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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신공-466화 (223/2,000)

# 466

466화. 천 개의 분신

푸른빛은 아주 희미해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 약해 보였다.

“당신이 바로 창곤 상인입니까?  어떻게 지금까지 원신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까?”

왕천고가 아직도 놀란 마음이 가시지 않는지 떠듬거리며 물었다.

“난 두루마리를 떠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으니 궁금한 것은 당신네 문주에게 물어보시오. 일단 공간균열이나 살펴봅시다.”

문사가 왕천고는 상대하지 않고 공간균열이 있는 방향을 살피며 회색빛을 분출했다.

회색빛이 소리 없이 공간 균열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보고 문사의 표정도 조금 이상해졌다.

“이상하군요. 분명 그때는 없었는데. 아무래도 새로 생겨난 공간균열인가 봅니다. 우연에 불과하니 다들 크게 걱정 말고 나아가세요. 그럼 나는 이만.”

푸륵.

문사가 빠르게 할 말만 내뱉더니 이내 녹색빛으로 변해 두루마리 안으로 들어갔다.

문사의 환영이 순식간에 사라지자 왕천고 등 수사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위무애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왕 문주, 이 자가 바로 당시의 창곤 상인이란 말이오?  그렇다 하더라도 혼백만 남은 존재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겠소. 영묘원의 일도 그가 말해준 것이오?”

“창곤 상인이라고 볼 수도 있고, 아니라도 할 수도 있습니다. 영묘원에 대해  서는 이 자가 말한 것이 맞습니다.”

“무슨 뜻이오?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오?”

“오해십니다. 방금 두루마리에 나타난 혼백은 창곤 상인의 화신(化身)이 남긴 혼백의 잔해에 불과합니다. 화신이 추마골을 탐색하다 어떤 금제에 당해 훼손되자 창곤 상인이 양혼목을 갈아 만든 두루마리 법기에 넣어 회복시키려 한 것이지요. 하지만 창곤 상인은 이미 죽었으니 그의 화신의 잔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그랬소?  보아하니 그 화신과 무슨 약조를 한 것 같던데, 노부는 관여치 않겠소. 영묘원에 들어가게만 해준다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말이오. 나는 화신기에 들어 영계로 승천하는 것 말고는 아무 욕심도 없소.”

위무애가 냉랭히 말했다.

“현명하십니다. 공간균열이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낮다니 이제 그만 이동하시지요.”

귀령문 문주가 뒤따르던 제자 하나를 가리켜 다시 앞장서게 했다. 귀령문 제자는 안색이 조금 창백해 졌으나 말없이 전방의 공간균열을 돌아 앞으로 나아갔다.

* * *

“어찌 된 일이오?  갑자기 영수를 통제 할 수 없다니.”

두꺼운 얼음으로 만들어진 빙하지역에서 한립이 자령을 보며 말했다. 그들은 핏빛 구름으로 덮인 거대한 얼음 협곡을 통해 추마골 중심부로 진입했다.

뼈가 시릴 정도로 매서운 바람이 부는 곳에서 얇은 장삼을 걸친 그는 꼿꼿이 서 있었다.

“모르겠어요. 외곽에서는 멀쩡했는데 갑자기 안으로 들어오면서 날뛰기 시작했어요. 일찍 회수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어찌 되었을지 몰라요. 영수대 안에서도 난리입니다.”

그 말을 듣고 한립이 갑자기 한 손으로 저물대를 스쳐 서금충 일부를 나오게 했다. 그가 의식을 통해 움직이자 작은 무리가 바로 영수대로 돌아갔고 전혀 통제를 벗어나지 않았다.

한립이 턱을 쓸다가 다른 영수대를 스쳤다. 새까만 빛이 허공을 빙글 돌아 그의 앞에 떨어졌다.

빛이 가시고 새까만 작은 원숭이가 나타났다. 제혼이었다. 하품을 하며 눈을 껌뻑이는 것이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한립이 제혼을 한참 살피다가 무표정하게 소매를 털어 다시 거둬 들였다.

“영수가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불러낼 수는 없을 듯하오. 중심부 내에서는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의식을 통해 찾아보겠소. 잠시 호법을 서주시오.”

한립은 몰랐지만 남롱후의 천리리(千里鸝)는 멀쩡했지만 모란 법사 쪽에서 빌려온 조류 형 영수는 자령의 날다람쥐 영수처럼 통제를 잃고 날뛰었다. 이런 차이는 분명 추마골 중심부에 관한 비밀과 연관되어 있을 터였다.

