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480화 (237/2,000)

# 480

480화. 체류

한립의 손이 저물대를 스치자 열댓 개의 옥함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그가 몸을 굽혀 조심스럽게 영초를 채취하고는 그 중 하나에 옮겨 담았다. 아는 영초이든 낯선 영초이든 무엇도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 그가 얼굴을 굳히고 어딘가에 서 있었다. 상고 영초들 중 세 가지는 도저히 옮겨 심을 수가 없어서였다.

하나는 옥함에 옮겨 심자마자 스스로 불타올라 사라졌고, 또 다른 것은 영촉과처럼 시들어 약성을 상실했다. 마지막 영초는 더욱 괴상하게도 심어져 있는 땅을 건들자마자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세상에 옮겨 심을 수 없는 영초가 이렇게 많다니 한립은 답답해졌다. 가장 큰 문제는 그 세 가지 중 하나가 강운단의 주요 원료 중 하나라는 점이었다.

그가 새빨간 화염처럼 붉은 영초를 보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품에서 녹색의 작은 병을 꺼냈다. 바로 한립의 보배인 신비한 병이었다.

보통 비술을 이용해 몸에 숨기고 다녔기에 그가 죽지 않는 한 아무에게도 들키거나 빼앗길 리 없었다.

“그건 무엇이냐?”

대연 신군이 나무도 아니고 금속 재질로 만든 것도 아닌 초록색 병을 보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냥 법기입니다.”

한립이 대충 답하고는 병의 뚜껑을 열었다. 잠시 기다려 보아도 아무 일도 없자 한립이 천천히 병을 봉해 다시 품에 넣었다.

이 공간은 해도 달도 별빛도 없었기에 작은 병이 능력을 잃은 것이 이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울적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한립이 탄식하며 고개를 들어 회색 안개로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단약 외에도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었다. 어떻게 다시 인계로 돌아가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때 땅에서 은빛이 반짝이며 은월이 나타났다.

“주인님, 샅샅이 찾아보았으나 땅에는 망가진 금제가 하나 걸려 있을 뿐 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괜찮다. 어차피 땅 속에 출구가 있을 가능성은 크지 않았으니까.”

한립이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럼 허공에 있다고 보십니까?”

“그래, 사방을 찾아보아도 없으니 위쪽도 살펴봐야겠지. 은색 화염이 마혼을 죽였지만 인간 수사에게는 큰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다.”

과감히 그가 몸을 띄웠다.

공간 자체가 크기 않아 한립은 순식간에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회색 구름이 뒤덮인 상공을 명청령안을 펼쳐 살펴보는 중이었다.

구름 뒤쪽으로 은색 천 같은 것이 드리워져 있었다. 과연 영계 수사들이 펼친 금제였다.

한립이 한 손을 펼쳐 푸른 구슬을 쥐어 구름 속으로 쏘아 보냈다.

잠시 후 구슬이 아무 문제없이 은색 금제를 통과해 열 장 정도 더 날아간 후 무언가에 부딪쳐 스스로 폭발했다. 한립이 한층 마음을 놓고 푸른 빛줄기로 변해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은색 금제를 통과할 때는 긴장되긴 했으나 역시 금제가 발동되지 않았다. 영묘원에 남겨진 금제의 잔해들은 고마들을 겨냥해 전문으로 설치된 것이 분명했다.

명청령안을 이용해 공간의 벽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아무 것도 찾아 내지 못했다. 그는 순간 빠져나가기 어렵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한립이 실망한 기색으로 땅에 내려섰다.

“주인님…….”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곳은 사방이 완전히 막혀 있어.”

“그러면 이곳에 영원히 갇혀 있을 수도 있을까요?  이런 공간을 열려면 적어도 화신기 이상의 수사여야 할 텐데요.”

은월의 걱정에 한립도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한립은 어딘가의 공간의 벽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소매를 털어 금빛 비검들을 방출해 거검으로 변화시켰다.

쿠르릉!

천둥소리가 들리고 벽사신뢰가 검을 감쌌다. 이어 입을 벌리자 보라색 화염이 빠져나와 검 표면을 파고 타올랐다.

낮게 심호흡을 한 그가 거검을 움직여 벽을 내려쳤다.

쾅!

눈부신 빛이 사라지자 그가 벽을 관찰했다. 균열도 가지 않았고 잠시 왜곡되었다가 다시 원형을 되찾아 가는 모습에 뒤에서 은월도 실망한 기색이 다분했다.

한립이 계속 고민을 해보는데 머릿속이 울렸다.

“흐흐, 녀석아. 그렇게 공간을 깨부술 수 있겠느냐?  쓸데없는 짓 말거라.”

