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9
479화. 은색 화염
고마는 마혼이 공간균열에 휩싸여 사라지는 것을 보며 분노했지만 빛의 범위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가 마침 한립의 청죽봉운검들이 공간균열을 향해 맹렬히 날아가는 것을 보고 허공을 움켜쥐었다.
거대한 손이 나타나서 비검들 중 두 개를 잡는데 성공했다. 이때 보라색 불덩이가 어디에선가 나타나 한립을 따라 공간균열로 뛰어들었다.
고마가 주저하다 무언가를 하려는데 공간균열이 번뜩이며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눈을 부릅뜬 은발 노인과 고마 뿐이었다. 고마는 고개를 돌려 분노로 가득찬 시선으로 은발 노인을 바라보았다.
은발 노인은 다급히 노란 비검을 발동해 전신을 보호했는데 다행히 녹색 장포를 입은 수사들이 백 장 밖에 도착했다.
“정 수사 아니십니까? 도대체 무슨 일 입니까? 저 마물은 뭐고요.”
그들의 우두머리가 쌍두사비의 거대한 고마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바로 어령종 대장로 동문도였고 나머지 일행은 오행영령으로 원영기에 이른 세 수사들이었다.
“노부도 무슨 일인지 궁금합니다.”
잠시 후, 다른 방향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장포를 입은 귀령문 제자들과 그들을 이끄는 귀령문 종 장로였다.
두 무리 역시 공간균열이 사라지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이야기가 기니 일단 저 마물을 상대하시지요. 다만 다들 조심하셔야 합니다. 마물의 위력이 극도로 강하니 한 번의 실수로도 목숨을 잃을 수 있습니다.”
은발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동문도와 종 노인이 서로 시선을 마주치더니 거대한 육체를 지닌 마물을 경계했다.
고마는 거대한 머리를 천천히 돌리며 인간 수사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는 살기가 분명히 드러났다. 네 개의 팔이 천천히 허공을 휘저으니 칠흑 같은 거대한 칼날이 나타났다.
익숙한 광경에 은발 노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공간균열에 빨려 들어간 한립은 너무 강렬한 빛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법력을 잃은 그는 그저 머리가 아프고 눈이 부신 걸 그대로 견뎌야 했던 것이다.
만일 반인반요의 육체로 변신하고 있지 않았다면 버티지 못하고 기절했을 것이다.
잠시 후 그가 체내의 영력을 움직여 보니 뜻밖에도 법력이 회복되어 있었고, 눈부신 빛도 사라졌다.
한립이 주위를 둘러보고는 훽 하고 열댓 장을 물러났다. 마혼이 그와 가깝게 붙어 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필 것도 없이 이곳은 겨우 수십 장 크기의 작은 공간이었다.
‘아무도 없이 마혼과 단둘이 이런 곳에 떨어지다니.’
놀라운 점은 이곳의 영기가 너무 짙어 주변에 각종 영초와 영약들이 자라고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정자와 절반자리 회랑까지 있었다. 놀랍게도 이곳은 손상된 약재 밭이 분명했다.
그가 냉랭히 마혼을 보며 전신의 영력을 끌어올리니 금빛 뇌전이 터져 나오고 동시에 보라색 불덩이가 떠올랐다.
자라극화는 공간균열에 빨려 들어가는 순간 서둘러 챙긴 것이었다. 마혼도 상황 파악이 끝났는지 표정이 묘해졌다.
“허허! 영묘원과 연결된 공간 균열이었다니, 불행 중 다행이구나.”
광소하던 마혼의 두 머리가 동시에 한립을 쳐다보았다. 한립이 소매를 털어 수십 자루의 금빛 비검들을 내뿜었다.
그런데 경정을 첨가해 제련한 청죽봉운검 중 두 개가 비었다.
‘이런……!’
본명법보를 부지불식간에 잃어버린 꼴이었다.
한립이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법보도 아니고 청죽봉운검 같은 한 벌로 이루어진 법보는 이렇게 되면 문제가 커졌다.
두 개의 비검이 부족한 것만으로도 대경검진을 펼칠 수 없었고, 전체 비검들의 위력에 영향을 미쳤다. 한립은 어쩔 수 없이 강령부와 벽사신뢰의 힘으로 살아남을 수 밖에 없었다.
마혼은 한립의 굳은 얼굴을 보며 입에서 긴 혀를 분출했다. 그러자 새까만 기운이 흘러나와 공간의 대부분을 채워버렸다.