“그럼 한 형만 믿겠습니다.”

자령이 붉은 입술을 깨물며 대답하자 한립이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의 몸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오며 신선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자령은 옆에서 한립을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자령은 그를 바라보며 마음이 이상했다. 그를 단순한 벗이라고 보기엔 그가 자신의 외모에 놀라는 기색을 보이면 기분이 좋았고, 그렇다고 남녀사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생사를 넘나들며 보낸 시간들이 있었지만 한립은 한 번도 그녀에게 틈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은근히 그녀와 거리를 두려는 기색이 느껴졌다.

지금 그의 수행과 신분으로 볼 때, 만일 그가 먼저 청한다면 그녀가 어떻게 대답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낙운종 송 수사에게 한립에겐 이미 남궁완이라는 반려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실망했지만 말이다. 마치 자신이 눈여겨보던 물건을 다른 누군가가 먼저 가져가버린 기분이었다.

푸른빛으로 둘러싸인 그를 바라보며 자령은 조금 넋을 잃었다. 가부좌를 하고 의식을 퍼트려 방원 백 리를 수색하고 있던 한립이 그녀의 상태를 알 리 없었다.

한립이 슬쩍 미간을 좁히며 의식을 조금 더 멀리까지 퍼트렸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수사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립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갑자기 허리춤의 영수대를 던졌다. 그러자 천 마리가 넘는 서금충들이 날아올라 금빛으로 반짝였다.

“가라.”

그가 두 눈을 번쩍 뜨며 푸른 법결을 쏘아 보냈다.

웽웽!

서금충들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한립이 다시 눈을 감았을 때는 그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빛이 한층 강해져 있었다.

이때 한립은 대연결을 극성으로 발휘하는 중이었다. 억지로 자신의 의식을 천 개가 넘게 나눈 것이다. 몇 개의 분신은 자신의 몸에 놔두어 만일을 대비하고 나머지는 각각의 서금충에 의탁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는 서금충의 눈을 빌려 표식을 수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는 숨겨진 공간균열에 걸리거나 이름 모를 금제에 걸려 돌아오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한립의 분신은 형태가 없고 그저 서금충에 의탁한 것이라 이상한 낌새가 풍기면 몸을 버리고 달아나 돌아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댓 개의 분신은 제 때 달아나지 못하고 갇히거나 훼손되었다. 이런 경우 한립은 과감하게 분신과의 연계를 끊어 다른 분신들이 영향을 받는 것을 막았다.

그래도 의식이 하나씩 단절될 때마다 그의 얼굴이 한층 창백해졌다. 그의 의식이 워낙 강력해서 이 정도 손실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가 의식을 이용해 천 마리가 넘는 서금충들을 돌아오게 했다. 마지막 한 마리까지 안전하게 영수대로 돌아오자 한립이 냉소하며 눈을 떴다.

“찾았으니 출발합시다.”

말을 마친 한립은 바로 일어나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고 자령도 기뻐하며 뒤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립과 자령이 어떤 돌무지의 상공에 도착했다. 한립이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구덩이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이 다음 표식이 있던 자리인가 보오. 내 기억대로라면, 영촉과를 찾기 위해 아직 표식 두 개가 더 필요한데. 지금이 귀령문 수사들을 따라잡을 절호의 기회요.”

냉랭히 말한 그가 소매를 떨쳐 어풍차를 불러냈다.

“여기서 부터는 이것을 타고 움직입시다. 소저의 속도가 너무 느리니 이것을 타면 따라잡을 수 있을 거요.”

“추마골 내부에 공간균열이 무수히 많은데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자령이 놀라 물었다.

“내가 이렇게 하자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소. 게다가 영촉과를 위해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 않겠소?”

한립이 입 꼬리를 올렸다.

“제가 아는 한 형이라면 확신이 없는 일에는 위험을 무릅쓸 분이 아니지요. 보아하니 숨겨진 공간균열을 피해갈 방법이 있으시네요. 그럼 소녀도 따르겠습니다.”

자령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가볍게 웃으며 바람처럼 어풍차에 올라탔다. 곧 어풍차가 그의 조정에 따라 하얀 빛줄기로 변해 하늘을 갈랐다.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반나절도 가지 않아 어떤 황무지에서 귀령문 제자들을 발견한 것이다.

