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6
456화. 잿빛 안개
풀이 무성하던 평범한 산은 잿빛 안개로 가득 차 있었고 두 산봉우리에는 주먹만 한 하얀 돌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또한 회색 안개가 백여 장 내에서 머물며 핏빛 금제를 향해 강물처럼 밀려들었다. 그러나 마치 절벽이라도 만난 것처럼 조금도 나아가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게 통로라고요?”
“맞습니다. 이상한 점이라도 있습니까?”
“핏빛 안개는 중심부를 감싼 금계가 맞는 것 같은데 이곳의 잿빛 안개도 비범해 보여서 말입니다. 창곤 상인께서 언급한 바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닐까요.”
“그래도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로위영이 고개를 저으며 신중히 말했다.
“이상한 점이 있는지 시험해 보면 알겠지요.”
한쪽에 서 있던 한립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한 수사의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영초를 찾을 때 쓰는 꾀꼬리 요수가 몇 마리 있는데 그것을 풀어놔 보죠.”
곧 남롱후가 허리춤의 영수대를 허공에 던지자 전신이 황금빛으로 된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남롱후가 푸른 부적을 작은 새의 몸으로 쏘아 보내자 꾀꼬리가 날개를 펼쳐 푸른 보호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의식에 따라 회색 안개로 날아갔다.
새가 회색 안개와 접촉하려는 순간 한립의 눈동자에 남색 빛이 일렁였다.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주변을 한번 훑어보고는 표정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새가 잿빛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한립은 시선을 남롱후에게 옮겼다.
그는 새를 조종 중인지 두 눈을 감고 있었는데 안색이 평온한 것이 아직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은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남롱후가 몸을 떨며 눈을 부릅떴다.
“무슨 일입니까?”
로위영이 그의 창백해진 얼굴에 놀라며 서둘러 물었다.
“안개 속에 무언가가 천리리(千里鸝)를 잡아먹었습니다. 아무래도…….”
남롱후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아끼자 한립과 로위영이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아무래도 거대한 구렁이 같은데 회색 안개도 요수가 뿜어낸 요기(妖氣)인 듯합니다.”
“거대한 구렁이요? 어째서 창곤 상인께서 언급하지 않으셨을까요?”
“창곤 상인이 다녀간 다음에 통로로 오게 된 것이 아닐까요?”
로위영과 한립의 말에 남롱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말씀대로겠죠. 다만 추마골에서 살아남은 구렁이가 절대 평범한 요수일리 없습니다. 적어도 상고 시대부터 살아남은 요수일 테니 귀찮게 되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잿빛 안개가 금제가 아니라 요수가 뿜어낸 것이 불과하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지요. 우리 셋이 함께 공격하면 금방 잡을 수 있을 겁니다.”
로위영이 차갑게 눈을 빛냈다.
“지금으로서는 반드시 저 구렁이 요수를 죽이고 이 길을 지나야 할 것 같습니다.”
남롱후가 결론을 내리고 입에서 금빛 찬란한 검을 뿜어냈다. 로위영도 두 손을 비벼 그 사이에서 하얀 깃발을 드러냈다.
한립이 그것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다른 의견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처리할 일이 있을 듯합니다. 오래 숨어 있었으면 그만 나오게. 볼만큼 보았을 테니까.”
한립이 갑자기 허공의 어느 지점을 응시하며 손가락을 튕겨 푸른 검기를 분출했다. 그러자 검기가 수십 장 허공을 찢어냈다.
그 안에는 온 몸에서 노란 빛을 발산하는 누군가가 거대한 방패를 들고 숨어 있었다.
남롱후와 로위영이 놀라 눈을 부릅떴다.
“오해십니다! 선배님들, 화를 거둬주십시오. 저는 그저 이곳을 지나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사십 대로 보이는 깡마른 사내가 허리를 숙이며 두려움에 떨었다.
“황천명, 네 이놈!”
“아는 수사입니까?”
로위영이 즉시 그를 알아보고 중얼거리자 남롱후의 얼굴이 살기로 번뜩였다.
“천도맹에 속한 수사인데 상고 수사의 부족을 구해 은닉술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발견하지 못할 정도였다니!”
로위영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냉랭히 말했다.
“전 방금 이곳을 지나다가 호기심에 잠시 머물렀을 뿐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원영기 노괴들의 표정이 달라지자 깡마른 사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몰래 숨어들어 우리 뒤를 밟은 주제에 말이 많구나. 로 형, 천도맹 수사이니 알아서 하시지요.”
남롱후가 냉소하며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제 의견은……. 물론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노인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깡마른 사내는 그 말을 듣고 혼비백산해서는 빛줄기로 변해 날아올랐다.
이때 노인은 어떤 비술을 썼는지 순식간에 그 자가 있던 자리에 나타나 깃발을 날렸다.
