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9
459화. 용암 지역
눈앞에는 백여 장 높이의 작은 산이 있었는데 왼쪽과 오른쪽으로 산봉우리들이 잇닿아 있었다. 분명 화섬의 서식지는 하루 거리라고 했으니 벌써 도착했을 리 없었다.
“남롱 형, 무슨 일입니까?”
“아무래도 이곳을 지나는 것은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노인이 새하얗게 센 눈썹을 끌어올렸다. 한립도 말없이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양쪽으로 난 산마루가 보이십니까?”
“보입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산마루가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로 노인이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어느 쪽으로 돌아가든 화섬의 서식지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왼쪽에는 전설 속의 비천자문갈 무리가 살고 있습니다. 비록 열댓 마리에 불과하지만 성질이 아주 난폭하지요.”
주저하던 남롱후가 사실을 털어놓자 로위영이 깜짝 놀랐다.
“자문갈 류의 상고 요수가 산단 말입니까? 망수국이 출현했을 때 남해종 수사들을 몰살 시킨 전갈 형태의 흉수가 아닙니까.”
게다가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전갈 요수가 아니라 비천자문갈이었다. 한립도 요수의 이름에 안색이 변했다.
“바로 그 독충입니다. 망수국에 출현했던 요수보다 강력하고 몇 만 년을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상고 요수이지요.”
“남롱 수사,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두세 마리면 몰라도 열댓 마리라니! 같이 죽자는 겁니까?”
로위영은 조금 화가 났는지 남롱후를 향해 대놓고 눈을 부릅떴다.
“다른 길로 가고 싶지만 오른쪽은 더 위험합니다. 숨겨진 공간 균열이 너무 많아 절대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수많은 공간 균열들을 다 알아낼 수도 없고요.”
남롱후도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하자 로위영이 일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한립은 그 말에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그럼 당시 창곤 상인께서는 비술을 이용해 오른쪽 길로 들어가셨겠군요.”
남롱후가 한립의 말에 주춤하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본 후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지요. 차라리 비천자문갈을 상대하는 것이 더욱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안될 말입니다. 자문갈은 그리 쉽게 볼 요수가 아니에요. 저는 젊은 시절 천극문을 대표해 자문갈 소탕에 참여 했었기에 다른 수사들보다 확실히 압니다. 열댓 마리의 비천자문갈을 건드리는 것은 목숨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로위영의 극심한 반대와 공포에 남롱후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본래 셋이 모이면 요수들을 전부 죽일 수는 없어도 어떻게든 빠져 나갈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이때 미간을 좁힌 한립이 기충방에서 읽은 비천자문갈에 대한 자료를 떠올렸다. 비천자문갈은 서금충과도 서열이 비슷한 상고시대 기충이었다.
한립의 손에 죽은 어령종 수사가 적어 놓은 바에 다르면 전갈이 알을 적게 낳아 서금충이 수적으로 우세한 것이지 거의 서금충에 버금가는 위력의 요수라고 했다.
웬만한 도검류로는 상처를 낼 수 없고, 날개가 달려 바람처럼 움직이는데다 극독을 갖고 있어 무시무시한 위력을 자랑했다.
게다가 몇 만 년을 살아왔는지 벌써 거의 성체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니 남롱후의 얼굴을 보며 한립은 속으로 냉소했다.
‘이제 와서야 갑자기 자문갈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니!’
한립은 고민에 잠겼다. 비천자문갈이 위험하다지만 다른 길을 선택하면 자신이 숨겨진 공간 균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야만 했다. 하지만 이것은 추마골에서 살아나가기 위한 비장의 무기로 절대 남들이 알면 안 된다.
세 수사가 진퇴양난의 상황에 머뭇거리는데 한립이 갑자기 미소 지었다. 다른 이들의 눈치를 살피던 남롱후가 바로 그것을 확인했다.
“한 형에게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원영기에 이른 노인치고는 기대감이 실린 목소리였다. 로위영도 그 말에 한립을 바라보았다.
한립이 즉시 저물대를 스쳐 녹색 병을 꺼냈다.
“두 분께서는 십절독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
“십절독이라면 당연히 들어봤습니다. 불가사의한 독성을 지닌 10가지 독들로 우리와 같은 수도자라도 중독되면 목숨을 잃는다지요. 위무애 수사의 독공도 그 중 하나인 복시독이라 다른 수사들이 그와 싸울 때는 절대 열 장 내로 접근하지 않는다지 않습니까?”
