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신공-463화 (220/2,000)
  • # 463

    463화. 연못과 혈주가 걸린 문

    한립의 말에 대연 신군이 잠시 침묵하다가 콧방귀를 뀌었다.

    “노부가 일찍이 상고 수사의 유적에서 찾은 자료로 통천령보라는 역천의 보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내었지. 상고 수사들조차 경배하고 두려워하는 보물이라니 당연히 호기심이 가지 않았겠느냐.

    그 후로 관련 정보를 모았으나 찾기가 극히 어려웠다. 이제 노부가 귀신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몰골을 하여 수명이 겨우 몇십 년 밖에 남지 않았으니 여한을 남길 수야 없지.

    네가 얕은 수를 써서 노부를 이용해 먹으려는 것을 알면서도 속아주마! 어차피 대신할 재료를 찾아 주는 것은 통천령보의 제련법을 새롭게 연구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말이야. 허나 내 요구를 하나 들어주기로 한 것은 잊지 말거라.”

    “약조한 것은 꼭 지키겠습니다.”

    한립이 빙그레 웃었다. 어차피 대연 신군과 같은 기인을 데리고 다니게 되었으니 인력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이미 허천정이라는 통천령보를 지니고 있었지만 언제 사용할 수 있을지는 까마득했다. 게다가 보물이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닌가!

    이후 대연 신군은 말이 없었다. 아마 이미 옥함을 열어 살펴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대연 신군을 구슬린 한립이 푸른빛을 북돋아 속도를 높였다.

    * * *

    반나절 후, 한립이 다시 비천자문갈들이 살고 있는 산마루에 근접했을 때 남롱후와 로 노인은 낯선 지하통로를 지나는 중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과 습한 공기로 그들도 겨우 몇 장 앞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남롱 형, 용암 지대 옆에 이렇게 음산하고 습한 공간이 있을 거라고 누가 알았겠습니까. 과연 혈주문이 있을 만한 곳입니다.”

    로위영이 남롱후 뒤에서 따라가며 말했다.

    “지금까지는 의심이라도 하셨습니까?  혈주문에 관한 일은 운 가 놈에게도 말하지 않았기에 귀령문에게 정보가 새어나가지 않은 것입니다.”

    남롱후가 미소를 지었다.

    “혈주문을 개방하는데 원영기 수사 두 명의 힘이 필요하지 않았다면 제게도 일러주시지 않았겠지요.”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이런 좋은 일은 당연히 함께 해야지요. 한 수사에게는 끝까지 일언반구도 없지 않았습니까.”

    로 노인의 말에 남롱후가 웃음으로 대충 넘어갔다.

    “그럼 제가 남롱 형의 호의에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로 노인도 깊이 파고들지 않고 이쯤에서 그만두었다.

    서로 상대가 자신을 얕보고 이상한 수작을 부리지 않을 정도로만 경고를 하는 것이었다. 괜히 정체 모를 장소로 끌려가 결전이라도 벌여야 한다면 낭패였다.

    둘이 침묵 속에 한참을 더 가자 앞쪽이 밝아졌다. 꽤 큰 규모의 종유석 동굴이 나온 것이다.

    동굴은 삼십 여 장 너비로 하얀 빛이 반짝이는 종유석들이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동굴 가운데에 위치한 푸른 연못이었다.

    물색이 약간 비취색인 것을 제외하면 평범해 보였다.

    “혈주문이 여기에 있다고요?”

    로 노인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도 금제가 걸린 곳을 발견하지 못하자 참지 못하고 물었다.

    “여기가 확실합니다! 물론 혈주가 걸린 문은 창곤 상인이 다시 한 번 금제로 가려두셨지요.”

    남롱후가 차분히 답을 하고 연못을 바라보았다. 로 노인도 그의 시선을 따라 연못을 보았다.

    슉!

    그때 남롱후의 소매에서 남색 깃발이 쏟아져 나가 연못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주문을 외자 고요하던 연못에 물보라가 일더니 점점 거대한 소용돌이로 변해갔다.

    “분수기를 지니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수면을 가르는 것을 제외하면 별 쓸모도 없는 물건인 것을요.”

    남롱후가 담담히 고개를 젓고 두 팔을 펼쳤다. 소용돌이 속으로 두 개의 법결을 날린 것이다.

    드디어 연못이 갈라지며 통로가 나타났다.

    남롱후가 바로 빛줄기로 변해 통로로 뛰어들었고 로위영은 잠시 주저했지만 어쩔 수 없이 하얀 빛줄기로 변해 그 뒤를 쫓았다.