종 장로 등은 귀령문 제자 중 하나가 실수로 건드린 사고 금제를 해결하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한립이 강력한 의식으로 기운을 감추자 종 장로도 그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가 소리 없이 의식으로 영기의 파동을 감지해 그들이 처리 중인 금제가 그리 강력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냈다.

기껏해야 잠시 그들의 시선을 끌어줄 뿐이지 오랫동안 귀령문 무리를 붙잡아 두지는 못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 시간이면 한립은 그들을 따돌릴 시간은 충분했다.

한립은 어풍차를 이용해 그들을 멀리 돌아서 움직였다. 그러는 동안 몇 차례 공간균열을 피해야 했지만 귀령문 무리를 앞서 푸른빛을 머금은 산맥에 도착했다.

“여기예요! 새처럼 생긴 저 봉우리가 표식일 거예요.”

자령이 바로 산맥 중의 봉우리 하나를 알아보고 흥분해 한립을 살폈다. 그를 믿는다고는 했지만 어풍차의 전광석화 같은 속도에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간균열은 커녕 금제도 건드리지 않고 이렇게 빠르고 안전하게 도착하다니! 숨겨진 공간균열에 걸리지 않은 것은 그의 명청령안 덕이었으나 금제를 하나도 마주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봉우리로 만들어진 새 부리가 가리키는 방향에 마지막 표식이 있을 터였다.

“한 형, 바로 출발 할까요 아니면 이걸 없애고 갈까요?”

“옥간에 적혀 있기를 마지막 표식은 사막에 있고 이곳에서 천리 밖에 있다는 것이 사실이오?”

“네, 그럼 한 형은…….”

“봉우리를 망가트려도 상대도 다음 표식이 사막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소. 시간이 더 걸릴 뿐이지 찾아 낼 수 있겠지. 유일하게 그들을 붙잡아둘 방법은 환영진을 설치해 이 산봉우리를 가리는 것뿐이오. 정말 그들을 속일 수 있을 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일 리가 있는 말씀이네요. 하지만 이렇게 넓은 곳을 가려 원영기 수사의 의식을 속이기는 어려울 텐데요. 수사가 환술에도 정통했던 가요?”

“나는 아니지만 그런 이가 있소.”

한립이 씨익 웃고는 소매를 털어내자 안에서 하얀 빛이 반짝이며 요염한 자태의 여인이 나타났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한립을 향해 곱게 예를 올리는 여인은 은월이었다.

“누구…….”

자령은 갑자기 나타난 은월에 꽤나 놀랐다.

“은월이오. 내 수하라고 생각하면 되오. 은월, 단시간에 환영진을 설치해 이 산봉우리를 가릴 방법이 있겠더냐?”

“주인님의 진법 법기들과 제 환술을 이용하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원영기 수사를 완전히 속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또한 제 환술은 진법이 아니기에 이틀 동안 존재하다 자동으로 허물어 질 것입니다.”

은월이 공손히 답했다.

“좋을 대로 해 보거라. 이틀이면 충분할 테니.”

잠시 생각을 하던 한립은 저물대에서 진법 법기들을 꺼내 여인에게 건네주었다.

“예!”

이제 한립은 다시 새 모양의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두 손을 마주쳤다 폈다.

그러자 열댓 장의 푸른 검기가 분출되어 산봉우리를 한 바퀴 돌더니 신속하게 그의 몸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쿠르릉!

돌연 새 모양 봉우리가 거대한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고 평범한 모양으로 변해버렸다.

자령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한립의 실력이 대단한 줄은 알았으나 법보를 꺼낸 것도 아니고 겨우 검기로 산을 허물어 버리다니 너무 놀라웠다.

자령이 놀라는 동안 은월이 진법 법기 두 벌을 들고 날렵하게 잘려나간 산봉우리를 돌며 진법을 설치했다.

동작이 아주 기민해서 반 시진 만에 환영진이 완성되었고 하얀 안개가 피어올라 산꼭대기를 제외한 대부분을 가려버렸다.

일을 마친 은월이 홀연히 산꼭대기로 날아가 입에서 분홍 기운을 분출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산이 갑자기 기이하게 왜곡되며 사라지더니 무성한 수풀이 그 자리를 대신 한 것이다.

한립이 그것을 보고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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