한립이 길게 숨을 내쉬자 체내에 남아 있던 벽사신뢰들이 모두 쏟아져 나와 백여 개의 금빛 뇌전들이 몸을 타고 흐르며 번뜩였다. 금빛 뇌전들이 순식간에 뭉쳐져 몇 마리의 금색 교룡으로 변했다.
“아직도 이렇게나 많이 남았다고?”
마혼이 어이없어하며 바로 양팔을 펼쳤다.
마기를 담은 돌풍이 맹렬히 불어 닥쳐 중간에서 검은 촉수로 변해 날아들었다. 벽사신뢰가 마기와는 상극이라지만 마기의 양이 너무 많으면 당연히 전부 멸할 수는 없었다.
한립도 이를 알았기에 난색을 표했다. 최후의 수단이었던 혈영둔도 이런 좁은 공간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촉수들이 한립을 향해 날아오며 각각이 새까만 이무기들처럼 기세가 대단했다. 한립이 마음의 준비를 하자 금빛 뇌전들도 번뜩였다. 자라극화도 그의 조종을 받아 거대한 벽처럼 앞을 막아섰다.
막 공격과 방어가 시작되려는데 갑자기 공간 전체가 흔들리며 웅웅 거렸다.
한립과 마혼이 식겁해서 순간 동작을 멈추었다.
하늘의 구름이 대량의 은백색 화염으로 변해 용솟음치더니 거대한 은빛 빛기둥을 뿜어 마혼이 있는 자리에 떨어져 내렸다.
그러자 빛기둥이 마혼을 가두었다.
한립은 마혼이 빛기둥 안에서 공포에 질려 있는 것도 발견했다. 육체가 은백색의 화염에 불타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빛기둥이 폭발하고 무수히 많은 은색 불똥이 표표히 흩날렸는데 마혼은 사라지고 손상된 법보들만이 남아 있었다. 고리, 깃발 등 마혼이 사용하던 보물들이었다.
순식간에 마혼을 멸한 화염이 다시 잿빛으로 변해 물러났다. 한립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굳어 있었다.
“은색 화염과 같은 강력한 금제는 인계의 수단이 아닌 것 같구나.”
한립의 머릿속에 대연 신군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겨우 정신을 차린 한립은 크게 기뻐했다. 강력한 적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멸살하다니!
“마혼을 죽인 강력한 금제는 인간 수사의 진법이 아니다. 사악한 기운이 전혀 짓들지 않은 은빛 화염이 마혼을 향해 달려들었으니 영계 수사들이 펼쳐 놓은 것이겠지. 아마 예전에 상고 수사들이 고마들을 죽이기 위해 설치해 놓은 것 같구나.”
대연 신군이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설명했다.
“선배님 말씀은 이 공간의 주인이 영계의 수사 일 거란 말입니까?”
“그렇겠지. 이곳은 상고 시대에 명성이 자자했던 영묘원의 잔해 같은데, 당시에는 몇몇 보물들을 이용해 인계에 비해 영기가 농염한 작은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더구나. 그 후 무슨 변고가 생겼는지 대부분이 사라졌다는데 추마골 안에 이렇게 남아 있을 줄이야. 물론 영묘원이 분열된 것 중 일부인 듯하구나.”
대연 신군도 감탄하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영묘원이라면 오래 전 경전에서 본 기억이 있습니다. 줄곧 전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실재했군요.”
한립이 중얼거리며 자기도 모르게 다시 사방을 살폈다. 잠시 후 그가 바닥에 떨어진 보물들을 손짓해 불러들였다.
재빨리 훑어보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이미 마기에 오염돼 거의 영성을 잃은 후였다. 다시 제련을 해도 본래 위력의 절반도 내지 못할 것이다.
한립이 고개를 저으면서도 일단 저물대에 챙겨두고 전신의 부적을 거두어 강령술을 해체했다.
“이제 기껏해야 한 번이나 사용하겠구나.”
한립이 강령부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리고는 조심스럽게 챙겨 넣었다. 그가 땅에 내려와 소매를 터니 하얀 여우가 소매에서 빠져나왔다.
“주인님께서 저를 불러내지 않으셔서 잊고 계신 줄 알았습니다.”
은월이 한립을 향해 예를 취하고는 빙그레 웃었다.
“여우 요수의 몸은 수행이 너무 낮아 불러내도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둔술과 은닉술에 관해서는 정통하니 같이 둘러보자꾸나.”
