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4
474화. 불길로 뛰어드는 나방들
생각을 정리한 한립은 서금충 무리를 움직이고 벽사신뢰와 자라극화의 속도를 높여 고마를 공격했다.
고마가 그것을 보고 고개를 쳐들고 웃더니 갑자기 앞쪽과 뒤쪽 머리를 바꾸고 홍색 혀를 날름거렸다. 그리고 한립의 거센 공격에도 흔들리지 않고 네 개의 팔을 흔들어 세 개의 보물을 발동했다.
한립과 고마의 혼백이 다시 제대로 붙을 기세였다.
그때 어디선가 청천벽력 같은 괴성이 들려왔다. 얼마나 소리가 크게 울리는지 멀리서 전해 오는 데도 듣는 이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한립도 웅장한 괴성에 안색을 굳혔지만 고마의 혼백도 표정이 확 달라졌다. 그리고 곧바로 보물을 회수해 검은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그는 긴 휘파람 소리를 내뿜으며 번개처럼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멀어졌다.
한립이 주저하다가 뇌전과 자라극화 그리고 서금충의 공격을 멈추고 상대가 달아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기억으로 괴성이 들려온 그곳은 추마골 지도에 표시된 곳에서 들려왔다.
무언가 엄청난 일이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상대가 날아가며 길게 휘파람을 불어 자신을 알린 것으로 보아 또 다른 고마가 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백의 여인과 령호 노인은 고마의 혼백이 달아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놓였는지 안색이 한결 나아졌다.
령호 노인은 비록 보물 하나를 잃었지만 그대로 생명을 부지한 것은 다행이었다. 우연히 한립을 마주치지 않았다면 그와 엄월종 대장로가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들과 같이 추마골에 들어왔던 수사는 아무 대비 없이 남롱후에게 당해 원영까지 끄집어내져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고마의 혼백이 보이지 않자 령호 노인과 백의 여인이 한립을 향해 다가갔다.
“한 수사, 이번에 노부의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령호 노인이 손을 모아 공손히 말했다. 동시에 그의 시선이 한립 뒤의 꼭두각시들과 음산한 기운을 발산하는 천절마시로 향했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수많은 보물과 능력을 지녔다니 앞으로가 정말 기대되는 수사가 아닌가! 상대와 약조를 맺은 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런 자가 돕는다면 어떤 위기가 찾아와도 천 년 간은 안전할 것이다.
그리고 한립과 안 좋은 인연이 있는 남궁완의 사저도 이번에는 감사 인사를 표했다.
“수사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나섰을 뿐인데 은혜라뇨. 그런데 이제 두 분은 어떻게 하실 작정이십니까? 가보시겠습니까?”
한립이 한 손을 들어 뇌전 등을 불러들이자 어떤 것은 그의 체내로 또 어떤 것은 그의 소매 속으로 사라졌다.
“그럴 리가요. 그런 괴물은 원영 후기 수사는 되어야 상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서 뭐하겠습니까.”
령호 노인이 고민할 것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군요. 저는 가 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는데 홀로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겠지요.”
솔직히 아쉬웠지만 두 원영기 수사들이 같이 가지 않는다면 너무 위험했다. 한립과 두 수사가 헤어져 추마골을 나가려는데 계속해서 들려오는 괴성에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무슨 일입니까?”
령호 노인이 그를 주시하다가 급히 물었다.
저 멀리 검은색과 보라색의 기이한 빛이 번뜩이며 광활한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서 초록색 구름이 상승하며 진동이 전해졌다.
검은색과 보라색 빛은 남롱후가 쌍두사비의 몸뚱이로 변하며 내뿜었던 마기와 똑같았다. 다만 그 기세와 양은 남롱후의 것을 훨씬 웃돌았다.
하지만 령호 노인이 알아보고 안색이 변한 것은 그 아래에 있는 초록색 구름이었다.
“복시독(蝮尸毒)! 위 수사가 독공으로 만들어낸 구름 아닙니까! 평범한 수사들은 닿기만 해도 목숨을 잃을 텐데…….”
백의 여인이 녹색 구름을 알아보고 놀라 소리쳤다.
