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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486화 (243/2,000)
  • # 486

    486화. 의식 참관

    구불구불한 머리의 노인도 대청에 들어오자마자 한립에게 서선을 주었다.

    “이쪽이 한 수사겠군요! 수사의 위명은 익히 들어왔으나, 노부는 원영 초기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빨리 정진하다니 놀랍습니다.”

    “금 형이지요. 위명이라니, 과찬에 부끄럽습니다. 중기에 이른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을요.”

    한립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포권을 했다.

    “출관하고 수사의 실력에 대해 소문은 들어왔습니다. 소문이라는 것이 과장되기 마련이라지만 오늘 보니 그렇지만도 않군요.”

    구불구불한 머리의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옆에 있던 정 사형이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금 수사, 오시자마자 한 사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십니다. 앉으셔서 저희 늙은이들과도 몇 마디 나누시지요.”

    “실례하였습니다. 오기 전에 들은 바가 있어 호기심이 앞섰나봅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오늘 한 사제를 보고 실망하지 않으셨나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그럴 리가요. 도리어 제 예상을 뛰어 넘습니다. 낙운종에 한 수사 같은 장로가 생겼으니 앞으로 더욱 도약할 일만 남았습니다. 하지만 듣자니 한 수사가 귀 종의 직전 제자가 아니라지요. 황풍곡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금 노괴는 정 사형을 힐끗 보며 냉소했다.

    “그렇다 한들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한 사제가 지금 낙운종의 장로인게 중요하지요.”

    정 사형이 차분히 대답하자 금 노괴가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갑자기 풍 노인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희 백교원에 쓸 만한 영과가 들어왔는데 맛이나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곧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젊은 여제자들이 붉은 과실을 담은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화류과(火榴果)입니다. 제자 하나가 어떤 황무지 산에서 발견한 것인데 달고 맛이 좋은 데다 범인이 먹으면 건강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풍 노인은 여제자들이 영과를 내려놓자 설명을 해주었다. 이후 다들 처음 보는 영과에 호기심을 드러내며 맛을 보기 시작했다.

    과연 달고 맛이 좋은데다 천지 영기를 함유하고 있어 한립도 단번에 세 개나 먹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황룡 수사가 보이지 않고 대신 수사께서 오셨나 봅니다. 명형 수사 맞으시지요?  만년 황목으로 제련한 무척 귀한 법보를 지닌 데다 최정상급 나무 속성 공법인 백화양춘결(白花陽春決)을 익혔다는…….”

    백교원 정 노인이 고검문 여인을 보며 물었다.

    “예, 제가 명형입니다. 황룡 사형께서는 단운산 시장에 화영수의 알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몇 개월 전에 문파를 비우셨습니다. 저는 원영을 이룬 지 5, 6년 밖에 되지 않아 이번에 여러 수사들을 뵙고 많은 가르침을 얻고 돌아가겠습니다.”

    여인의 외모는 예쁘지는 않았지만 행동과 말투에서 풍기는 온화하고 시원한 분위기가 있었다. 게다가 몸에서 은근히 풍기는 꽃향기는 그녀에게 호감이 가게 했다.

    영과를 맛본 장로들은 곧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립은 거의 입을 열지 않았고 가끔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도 미소를 머금고 넘어갔다.

    그의 명성이 대단했기에 백교원과 고검문 노괴들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한립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세히 살피는 눈치였다.

    활발하게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 대청 입구에서 불빛이 반짝이며 보라색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나타나자마자 풍 노인과 백교원 정 노인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열화 사형, 낙운종과 고검문 수사분들이 모두 도착하였습니다. 의식 준비는 차질 없이 되어가고 있습니까?”

    “잘 준비 되고말고요.”

    중년인이 그들에게 대답하고는 대청에 모인 수사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이제 다들 의식을 참관하시러 가셔도 되겠습니다.”

    다른 수사들도 분분히 일어나 그와 인사를 나누었다. 상대는 백교원 대장로였으니 예의를 갖추는 것이 당연했다.

    “열화 형, 오랜만입니다. 천화결(天火決)은 잘 익히고 계십니까?  의식이 끝나면 오랜만에 실력이나 겨뤄볼까요?”

    금 노괴가 열화 수사와 교분이 있는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흥, 됐습니다. 천화결의 위력이 어떻든 간에 경지 차이가 나는데 겨뤄봐야 좋은 꼴을 보지는 못하겠지요.”