로 노인이 놀라 답했다.
“듣기로는 십절독은 강력한 독성 뿐 아니라 각각이 기묘한 용도가 있다던데. 수사께서는 그 중 하나를 지니고 있는 겝니까?”
“말씀 드리지 않아도 다들 알고 계시는군요. 제가 손에 든 것은 바로 십절독 중 하나인 벽구독입니다. 알려지기로는 요수 벽취구의 침을 이용해 제련한 것이라 독성이 강하고 독특한 향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요. 천하의 독충이라면 무엇이든 사족을 못 쓰는 향기라고 합니다.”
한립이 녹색 병을 내려다보며 유유히 설명했다.
“한 형의 뜻대로라면…….”
로위영이 무언가를 깨닫고 희색을 드러냈다.
“요수와 싸울 것이 아니라 독으로 비천자문갈을 유인하고 지나가자는 것입니다.”
“어떻게 유인을 하자는 것입니까. 아! 수사가 괴뢰술에 능한 것을 잊을 뻔 했습니다. 꼭두각시 몇 마리에 독액을 묻혀 유인을 하면 되겠군요.”
이때 남롱후도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끼어들었다. 그 말에 한립의 표정이 달라지지 않았지만 마음이 편한 리 없었다.
‘말은 번지르르 하게 하지만 결국 자신의 천리리들이 아니라 내 꼭두각시들을 쓰자는 것이 아닌가. 이미 구렁이 요수를 상대하며 몇 개나 부서졌건만!’
한립은 남롱후가 자신의 꾀꼬리 요수는 언급하지 않으면서 자신에게 모든 임무를 떠넘기려는 듯 말하자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 위험을 무릅쓰고 함께 가야하는데 작은 일로 얼굴을 붉힐 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차피 지도는 남롱후의 머릿속에 있었고 벽구독도 사실은 창곤 상인이 남긴 함 속의 보물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한립은 그날 병을 열어 냄새를 맡고는 바로 벽구독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깜짝 놀란 그가 병을 단단히 봉해서 지니고 있었는데, 창곤 상인이 이번 여정을 위해 일부러 남겨 놓은 보물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꼼꼼하게 후인들이 추마골에 들어갈 수 있게 준비를 한 저의가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한립은 무언가 숨겨진 비사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사정이 있는 그로서는 화섬의 내단이 꼭 필요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립이 마음을 정하고 저물대를 스치자 하얀 빛들이 튀어나와 거대 원숭이 꼭두각시로 변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몇 개의 작은 옥병을 나눠주고는 그 안에 벽구독을 한방울씩 담아주고 뚜껑을 봉했다.
곧 그의 의식에 따라 거대 원숭이들이 병을 손에 꼭 쥐고 소리 없이 날아갔다.
“저희도 바로 출발해야 합니다. 꼭두각시들의 속도로는 자문갈 요수들을 오래 유인하지 못할 테니 그전에 이곳을 통과해야 합니다.”
한립의 말에 세 수사는 거대 원숭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즉시 날아올랐다. 그들이 기운을 숨기는 술법을 사용하자마자 동시에 꼭두각시들이 손에 쥔 병을 깨트렸다.
그러자 이상한 향기가 코를 찌르며 퍼져나갔고 거대 원숭이들도 하얀 빛줄기로 변해 여러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꼭두각시들이 흩어지고 몸을 숨긴 한립과 다른 두 수사는 숨을 멈추었다. 그들의 의도대로 자문갈들이 유인당하면 좋겠지만 실제로도 그럴지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립도 경전에서 읽은 내용일 뿐이라 한 번도 시도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거대 원숭이들이 수십 장 정도 날아갔을 때 조용하던 산속이 떠들썩해지며 무언가가 울부짖었다.
그 날카로운 괴성에 한립은 온 몸의 피가 들끓으며 머리가 무거워져 하마터면 공중에서 추락할 뻔했다. 다행히 빠르게 영기를 끌어 올려 겨우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다른 이들도 흔들거리며 떨어지려 하다가 힘겹게 몸을 추스르고 있었다.
울음소리만으로 의식이 아니라 직접 체내의 원기를 공격하다니. 아무리 강력한 의식으로 보호를 해도 무용지물인 강력한 일격이었다.