“선배님은 다른 방법이 있으십니까?”

한립은 그가 나무라자 화가 나기보다 반가웠다.

“이곳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생각해 보거라. 정말 너와 마혼의 공격이 충돌해 그 여파로 공간 균열이 생겼다고 여기느냐?”

“선배님의 뜻은…….”

“이곳은 영묘원의 잔해다. 강력한 힘에 의해 조각난 채로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공간인 게지. 방금 네가 공격을 가할 때 빛이 터져 나온 것도 공간균열이 불안정하다는 징조일 게다. 아마 너희가 인계에서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우연히 이곳과 인계의 공간을 잇는 얇은 경계면을 건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저와 은월이 사방의 벽을 전부 살폈지만 이상한 곳은 없었습니다.”

“멍청하기는. 공간 균열이 가장 약한 부분이 단단하게 감싼 공간의 벽이겠느냐. 공간 내부의 어느 지점이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공간이 불안정한 만큼 가장 약한 부분도 내부를 떠돌겠지. 잘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내부의 어느 지점이든 말입니까?”

한립이 대연신군의 조소 어린 설명에 머리가 밝아졌다.

그의 수행이 얕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공간에 대한 이해도는 만년 넘게 살아온 대연 신군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한립이 다시 가부좌를 하고 두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겨우 반 시진 만에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푸른 빛줄기로 변한 그가 암석으로 만든 정자로 날아갔다. 정자 중앙의 오륙 장 높이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남색빛이 일렁였다.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 미세하게 모호해졌고 의식을 통해서 아주 약한 영기의 파동이 느껴졌다.

바로 여기였다. 희색을 드러낸 그가 고민 끝에 소매에서 핏빛의 작은 검을 불러냈다.

“어찌 또 그 검을 쓰려는 것이냐?”

“아무리 약한 경계면이라도 본명법기로 공격해서는 열 수 없을 것입니다. 더 강력한 힘이 필요하기에 혈마검을 꺼낸 것입니다.”

“흥, 쓸데없이 원기를 낭비 말거라. 아까는 네가 이상한 비술을 사용해 수행을 크게 늘린 상태였기에 겨우 마혼의 공격과 더해져 공간균열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네가 같은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유일한 방법은 원영 중기 수준으로 수행을 끌어올려 그 이상한 부적과 혈마검을 사용해 경계의 틈을 여는 것이다.”

대연 신군이 거침없이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원영 중기에 이르는 것은 단번에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곳의 영기가 기이할 정도로 진하고 영단의 보조가 있다고 해도 2, 30년은 수련에만 정진해야 겨우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2, 30년 내로 이 공간이 없어질까 두려우냐?  바깥 세계에서라면 네 자질로 100년은 걸릴 일이다.”

한립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실 강운단이 있어도 바깥에서는 30년은 있어야 원영 초기의 최고봉에 오를 수 있다. 겨우 수십 년 이곳에서 수련을 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좁은 밀실에서도 폐관수련을 해왔으니까.

지금 유일하게 걸리는 것은 봉혼주에 당해 얼음에 갇혀 있는 남궁완의 안위였다. 그녀는 화섬의 내단을 이용해 저주를 풀어야만 했다.

하지만 남궁완이 남겨 놓은 서신에 따르면 그녀의 비술은 저주의 발작을 백 년 넘게 막을 수 있다고 했으니 2, 30년 정도 지체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고민을 거듭하던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은월, 영초들을 따오거라. 오늘부터 바로 영단 제련에 들어가겠다.”

옆에서 한립과 대연 신군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은월은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안심하고 있었다.

어딘가에 갇히는 것은 이제 그만 겪고 싶은 경험이었다. 이에 은월이 싱긋 웃으며 대답하고는 품에서 약병들을 꺼내 영초밭으로 향했다.

한립은 돌로 만든 정자 중간에 자리를 잡고 상고 약방이 적힌 옥간을 꺼내 연구에 들어갔다. 영초의 수량에 제한이 있었으니 조금도 낭비할 수 없었다.

천남 동유국 영주는 추마골이 위치한 창주와 근접한 작은 지역이었다.

창주의 무성한 산맥과 밀림과는 상반되게 나무나 강을 찾아 볼 수 없는 황무지여서 이곳에 기거하는 수도자도 거의 없었다. 다만 몇몇 소규모 수도가문들이 드문드문 영맥이 흐르는 땅을 찾아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다.

영주 서남쪽, 영린산도 그 중 하나였다.

면적이 별로 크지 않아 산맥 자체도 백 여리 규모였고, 산맥을 타고 흐르는 영맥은 겨우 십 리 정도에 분포하고 있었다.