    열화 노괴가 눈을 흘겼다. 이때 정 사형이 그에게 한립을 소개했고, 또 한 번 열화 노괴가 그의 수행에 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어 백교원 대장로를 선두로 모두가 의식을 참관하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다들 동굴을 나와 그들이 처음 도착했던 공터로 날아갔다.

    거대한 누각 앞에 수백 명의 축기기 제자들이 몇몇 무리로 나뉘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 앞에는 17명의 결단기 수사들이 숙연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이 수사들의 열댓 장 앞에는 기이한 양식의 화로가 놓여 있었다.

    직경이 한 장 정도인 네모나고 납작한 화로에는 화염처럼 신비한 문양이 조각되어 있었고, 더욱 기묘한 것은 분명 아무 것도 없는데도 새빨간 화로에 접근하면 타는 듯한 열기가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수사들의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들의 시선은 화로 앞에서 꿇어앉은 젊은 수사에 닿아 있었다.

    사내는 젊어 보였는데 금색 방석 위에 꿇어앉아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별안간 한립과 원영기 수사들이 기다리고 있던 수사들 앞에 나타났다. 곧 열댓 명의 제자들이 그들에게 다가와 예를 올렸다.

    “사숙님들과 선배님들을 뵙습니다. 옥 사제는 반 시진 동안 목욕재계를 하고 곧 화로를 개방해 의식을 거행할 것입니다.”

    부 노인이 걸어 나와 공손히 말했다.

    “알았으니 일단 물러 나거라.”

    열화 노괴가 고개를 끄덕였다.

    “열화 수사, 저 수사가 백 년도 되지 않아 결단을 했다는 청년입니까?  자질이 정말 남다르군요. 오늘부터 건곤탑을 본명법보로 삼아 수련을 하면 2, 3백년 안에 원영을 이루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습니다.”

    구불구불한 머리의 노인이 청년을 살피곤 말했다.

    “허허, 원영을 할 수 있을지는 인연에 달렸지 자질에 달린 것은 아니지요. 영근 자질은 그 가능성을 조금 높여줄 뿐이지요.”

    열화 노인의 말에 구불구불한 머리의 노인은 담담히 웃었고 다른 수사들도 침묵하며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모인 제자들은 사조들의 등장과 원영기 수사들의 등장에 숨소리조차 조심했다. 꿇어 앉아 있던 청년의 중얼거리는 소리 외에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한립이 들어보니 그가 반복해서 읊어대는 문장은 특수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었다. 노괴들이 그의 의지를 굳게 하기 위해 시켰던지 아니면 백교원 만의 규칙 같았다.

    수련 시간을 연 단위로 따지는 노괴들에게 반 시진 정도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곧 화로의 뚜껑이 가볍게 진동하며 맑음 울림이 들려왔고 영기의 빛도 커지기 시작했다.

    화로 주변의 온도는 미친 듯이 올라갔고 거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열기가 주위를 덮쳤다.

    한립은 별 상관이 없었지만 축기기 제자들은 분분히 몸 주위에 보호막을 만들어내 겨우 열기를 담은 바람을 견뎌냈다. 그 한 장 앞에 꿇어앉은 청년은 더욱 몸에서 새빨간 빛이 솟아 열기를 막고 있었다.

    잠시 후, 열기가 지나고 청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화로를 바라보았다. 빼어난 용모의 대략 스물 일고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수척한 청년이었다.

    한립도 슬쩍 그를 살펴두었다.

    “시간이 되었으니 진법을 펼쳐 화로를 개방한다!”

    풍 노인이 주저 않고 소리쳤다.

    이어 결단기 수사들 중 두 명이 새빨간 화로의 양옆으로 날아갔고 나머지는 화로 위로 떠올라 각자의 남색의 진법 원반을 높이 치켜들었다.

    파앗.

    남색의 보호막이 공터를 뒤덮었다. 거대한 보호막이 펼쳐지자 화로 양 옆의 수사들은 수결을 맺어 법결들을 화로로 던져 넣었다.

    가볍게 진동하던 화로의 뚜껑이 오색찬란하게 빛나며 천천히 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천근은 되는 듯 육중해보였다.

    원래 꿇어앉아 있던 옥 씨 청년도 일어나 눈도 깜빡이지 않고 화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하얀 빛이 화로에서 솟아올라 눈부신 빛이 하늘 위로 솟구쳤고 청년도 즉시 빛줄기로 변해 그것을 쫓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하얀빛이 보호막에 부딪치자 청년이 그것을 잡아채려고 했다. 하지만 하얀빛도 영성이 뛰어난지 즉시 경로를 틀어 이번에는 아래쪽으로 향했다.

