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9
469화. 제단
푸른 솥이 영화 속에서 타오르며 밀실의 온도가 급격히 올라가자 한립의 눈에 한기가 스치며 솥을 향해 끊임없이 법결을 날려댔다.
펑.
잠시 후, 솥의 뚜껑이 자동으로 열리자 그가 사방의 옥함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옥함이 열리며 새까만 식물의 줄기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립이 새까만 줄기를 보며 손가락을 튕기자 푸른빛이 스치며 줄기의 5분의 1이 잘려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푸른 기운이 날아들어 떨어져 내리던 줄기 조각을 솥 안으로 던져 넣었다.
줄기가 다시 옥함으로 돌아가고 한립은 다른 네모난 목함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에 들어있던 푸르스름한 영초의 줄기도 비슷한 방식으로 조금 잘라내 솥으로 던져 넣었다.
이렇게 정해진 순서대로 각종 재료를 넣고 마지막으로 영촉과를 꺼내 솥에 넣었다.
솥의 뚜껑이 닫히자 한립이 다시 한 번 입을 열어 푸른 영화를 분출했다. 부쩍 뜨거워진 밀실 안에서 그의 손가락이 쉼 없이 움직이며 솥에 법결을 쏘아보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솥에서 점차 우뢰와 같은 진동이 느껴졌고 한립이 그것을 느끼고는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의 안색은 평온했지만 푸른 불길이 비춘 눈동자는 일렁이고 있었다.
* * *
한립이 단약을 제련하고 있을 때, 분지 중앙의 제단에서는 귀령문 문주 일행이 수백 장 높이의 제단을 오르고 있었다.
계단을 오를수록 온몸을 내리누르는 압력이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귀령문 문주 등 원영기 수사들은 그나마 나았지만 결단기 제자 셋은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나마 가장 편하게 올라가는 이는 위무애였다.
아마 금제가 원영 후기 수사에게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 하는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왕초고 등의 표정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일단 제단 꼭대기에 오르자 태산처럼 짓누르던 압력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비록 보호막으로 압력의 대부분을 이겨냈지만 그래도 허리가 쑤시고 다리가 아파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왕천고는 몸이 피곤한 것도 잊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백여 장 너비의 제단에는 백옥이 깔린 거대한 옥 탁자와 청석 기둥 네 개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돌기둥들은 열장 높이에 각각 세밀하게 주술이 새겨져 있었고 꼭대기에는 정교한 기린 모양의 석상이 조각되어 있었다.
위무애가 딱히 주의할 만한 물건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귀령문 문주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귀령문 문주는 흥미롭다는 듯 하늘을 바라보며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위무애도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핏빛의 구름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왕 문주! 이곳까지 왔는데 영묘원의 입구는 어디 있소?”
“위 수사, 영묘원의 입구는 당연히 금제로 가려져 있지 않겠습니까. 다만 어떻게 금제를 푸는지는 두루마리 속의 분신이 알고 있으니 소환을 해보겠습니다.”
“그것도 왕 수사와 창곤 상인의 화신이 한 거래의 일부겠소.”
“맞습니다.”
귀령문 문주가 미소 지으며 소매 속에서 은백색 두루마리를 꺼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두루마리가 펼쳐지며 녹색빛이 흘러나와 문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바로 여기입니다. 다시 이곳에 돌아올 줄이야!”
창곤 상인의 분신은 제단 꼭대기인 것을 확인하고는 격동했다.
“약속대로 제단까지 데리고 왔으니 영묘원 입구를 얼어 주시지요.”
귀령문 문주가 냉랭히 말했다.
“내게 금제까지 걸어놓고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는 겁니까? 영묘원 입구는 바로 제단 위쪽입니다. 다만 특수한 금제가 걸려 있어 직접 술법을 펼쳐 풀어야 합니다.”
말을 하며 문사가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두 손으로 불덩이를 만들어 던져 올렸다. 그러자 불덩이는 허공 어딘가에서 괴이하게 사라져 버렸다.
문사가 그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위의 돌기둥을 돌아보았다.
“여러분이 저 네 개의 돌기둥에 영력을 주입해 주시면 나머지는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 말에 귀령문 문주가 잠시 주저하다 나섰다.
“알겠습니다. 너희 셋은 돌기둥에 영력을 주입하거라. 왕 사제, 고생을 해주어야겠어요.”
“존명!”
결단기 수사 셋이 허리를 굽히며 인사했고 왕천고도 주저 없이 돌기둥 중 하나로 걸어갔다.