큰 봉우리 옆에 낮은 산봉우리 두 개가 더 있어 간신히 수도문파 3개가 이곳에 나눠 살고 있었다.

황, 리, 왕 씨(氏) 가문은 정말 별 볼일 없는 작은 수도 가문들이었다. 가장 세력이 강한 황 가 조차 결단기 수사는 말할 것도 없고 축기기 수사 두 명이 다였던 것이다. 다른 연기기 제자들도 대부분이 3, 4성 정도가 보통이었다.

세 가문은 가까이 위치하면서도 서로 큰 갈등이 없었기에 우호적으로 교류하는 사이였다. 최근 백 년 이내에 세 가문의 제자들이 빈번하게 혼인을 해서 그렇기도 했다.

그런데 영린산은 영맥은 별로였지만 가장 높은 봉우리에 이름 모를 신기한 샘을 품고 있었다. 영안천 같은 귀한 보물은 아니라도 영물은 확실했다.

이 샘물에 몇 가지 약재를 담가 영차를 만들면 연기기 5, 6성 이하의 제자들이 수행에 적합한 몸이 되도록 도와주는 효과를 지니게 되는 것이었다. 이게 세 가문이 이곳에서 버티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샘물은 항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매년 정해진 며칠 간 만 샘솟았고 양도 무척 적어 세 가문이 나누기에 부족했다.

이렇게 세 가문의 장로들은 큰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세 가문이 공동으로 제자를 파견해 이곳을 봉인하고 10년에 한 번씩만 개방하기로 한 것이다.

10년을 모아야만 세 가문이 사용을 하기에 충분한 양의 샘물이 모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날 영린산의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세 가문에서 모인 수십 명의 제자들이 모여 있었다.

다들 열대여섯 살이 넘지 않은 어린 소년 소녀들로 수행도 연기기 3, 4성이 대부분이었고 연기기 1, 2성의 제자들도 있었다.

그 앞에 열댓 명의 성인 수사들만이 연기기 10성 이상이었고 축기기에 이른 수사도 3명이 서 있었다. 한명은 축기기 중기, 다른 두 명은 축기기 초기였다.

나름 심후한 수행을 지닌 열댓 명의 가문 어른들이 이곳에 설치한 금제를 해제하는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여러 부적들이 붙어있는 금제였다.

세 노인이 수사들이 주문을 외우는 틈에 손에 들고 있던 깃발을 흔들어댔다. 잠시 후, 노인 세 명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법결들이 안개로 변해 암석으로 날아갔다.

암석에 붙어 있던 부적들이 줄줄이 떨어져 나갔고 다른 제자들이 옥함을 들고 대기하다가 즉시 부적들을 회수해 조심스럽게 담아 두었다.

이런 금제를 펼칠 수 있는 부적은 그들에게는 대단한 보물이었던 것이다.

쿠릉.

부적이 사라지자 암석이 진동하더니 가운데가 쪼개지며 넓은 입구를 드러냈다. 지켜보던 어린 제자들이 다들 눈을 떼지 못하고 신기한 광경에 흥분했다.

이곳의 샘은 세 가문의 보물이어서 보통 제자들은 살면서 지금이 아니면 다시 볼 기회가 없었다.

새하얀 옥을 깎아 놓은 듯한 작은 샘이 맑은 물을 담고 있었고 샘물에서 나는 맑은 향은 수사들의 기분을 맑게 해주었다.

젊은 제자들이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며 웅성거리자 하얗게 수염을 늘어트린 노인이 뒤를 돌아 그들을 주시했다. 순식간에 제자들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는 황 씨 가문의 장로인 황원명이었고, 이미 축기 중기에 든 영린산 제1의 수사였다. 황 씨 가문 뿐 아니라 왕 씨, 리 씨 가문 제자들도 노인을 매우 존중했다.

“허허! 황 형이 있으니 어린 제자들이 말도 잘 듣습니다.”

회색 장포를 입은 노인이 그것을 보며 빙긋 웃어보였다.

“이미 축기기 중기의 최고봉에 오른 황 형인데 기세가 남다를 밖에요.”

또 다른 푸른 장포의 노인도 공손히 이야기 했다.

“아닙니다. 이 나이면 더 나아질 기회도 없는 늙은이일 뿐이지요. 어서 영차를 담아 제자들에게 복용하게 합시다. 이번에는 샘물이 저번에 비해 더 많이 모인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황원명도 웃으며 예의 바르게 대답했다. 다른 두 명의 노인은 다른 가문의 축기기 장로들이었다. 두 가문은 황 가 보다 못해서 겨우 축기기 수사를 한 명씩 보유하고 있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