    잠시 후, 로위영의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연못이 깊어도 너무 깊었던 것이다. 장장 2, 3백 장을 내려갔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점차 멀어지는 연못의 입구를 보며 갑갑해졌다.

    백여 장을 더 내려간 끝에 남롱후가 먼저 멈추었다. 드디어 연못 하부로 내려선 것이다.

    연못의 하부는 원형이었고 거의 열댓 장은 되어서 연못 표면보다 더 넓었다. 그리고 지면은 축축한 청석이 깔려 기이한 광채를 냈다.

    청석 위에 아까 사라진 깃발이 깊이 박혀 남색빛을 분출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숨겨져 있다니! 길을 알지 못하면 절대 찾을 수 없겠습니다. 그런데 창곤 상인께서는 어찌 이런 곳을 발견하신 것인지…….”

    “그거야… 아마 강력한 의식으로 연못 하부를 탐색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남롱후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대충 추측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요!”

    노인이 턱을 만지며 대답하자, 남롱후도 갑자기 몰려드는 불안감을 떨쳐냈다. 남롱후가 다시 허리춤의 저물대를 때리자 중심부로 들어올 때 이미 한 번 사용했던 하얀 빛의 옥패가 나타났다.

    그가 여러 종류의 법결을 쏘아 보내자 옥패가 전부 흡수하고는 더욱 찬란한 빛을 방출했다.

    옥패가 물의 장막 중 어딘가를 향해 멈추자 남롱후가 말없이 손가락을 뻗었다. 부들부들 몸을 떨던 옥패는 대량의 하얀 기운을 분출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하얀빛에 닿은 연못물이 그림처럼 찢겨지듯 왜곡되더니 사라진 것이다. 그 대신 세 장 높이의 반달 모양 문이 핏빛을 머금고 나타났다.

    석문 표면에는 거대한 뿔 달린 악귀머리가 새겨져 있었는데 그 포악하고 섬뜩한 얼굴은 마치 진짜 같았다.

    “이게 혈주문……?”

    로 노인이 눈가를 접으며 중얼거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문을 보자마자 심장이 벌렁거리며 불안감이 엄습한 것이다.

    “바로 이겁니다.”

    남롱후가 반달 모양의 석문을 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핏빛 기운으로 보건데 마도 속성이 너무 짙습니다.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상고 수사가 전신의 정혈을 써서 걸어놓은 봉인인데 평범한 금제와 다른 것이 당연하지요. 어찌, 로 형은 여기까지 와서 이대로 돌아가고 싶으신 겝니까?”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다니,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저 만일을 대비해 조심하자는 것이지요.”

    “그건 맞습니다. 아무래도 기분이 썩 좋은 곳은 아니니까요. 일단 외부에 펼쳐진 금제 몇 개를 풀어보고 이상이 있으면 그때 물러나도 될 것 같습니다. 로 형의 생각은 어떠합니까?”

    “좋습니다. 그리 하지요.”

    이렇게 남롱후와 노인은 몇몇 진법 법기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 * *

    남롱후 등이 혈주문의 금제를 풀려 할 때, 추마골 중심부 모처 새까만 암석 산에서는 몇몇이 정상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선두에 선 음산한 인상의 중년 수사와 그 옆에 청색 장포를 입은 노인은 뜻밖에도 귀령문 문주와 위무애였다.

    뒤에는 왕천고가 그 둘을 따라가고 있었고 또 네 명의 결단기 제자들이 그를 뒤따랐다.

    “이렇게 외진 곳에 백 리 규모의 금공(禁空) 금제가 펼쳐져 있다니 괴이한 일이군요. 땅에서 몇 장 떠올라 저공비행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니.”

    정상을 바라보던 왕천고가 머지않은 곳의 핏빛 운무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럴수록 우리가 제대로 찾아 왔다는 소리겠지요.”

    귀령문 문주가 평안한 기색으로 답했다.

    “고생 끝에 찾아낸 곳이니 제대로 찾아 왔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미 이곳에 오면서 제자를 셋이나 잃었습니다.”

    왕천고가 안타까운 기색을 드러냈다 그때 위무애가 정상을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중심부에 진입해 걷기 시작한지 사흘째요. 이제 거의 다 도착했겠지요?  설마 앞으로 며칠을 더 이렇게 걸어가야 한다고는 하지 마시오.”

    “위 수사 안심하세요! 이 산만 넘어가면 됩니다. 이 일이 성공하면 귀령문은 마도 제1의 종파로 거듭나고 위 수사는 화신기에 이르면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솔직히 난 영묘원의 전설을 완전히 믿는 것은 아니요. 상고 수사들 사이에 돌던 유언비어 중 하나일 가능성이 더 높겠지. 만일 영계와 우리 인간계의 경계가 존재한다면 벌써 다른 수사들이 발견하지 않았겠소.”