문주의 명을 받은 귀령문 네 수사가 천천히 영력을 불어넣기 시작하자 돌기둥이 소리를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기둥 꼭대기의 기린 석상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갑자기 핏빛을 뿜어냈다. 위무애는 왠지 돌기둥의 형상이 낯익었지만 어디서 본 적이 있는지 떠오르지 않아 생각에 잠겼다.
돌연 기린 석상들이 살아 움직이듯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입에서 오색찬란한 빛을 반짝였다. 당장이라도 무언가를 뿜어낼 태세였다.
그때 창곤 상인의 화신도 두 손을 뻗어 법결을 쏘아 보냈다.
네 마리의 기린 석상들이 동시에 오색찬란한 빛기둥을 뿜어내자 한 점에서 빛기둥이 동그랗게 뭉쳐졌다.
콰콰쾅!
빛덩이 주변으로 공간이 왜곡되며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엄청난 영기의 파동이 제단 위의 수사들을 덮쳤다.
잠시 후, 모든 폭음과 빛이 가시자 모두가 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다들 허공을 보고 크게 놀라고 말았다.
위무애가 즉시 안색이 파랗게 질려서는 문사를 노려보았다.
“저게 당신이 말하는 영묘원 입구요?”
제단 백여 장 위에 삼십 장 너비의 호선형 빛줄기가 떠있었다.
호선형의 빛은 가장 넓게 벌어진 중간이 대략 다섯 장 정도로, 보기 드물게 거대한 공간 균열이었다. 이전에는 어찌나 감쪽같이 숨겨져 있었는지 원영기 수사들의 의식까지 속일 수 있었던 것이다.
“영묘원이란 본래 영계와 우리 인계의 중간에 위치하는 것입니다. 그런 공간에 진입하려면 공간균열을 이용할 수밖에요. 당연히 이대로 들어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약간의 위험을 감수해야겠지만 수사들이 공간균열을 지나갈 방법은 있습니다. 그러나 결단기 수사들은 들어가지 않는 것이 나을 겁니다. 그 정도 수행으로는 살아서 지나가지 못할 테니까요.”
문사가 서늘해진 시선으로 담담히 설명했다.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왜 미리 하지 않은 것입니까.”
귀령문 문주의 말투가 차가워졌다.
“지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무사히 돌아올 가능성이 낮다고 해도 포기할 분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문사가 냉소했다. 귀령문 문주는 그런 문사의 표정을 보더니 돌연 손에 핏빛 영패를 쥐었다.
“뭐, 뭐 하려는 겁니까!”
문사가 영패를 보더니 표정이 달라져 소리쳤다.
이미 얼굴을 굳힌 귀령문 문주는 대답 없이 영패에서 핏빛을 뿜어냈고 곧 문사의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그의 피부에 핏빛 주술이 떠오르며 흘러 다니는 모습이 기이했다.
“양혼주?”
왕천고가 대번에 그것을 알아보고 중얼거렸다.
“양혼주라면 귀령문 특유의 저주 중 하나가 아니오. 보통 금제보다 독하기 이를 데 없다던데. 저주에 걸린 수사의 혼백을 단번에 흩어버리는 것도 가능하다고 들었소.”
위무애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문사를 보며 말했다.
“위 형은 견문도 넓으십니다. 창곤 상인의 분신은 남은 잔재에 불과한데 스스로가 창곤 상인 본인이라도 되는 줄 알고 이리 기고만장하다니. 쓴 맛을 봐야 말이 통할 것 같습니다.”
귀령문 문주가 굳어있던 얼굴을 펴며 위무애에게 미소 지었다. 문사는 꽤나 고통스러웠는지 피부의 핏빛 주술이 사라지고도 경련을 일으키며 쉽게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제 주제를 알았으면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다음번에는 이리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니 입구를 여시지요. 제대로 길 안내만 한다면 약조한 것은 잊지 않겠습니다.”
귀령문 문주가 영패를 거두었다.
“알았습니다, 바로 입구를 열겠습니다.”
문사가 몸에서 녹색 빛을 응결해내 천천히 떠올라 공간 균열을 향해 날아갔다. 문사는 공간균열을 스무 장 남기고 멈추었다.
그가 거대한 공간 균열을 향해 입을 벌리자 녹색 빛이 번지며 새까만 구슬이 분출되었다. 구슬을 뱉은 문사의 얼굴이 더없이 창백해졌고 기력이 많이 상한 것 같았다.
“가라.”
검은 구슬이 빛을 내며 공간균열 중간으로 날아갔다. 귀령문 문주와 다른 수사들은 놀란 눈치였지만 조용히 그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공간균열에 가까이 있던 문사가 서둘러 하강하며 거리를 벌렸다. 그러자 잠시 후 공간균열에서 폭음이 새어나왔다.