녹색 구름의 기세가 엄청났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마기에 눌리고 있었다. 원영 후기 수사도 당하지 못할 상대라니, 방금 달아난 남롱후는 절대 아니었다.
“그럼 우리는…….”
여인이 주저하다가 무언가를 말하려는데 서늘한 의식이 셋을 훑고 지나가는 것이 감지되었다. 한립은 가슴이 서늘해졌고 령호 노괴도 난감해했다.
“벌써 상대에게 발각됐습니다. 지금 달아나지 못하면 기회는 없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상대하던 마물까지 저리 날아갔으니 위 수사를 돕지 않으면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위 수사가 당하고 추격당한다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겠지요.”
잠시 침묵하던 한립이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도 저쪽으로 의식을 퍼트려 보았지만 상대의 영기의 파동이 강력해 도저히 근접할 수가 없었다. 령호 노인과 백의 여인이 한립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 눈치를 보았다.
사실 당장이라도 달아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한립이 말한 대로 위무애가 당하면 나머지 사람들도 안전하게 달아날 수 없었다. 이곳은 추마골의 중심부로 벗어나기까지는 한참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한립이 냉소하며 뒷짐을 지고 그들을 재촉하지 않았다.
“우리 셋 중에 한 수사의 능력이 가장 뛰어나니, 수사의 의견을 듣겠습니다.”
령호가 미간을 좁히며 한립에게 물었다.
“저요? 허허…….”
한립은 바로 답하지 않고 웃음으로 말끝을 흐렸다. 령호가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그의 영리함에 혀를 찼다.
그때 한립이 갑자기 난색을 표했다.
“다른 수사들이 날아옵니다. 하긴 이렇게 소란스러우니 방원 수천 리 내의 수사들은 모두 감지했겠지요.”
령호 노인과 백의 여인이 놀라 한립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희미하게 한 무리의 수사들이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하아, 저렇게 위험한 곳으로 가는 이들이 하필!’
한립은 의식으로 그들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탄식했다. 세 수사들 중 둘이나 그가 아는 인물들이었다.
한 명은 그와 거래를 했던 천정 진인이었고 다른 한 명은 낙운종 은발 노인, 바로 한립의 정 사형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정 노인과 함께 추마골에 들어온 낯선 노인이었다.
그들은 엄청난 이보나 영약을 두고 싸움이 벌어졌다 여기고 있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보물이 아니라 원영을 씹어 먹는 마물을 향해 날아간다는 것을 안다면 저렇게 신나게 날아가겠는가!
이미 거리가 멀고 속도가 빨라 전음을 보내거나 전음부를 쏘아보내기도 너무 늦었다.
그러나 위무애는 지금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목숨을 내던져 싸움을 해줄 희생양들이 줄줄이 날아오고 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다른 이들이야 상관할 바가 아니나 정 사형은 그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지 않았는가. 그러니 그가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원래 가 보더라도 몰래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정 노인 일행이 뛰어들면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일단 그쪽으로 가보고 위험하다 싶으면 혈영둔을 써서 달아나면 그만이었다. 다만 공간균열과 마주칠 위험 때문에 최후의 순간이 아니면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결정을 내린 한립은 몸을 돌려 령호 노인과 백의 여인게게 말했다.
“다른 수사들도 돕는다니 저도 수수방관할 수는 없겠습니다. 두 분이 가시지 않는다면 저라도 먼저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거리가 가까워 위 수사께서 벌써 두 분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지는 않을지…….”
경고와 위협이 교묘하게 섞인 말을 마치고 한립이 곧바로 푸른 빛줄기로 변해 하늘을 날아갔다.
령호 노인과 백의 여인이 한립의 말을 듣고 할 말을 잃었다.
이 순간에도 검은색과 보라색이 녹색 빛과 극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십 리 정도 떨어져 있다지만 위무애가 마음만 먹으면 둘의 정체를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립의 경고는 허튼 소리가 아니었다.
“갑시다. 한 수사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의 수행에 이런 일에는 나서야지요.”
령호 노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자 백의 여인도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많은 수사들이 한 번에 공격한다면 살아날 기회도 많아질 것이다. 두 수사는 제발 운이 따르기를 염원하며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그들은 몰랐지만 백 리 밖에 어령종 대장로 동문도가 세 명의 녹색 장포 제자들을 데리고 역시 이곳으로 날아오는 길이었다.