    거대한 보호막 안에서 하얀 빛과 노란 빛줄기가 술래잡기 하는 모습이 마치 유성이 달을 쫓는 것 같았다.

    수백 명의 축기기 제자들은 눈을 크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 반면, 원영기 노괴들의 얼굴은 차분하기만 했다.

    한립이 가늘게 눈을 뜨고 나른하게 그것을 지켜보았다.

    저 백교원 제자는 아직 어떤 법보도 본명법보로 삼지 않아 최상급 법보를 쫓기에는 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건곤탑이 갖고 있는 영력의 한계로 반 각 정도면 속도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그렇지 않고 보물이 나타나자마자 청년이 잡아 버리면 법보의 주인을 각인하는 의식이 너무 초라해 질 것 같았다.

    하얀빛은 요란했지만 명청령안을 사용한 한립 눈에는 보물이 분명하게 보였다. 삼척 길이의 하얀 탑은 작지만 정교했고, 외관상으로는 일반 법보와 똑같아 보였다.

    “한 수사, 수사가 보기에 저 백교원 제자가 어떻습니까?  원영기에 이를 가능성이 있겠습니까?”

    한립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리니 명형이라는 수사가 뒤에서 그를 향해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열화 수사의 말씀에 동의하는 바이지만 백교원에서 쓸 만한 영약을 제공한다면 원영을 이룰 가능성이 큰 수사입니다.”

    “저 수사의 자질이 아무리 뛰어나도 한 수사에 비하면 새 발의 피입니다. 듣기로는 추마골에 나타난 고마 중 한 마리를 홀로 상대했다지요. 그것만 봐도 실력이 삼대 수사에 버금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다른 수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찌 제가 홀로 고마의 적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마지막에는 고마가 공간균열에 빨려들어 죽은 셈이니 운이 따랐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모란 신사의 손에서 무사히 달아나고 대진의 마도 종파 장로를 죽인 사실은 소문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인이 이마 앞에 드리운 푸른 천을 매만지며 웃으니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상대의 치마가 흔들거리자 국화 향이 코를 찔렀고, 그 향기를 맡자마자 여인이 친밀하게 느껴졌다.

    ‘미혼술?  아니야……. 상대의 눈이 맑으니 미혼술은 아니겠지만 몸에서 풍기는 향기가 기이하구나.’

    상대의 영기 파동이 평온한 것으로 보아 전부 향기의 효과인 것 같았다.

    “두 번 다 운이 좋았던 것이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다만 사형들에게 듣자니 명 수사가 수련한 백화양춘결(白花陽春決)의 불가사의한 위력으로 형태도 없이 상대를 압도 한다던데 사실인지요?”

    “……백화양춘결의 위력에 대해 아십니까?”

    명형의 표정이 일순 달라졌다. 그녀가 백화양춘결을 수련한 사실은 많은 수사들이 알았지만 공법의 진정한 신통력에 대해서는 아는 이가 드물었다.

    한립이 무언가 말을 덧붙이려다 돌연 안색이 달라져 하늘 어딘가를 쳐다보았다. 여인도 한립을 따라 고개를 들었으나 아무 것도 감지할 수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금 노괴가 외쳤다.

    “열화 수사, 귀빈이 오시는 듯 합니다. 함께 맞이하시지요.”

    “귀빈이라면……?”

    한립이 탄식했고 금 노괴가 대답하기 전에 열화 수사 등 다른 이들도 한립이 쳐다보던 방향에서 무언가를 감지하고 놀랐다.

    “정말 누군가 다가옵니다. 이런 영기의 파동이라니, 원영 후기의 수사 같군요.”

    말이 떨어지지 무섭게 하늘을 가르며 다가온 빛줄기에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천극문 지양입니다. 열화 수사는 어디 계십니까?”

    “아, 지양 상인이 어쩐 일로?”

    열화 노괴가 어리둥절해 하며 중얼거렸다. 다들 서로의 눈치를 살폈지만 지양 상인을 초대한 사람은 세 종파 중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의 수행을 드러내놓고 찾아 온 것은 악의가 없다는 뜻이었다.

    “가 보시지요.”

    열화 노인이 차분히 말했다.

    어차피 지양 상인이 원영 후기 수사라지만 힘으로 그들 모두를 제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의식 참관을 미뤄두고 백교원의 금제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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