이어 공간균열 중심에서 녹색빛이 반짝이며 급속도로 커졌다.
“이제 여러분이 나설 차례입니다. 녹색빛에 영력을 쏟아 부어 영묘원으로 향하는 통로를 안정화 시켜야합니다.”
문사가 제단에 내려서서 차분히 말했다. 위무애와 왕천고가 의심스럽다는 듯 주저하자 귀령문 문주가 나섰다.
“시도나 해봅시다.”
위무애가 미간을 좁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왕천고도 문주의 말에 반대하지 않았다.
세 수사가 동시에 수결을 맺으며 각자 빛기둥을 분출했다. 그들의 수행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위무애의 손에서 뻗어 나온 녹색 빛기둥은 족히 사발 굵기였는데 귀령문 문주와 왕천고의 영력이 변한 빛기둥은 훨씬 얇았던 것이다.
그들의 영력을 먹고 녹색빛이 점차 넓어졌다.
잠시 후 녹색빛이 새까만 구멍으로 변해 깊이를 알 수 없는 통로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영기 수사들의 영력을 받아 어두운 녹색빛은 점차 진해졌다.
일다경이 지나자 통로는 거의 삼척 정도로 넓어졌다.
“이제 들어가도 됩니다만 그러면 영묘원 입구가 불안정해 중간에 닫힐 수도 있습니다. 파계주가 남지 않았으니 돌아 나올 생각이라면 영력을 더 불어넣어 입구를 안정화 시키는 게 좋을 겁니다.”
문사의 말에 위무애 등이 놀라 빛기둥을 멈추지 않고 쏘아 보냈다. 소모하는 영력이 클수록 새까만 통로는 점점 안정화되고 있었다.
귀령문 문주가 나머지 결단기 수사들을 향해 분부했다.
“미약하겠지만 너희도 거들 거라.”
“예, 문주님!”
제자들이 즉시 영력을 응결해 빛기둥을 쏘아 올렸다.
시간이 흘러 원영기 수사들의 영력이 절반 정도 소모된 후에야 새까만 통로가 흔들리지 않고 완전히 고정되었다.
수사들이 안심하며 빛기둥을 거두었다.
“정말 영묘원으로 통하는 것이 맞습니까?”
귀령문 문주가 법력을 거두고 물었다. 하지만 문사 대신 위무애가 입을 열었다.
“희미하게 통로의 끝에 넓은 장소가 펼쳐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소. 아마 거짓은 아닐 것이오.”
위무애의 말에 다들 희색을 드러냈다.
“위 형이 그렇다면 믿어야지요. 하지만 신중을 기하기 위해 실험을 좀 해봐야겠습니다.”
왕천고가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한쪽 소매를 털어 검은 기운을 올려 보냈다. 희미하게 작은 악귀의 형상을 품은 기운이었다.
펑!
작은 악귀를 품은 검은 기운이 통로로 들어가다 터져 음산한 연기를 남기며 사라졌다.
왕천고는 작은 악귀와 의식이 연결되어 있었는지 일순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화가 난 왕천고가 문사를 향해 따졌다.
“영묘원 입구가 평범한 통로인 줄 아십니까. 작은 악귀가 아니라 강력한 악귀라도 육신이 없으면 흩어져 사라질 겁니다. 나도 안으로 들어가려면 두루마리의 특수한 힘을 빌려야 하는 것을……. 어쨌든 약조한 대로 입구는 열어 주었으니 들어가든 말든 마음대로 하시지요.”
말을 마친 문사가 자신은 상관없다는 듯 녹색빛으로 변해 두루마리로 들어갔다. 왕천고가 그 말에 일순 얼굴이 어두워지며 문주의 안색을 살폈다.
“의식을 통해 살피니 공간균열로 인해 흐릿하지만 분명 어떤 공간이 있는 것은 맞소. 오래 주저할 시간이 없으니 먼저 가겠소.”
위무애가 가장 먼저 통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고민하던 귀령문 문주의 안색이 변했다.
“너희 셋은 여기를 지키거라. 왕 사제, 우리도 주저하지 말고 안으로 들어갑시다. 정말 영묘원이라면 어떤 위험인들 감수하지 못 하겠습니까. 게다가 이 자에게 저주를 걸어놓았으니 감히 목숨을 걸고 장난을 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귀령문 문주가 제자들에게 명을 내리고는 두루마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곧 그와 왕천고도 빛줄기로 변해 통로를 향해 날아올랐다.
천지영초가 널려 있다는 영묘원에 위무애보다 늦게 가서 손해를 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위무애와 귀령문 문주 그리고 왕천고가 검은 통로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