오행령영이 변한 원영을 지닌 수사들 중 이미 둘이 죽고 셋 만 남았다. 그러나 동문도는 전혀 아쉬운 기색 없이 흥분하고 있었다.
영기의 파동이 진동하는 것으로 보아 엄청난 보물을 두고 대대적인 싸움이 벌어졌을 거라 짐작한 것이다.
* * *
귀령문 종 장로가 귀령문 제자들을 데리고 날아가는데 안색이 극도로 창백했다. 지도가 있었음에도 제자 둘이 공간균열에 당해 죽었고 목표였던 영촉과는 누가 가져가 버렸다.
수행이 높고 나이가 많아도 열이 받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영촉과는 그가 원영 후기에 들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다만 특성상 바로 단약으로 만들어 복용해야 했으니 멀리 달아나지는 못 했을 것이다.
그가 제자들을 데리고 주변 곳곳을 수색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그가 풀이 죽은 제자들을 데리고 돌아나가려는데 어디선가 강력한 충격파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다행이 최상급 방어 고보를 지니고 있어 위기를 넘겼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그 방향에서 엄청난 괴성이 들려왔다.
종 장로는 엄청난 영기의 파동을 느끼고 제자들을 데리고 방향을 틀었다.
한립은 천절마시와 꼭두각시들을 회수하지 않고 오히려 가는 동안 열댓 마리의 거북 꼭두각시들까지 방출했다.
뒤 따라오던 령호 노인과 백의 여인은 놀라면서도 한결 마음을 놓았다. 꼭두각시가 치명상을 입힐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저 정도 숫자라면 일반적인 원영기 수사들은 잠시 붙들어 둘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은 순식간에 전장에 근접해 백여 장을 앞두고 상황을 파악했다.
멀리서 보였던 검은색과 보라색은 사실 자홍빛 속의 검은 촉수가 움직이며 뿜어내는 빛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마물이 있었다.
마물은 이마에 뿔이 나고 흉악한 인상을 지녔지만 몸은 인간과 똑같았다. 심지어 피부가 어찌나 광이 나는지 옥으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마물은 두 눈을 감고 있어서 잠든 것처럼 보였고 분명 입도 다물고 있었는데 뱃속에서는 엄청난 괴성이 들려왔다. 마물은 검은 불꽃을 생성해 아래의 녹색 구름을 향해 내던졌다. 평범해 보이는 검은 불덩이는 터지며 십여 장 규모의 검은 화염 파도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위무애의 독구름도 만만치 않아 검은 불길에 흩어지면서도 대량의 기운을 방출해 녹색 구렁이의 모습으로 마물을 공격했다.
“저 마물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했거나 금제에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이 없앨 절호의 기회예요.”
령호 노인이 멈춰 있는 한립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쉬운 일이었다면 위 수사가 벌써 움직였지 독구름 속에 버티고 있지 않았을 겁니다. 마기를 보아하니 분명 방금 달아난 마물과 관련이 있겠군요.”
한립이 고개를 저으며 의식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먼저 날아간 남롱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은발 노인 일행이 너무 놀라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리고 곧 한립을 발견한 정 노인은 그를 보고 반가워했지만 무엇을 고려하는지 선뜻 다가오지 않았다.
한립이 먼저 전음을 보냈다.
“정 사형, 어쩌다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저 마물은 위무애 수사도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입니다. 게다가 인근에 쌍두사비의 마물까지 숨어있습니다.”
“저 아래 있는 것이 위무애 수사고 또 다른 마물까지 있단 말인가! 혹시 한 사제와 싸운 적이 있는 마물인가?”
은발 노인이 놀라 입술만 달싹이며 전음을 보내왔다.
“마물 중 하나와 싸워보기는 했지만 진짜 실력은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원영 후기 수사와 비슷하더군요. 옆의 두 수사들과 협공을 해 간신히 버텼습니다. 마물은 수사의 원영을 잡아먹고 바람처럼 움직이며 은닉술에 능하니 주의하셔야 합니다.”
한립이 서둘러 고마의 혼백에 대해 설명하며 경고했다.
“알았네. 옆의 수사들과 상의를 해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