비천자문갈의 괴이한 능력에 세 수사는 소름이 돋았다. 경전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잠시 후, 산속에서 열 서너 개의 어두운 보랏빛이 튀어나와 거대 원숭이 꼭두각시를 뒤쫓기 시작했다.
한립이 서둘러 꼭두각시들을 최대 속도로 달아나게 하자 하얀 빛줄기의 속력이 한층 빨라졌다. 그리고 꼭두각시에 심어 놓은 의식을 통해 보라색 빛줄기 속의 요수들을 보았다.
요수들은 한 장 크기의 보랏빛이 도는 검은 전갈들로 날개를 펄럭이며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날개가 달린 것을 제외하면 보통 전갈과 비슷했지만 가장 선두에서 날아가는 전갈은 거의 두 장 크기에 남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입에서 뿜어내는 노란 안개와 사나운 인상에 한립이 저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다행히 꼭두각시들이 그들을 멀리 유인해 내는데 성공해 다들 작은 점으로 변해 멀어졌다.
“꼭두각시들이 어떤 금제를 건드렸습니다. 곧 따라 잡힐 테니 어서 가시지요!”
한립이 먼저 소리치고 은닉술을 풀고 순식간에 허공으로 쏘아져나갔다. 두 수사도 금색과 흰색의 빛줄기로 변해 그 뒤를 따랐다.
시간을 끌다 들키면 끝이었다.
세 수사는 전속력을 다했고 한립도 풍뢰시를 이용하지 않았지만 다른 이들에게 뒤처지지 않았다. 그들의 속도에 산마루를 지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때 한립은 꼭두각시들과 연달아 연결이 끊기는 것을 감지했다. 셋은 전갈 요수의 소굴에서 멀리 달아난 후에야 잠시 멈춰 숨을 돌렸다.
“이번에는 한 형의 벽구독과 꼭두각시 덕분에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남롱후가 크게 웃으며 한립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운이 좋았던 것이지요.”
한립이 남롱후를 힐끗 보며 담담히 답했다. 벽구독은 창곤 상인의 유적에서 얻은 것이지만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로위영도 그에게 감사를 표했는데 진심이 느껴졌다. 다시 안정을 회복한 수사들은 남은 길을 가기 시작했는데 점차 공기 중의 온도가 뜨거워졌다.
산을 뒤덮은 푸른 녹음도 점점 드물어지며 점차 불모지로 변해갔고, 좀 더 지나자 용암으로 형성된 기이한 모양의 기암괴석이 쌓인 산들과 크고 작은 골짜기가 나타났다.
한립과 로위영은 조금 놀랐지만 남롱후는 길을 찾아 나아가는데 여념이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수사는 수 천 장 높이의 시뻘건 봉우리와 마주했다. 높은 봉우리의 절반 정도는 붉은 구름이 껴 있었고, 주위의 낮은 산봉우리들과 대비되어 더욱 눈길을 끌었다.
남롱후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저 산봉우리 아래에 동굴이 하나 있는데 그곳이 바로 불 속성의 두꺼비 요수 화섬의 둥지입니다. 상고 수사의 유적은 반드시 저곳을 지나야 하는데 결코 만만치 않으니 잠시 상의를 하고 공격하시지요.”
“저 산 아래요?”
한립이 눈썹을 끌어 올리며 의식을 퍼트렸다.
정말로 커다란 산봉우리 아래에 꽤 넓은 동굴이 뚫려 있었고 그 안에서 뜨거운 바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상의할게 무엇입니까? 한 수사의 얼음 속성 공법을 위주로 우리 둘이 도와 죽이기로 한 것 아닙니까?”
로위영이 고민 없이 말했다.
“상황이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창곤 상인께서 남긴 기록에 따르면 화섬의 둥지는 용암 속에 있어서 부상을 당하면 바로 용암 속으로 뛰어들어 상처를 회복한다고 합니다. 이 상태로 싸우면 우리가 너무 불리하니 결계를 치고 유인해 내 죽여야 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물 속성 결계의 법기들을 준비해 왔습니다.”
남롱후가 이미 생각해둔 바를 이야기하자, 셋은 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남롱후가 결계를 치는 동안 한립도 또 다른 결계를 펼쳐 만일을 대비했다.
일을 마친 그들은 몸을 숨기고 한립이 꼭두각시 요수를 이용해 화섬을 불러내기로 했다.
그의 영수대에서 부상당한 하얀 늑대 꼭두각시가 나타나자 한립이 결계 근처에 가부좌를 틀고 늑대를 조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