    “믿지 않으신다면 어찌 본 문의 요청에 응하신 겝니까?”

    귀령문 문주가 기분 나빠하기 보다는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왕 수사처럼 신중한 분이 문중의 정예 절반을 데리고 추마골 원정을 간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보았소. 영묘원은 아니더라도 상고 수사의 유적이라도 찾아내지 않겠소?  귀 문은 노부의 명성을 빌려 다른 수사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고, 노부는 그 김에 몇 가지 보물을 얻어가는 것이지요.”

    위무애가 솔직히 답했다.

    “허허! 위 형의 답은 항상 시원시원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하지요. 본 종이 이렇게 큰일을 벌인 것은 결코 상고 유적 때문이 아니라 정말 영묘원을 가기 위해서입니다.

    영묘원은 허상이 아니라 실재하니까요! 추마골 전체가 사실은 영묘원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거란 말입니다. 몇 시진 후에 이 산만 넘어가면 직접 확인할 수 있을 테니 기다리시지요.”

    귀령문 문주가 광소했다. 위무애는 그의 자신감이 의외였는지 표정이 달라졌다.

    “왕 문주의 말투로 보아 이미 영묘원의 존재를 확신할 만한 증거를 찾은 듯 하오.”

    “그렇다고 봐야지요. 도착하면 위 수사도 알게 될 것입니다.”

    검은 장포를 입은 중년인이 비밀스럽게 웃었다. 겨우 원영 초기의 수행을 지닌 귀령문 문주였지만 위무애를 앞두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위무애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냉소했다.

    눈앞의 귀령문 문주가 아무리 감언이설을 속삭여도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기지 않았다.

    “귀 문의 종 장로가 보이지 않던데, 왕 문주는 신경이 쓰이지 않소?  원영 중기의 장로가 추마골을 아무렇게나 돌아다니게 두시는 게요?”

    위무애가 화제를 돌렸다.

    “숨기지 않고 말씀 드리지요. 종 장로는 다른 곳에서 보물을 찾고 있습니다. 진귀하긴 하지만 영묘원에 비하면 언급할 가치도 없습니다.”

    상대가 다른 보물도 노리고 있다고 인정하자 위무애도 더는 추궁하지 않고 조용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 * *

    울퉁불퉁한 암석 더미 속에서 귀령문 제자 예닐곱이 흩어져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귀령문 종 노인이 그 중심에 떠서 꼼짝 않고 있었는데 수십 리 황야를 뒤지고 있으나 특정 표식을 찾아내는 일이 수월하지 않았다.

    * * *

    콰쾅!

    거대 협곡의 출구, 다양한 색채로 빛나던 그곳에 벼락이 떨어지는 듯한 괴성이 울리며 수사 무리가 빠져 나왔다.

    선두에선 늙은 도사와 녹색 장포 노인은 다친 곳은 없어 보였지만 퍽 지쳐 보였다.

    바로 천정 진인과 어령종 대장로 동문도였다.

    그 뒤로 다섯 명의 녹색 장포 수사들도 창백한 인상과 더러워진 복색으로 나타났다. 다들 고생 꽤나 한 몰골이었는데 천정 진인의 두 마리 꼭두각시들만이 처음과 똑같은 모습으로 협곡을 나섰다.

    “겨우 금제들을 깨고 중심부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천정 수사의 꼭두각시들이 대단하더이다. 거의 원영 초기의 최고봉에 이른 것 같았어요.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동문도가 협곡 입구를 수십 장 정도 벗어나서야 둔술을 멈추고 꼭두각시들을 눈여겨보았다.

    “꼭두각시는 꼭두각시일 뿐이지요! 동문 형이 대동한 수사 분들과 비할 수 있겠습니까. 다섯 수사들이 각기 다른 오행 공법을 익혀 연합을 하면 원영 후기 수사라도 맞설 수 있겠습니다.”

    천정 진인은 여전히 동문도를 경계하며 협곡을 빠져 나오자마자 그와 거리를 벌렸다.

    “천정 수사께서 아직도 저를 이리 경계하시니 서운합니다. 이틀간 난관을 헤치며 저에 대한 편견이 가셨으리라 여겼는데 말입니다. 중심부에서도 함께 보물을 찾아다니면 홀로 다니는 것보다는 위험을 줄일 수 있을 텐데요.”

    “동문 수사를 경계하다니 말도 안 됩니다. 그저 빈도는 본래 홀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터라 그런 것이니 괘념치 말아주세요. 이제 중심부로 들어왔으니 빈도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