 강해지며 본래 몇 촌 크기였던 것이 한 장 정도로 거대해졌다. 꽃, 새, 벌레, 물고기, 산과 물, 나무 등 만물이 새겨진 표면도 더욱 선명해졌다.

    한립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손짓하자 허천정이 그의 앞으로 내려왔다.

    자세히 그것을 살피던 그는 갑자기 손을 뻗어 남색 화염 너머에 있는 솥에 손바닥을 댔다. 그러자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흉흉하게 타오르던 남색 화염이 소용돌이치며 한 장 길이의 남색 교룡으로 변해 날아오른 것이다. 교룡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솥에 머리를 들이박고 사라져 버렸다.

    동시에 은은한 푸른빛을 띠던 솥의 표면이 남색으로 물들어 곁에 새겨진 동물들과 새와 곤충들이 표면을 타고 흐르며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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