“예!”
은월이 대답을 하고 땅 속으로 사라졌다.
한립도 가부좌를 하고 두 눈을 감더니 공간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숨겨진 비밀이나 출구가 없을까 해서였다.
별다른 소득은 없었으나 갑자기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켜 어딘가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보라색 과실이 열댓 개나 달린 영초가 자라고 있었다.
“울몽과(鬱夢果) 아닌가! 이미 보라색으로 변했다는 것은 이미 만년 넘게 자랐다는 것이야.”
대연 신군의 놀란 목소리가 전해졌다.
“이곳에 아무도 들르지 않았으니 만년이 되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한립이 마음속의 격동을 애써 억눌렀다. 그가 한참을 관찰하다가 자리를 옮겼다.
“용문초(龍紋草), 풍령화(風靈花)…….”
한립은 영초를 발견할 때마다 조용히 진귀한 영약의 이름을 내뱉었다. 수도계에서 거의 멸종된 영초들이 하나같이 만년 이상 자라고 있었다.
“영약에도 이렇게 능한 줄 몰랐구나. 네가 말하는 것 중 몇 가지는 노부도 무엇인지 모르겠구나.”
대연 신군이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아닙니다. 이곳의 영초들은 3분의 1을 알아보기만 해도 다행인 것을요. 나머지 영초들은 선배님의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노부도 단약을 제련하는 법을 익히기는 했지만 깊이 연구하지 않아 너보다 조금 더 아는 수준일 게다. 저건…….”
대연 신군이 별 일 아니라는 듯 한립에게 몇 가지 영초와 약효를 설명해주었다.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는 손바닥을 뒤집어 옅은 푸른색 옥간을 꺼냈다. 그리고 바로 의식을 불어넣고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장장 반 시진 후, 그가 의식을 회수하고 생각에 잠겼다.
이 옥간은 낙운종 송 여인이 한립에게 바친 것이었는데 상고 영약과 관련된 약방문이 적힌 책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상고 시대 약방 중 당장 제련을 시도할 수 있는 단약이 있었다. 이곳에 있는 영초들과 모란족과의 전쟁에서 얻은 영초들 속에 필요한 모든 재료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저것 끌어 모으면 간신히 강운단(絳雲丹)을 만들어 볼만했다.
상고 시대에도 보기 드문 단약으로 원영 초기의 그에게는 넘치는 약성을 지닌 단약이었다. 가장 최적의 복용 시기는 원영 중기였다.
원영 초기에 강운단을 복용하면 약성의 상당 부분을 낭비해야 하며 온몸의 경맥이 끊어질 것 같은 강력한 통증을 동반했다.
그리고 강운단 외에도 설백환이란 것도 있었다. 대부분 재료는 이곳이나 그가 지닌 영초에서 구할 수 있었고 나머지 몇 가지 귀한 재료들도 바깥에 나가면 얻을 기회가 있을 터였다.
설백환은 수행을 늘려주는 단약은 아니었지만 얼음 속성 공법을 익히는 수사가 복용하면 더욱 강력한 냉기를 발휘할 수 있게 해준다.
원영 초기에 이르러 몇 년이 흘렀지만 너무 바빠 수행을 늘리기 위한 폐관 수련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랬던 이유 중 하나는 수행에 필요한 적합한 영단을 찾지 못해서였다.
오랜 세월 기연을 찾아 헤맸는데 드디어 기연을 찾은 것이다.
만일 강운단의 효과가 경전에 서술된 것처럼 강력하다면 이곳의 영초의 양이면 수행을 높이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후 수련의 고비를 넘기면 원영 중기에 이르는 것도 순식간일 수도 있다.
게다가 이곳의 영초들을 옮겨다 심고 녹색 액체로 성장을 촉진시키면 앞으로 강운단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설백환도 그가 제련한 건람빙염이나 자라극화 역시 모두 극한의 성질을 지녔으니 이 환약을 통해 위력을 늘릴 수 있었다.
한립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계획한 대로만 실행한다면 추마골에 들어와 위험을 감수한 보람이 충분했다. 몇몇 보물과 꼭두각시를 잃은 것은 얻은 것에 비하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은 경정을 넣어 제련한 비검 두 자루뿐이었다. 어쨌든 청죽봉운검이 그의 본명법보였으니 주인이 죽지 않는 이상 강제로 사용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곳에서 나가면 반드시 되찾아 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