그러자 깃발이 하얀 돌풍을 일으켰고 열댓 장을 날아간 빛줄기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곧 무언가가 깨져나가며 산산조각난 시체가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합당한 처리였습니다. 이렇게 해둬야 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겠지요.”
남롱후가 가볍게 웃으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결단기 수사 주제에 은닉술을 펼쳐 우리 뒤를 밟은 것이 잘못입니다. 제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온 게지요.”
로위영이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허공에서 손바닥을 쥐자 핏빛 웅덩이 속에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깡마른 수사의 저물대와 누런색의 옥부였다. 노인이 거침없이 그것들을 저물대에 넣어버렸다.
“그나저나 한 수사 덕분에 저 자를 잡았습니다.”
남롱후가 고개를 돌려 한립을 향해 미소 지었다.
“운이 따랐을 뿐입니다.”
“시간을 오래 끌어 좋을 일이 없으니 움직이시죠!”
그때 로위영이 신중한 얼굴로 제안했고 한립도 고개를 끄덕이며 진법 깃발들을 불러냈다.
“거대 구렁이를 죽이기 전에 소리를 감추는 진법을 설치해 주변 수사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한립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과연 세심하십니다. 그러면 더욱 좋겠지요.”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에 찬성했다. 한립은 푸른 빛줄기로 변해 산봉우리 중간에 깃발들을 꽂아 나갔고 잠시 후 대규모의 진법이 준비되었다.
영기의 파동과 소리를 감추는 결계였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다시 두 수사에게 돌아오자 로위영이 손에든 깃발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이제 제가 구풍기(颶風旗)로 안개를 날려버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노인이 허공에 깃발을 던지고 주문을 읊어댔다. 이에 남롱후도 작은 금빛 검을 향해 손짓했고 곧 대여섯 장 크기로 불어난 거대한 검이 그 앞에 떠올랐다.
로위영이 주문을 멈추고 손가락을 들어 깃발을 가리키자 깃발이 몸을 떨며 눈을 찌를 듯한 강력한 빛을 발산했다.
그러자 이전보다 훨씬 강력한 돌풍이 불어나와 열댓 마리의 용의 모습을 한 바람이 안개로 돌진했다.
금빛 거검도 웅웅거리며 안개 속으로 사라져 자취를 감추었다. 남롱후는 안개가 걷히고 괴물이 나타나자마자 바로 공격할 생각인 듯했다.
한립이 조용히 소매를 털어 은빛의 사발을 날려 보냈다. 모란족 법사와 싸우며 얻어낸 고보 중 하나였는데 평범한 위력으로 요수의 능력을 시험해 보려는 의도였다.
열댓 마리의 용들이 짙은 안개 속으로 파고들자 대량의 잿빛 안개가 용솟음치며 사라졌다.
그때 안에서 ‘쉭쉭’ 거리는 기이한 소리가 들려오며 거대한 뱀 꼬리가 안개 속에서 나와 용 모양의 돌풍들을 공격했다.
거대 구렁이가 두어 번 꼬리를 흔들자 용 모양의 바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로위영이 일순 안색이 변하더니 바로 법결을 날리며 소리쳤다.
“터져라.”
쾅!
남아 있던 돌풍들이 하얀 빛이 터지고 스스로 폭발한 것이다.
폭발로 인한 광풍에 안개가 사납게 흩어졌고 드디어 요수의 본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구렁이는 작은 산봉우리처럼 똬리를 틀고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요수의 모습이 드러나자 금색 거검이 소리 없이 거대한 구렁이를 가르려 했다.
한립도 법결을 날려 은빛 사발을 한 장 크기로 키웠다. 금색 거검과 은색 사발이 거대 구렁이에게 쇄도하며 동시에 공격을 가한 것이다.
구렁이는 느릿하게 꿈틀거리며 다가오는 금빛 검과 은빛 사발을 보고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공격이 요수에게 닿기도 전에 구렁이의 전신에서 이상한 녹색 안개가 나타났다.
쿠콰쾅!
금빛과 은빛이 안개와 교전을 하다 맥없이 튕겨 나왔다.
이에 세 수사는 놀라 경계심을 높였고, 거대 구렁이도 드디어 잠에서 깨어난 듯 머리를 쳐들고 세 수사를 응시했다.
한립이 흠칫하며 은빛 사발을 소환하려는데 구렁이가 먼저 움직였다. 기다란 환영이 스치고 지나가더니 삼십 장 밖에 떠 있던 은색 사발이 사라져 버렸다.
한립이 깜짝 놀라 무슨 일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남롱후의 거검도 똑같은 일을 당했다. 이번에는 미리 주의 깊게 보고 있던 터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똑똑히 보았다.
거대 구렁이의 몸이 기괴하게 늘어나더니 두 보물을 연달아 삼킨 것이다. 생긴 것과 달리 거대 구렁이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랐다.
이에 한립의 표정이 무거워졌는데 남롱후는 오히려 희색을 보였다.
안 그래도 껍질이 두꺼워 웬만한 법보로는 어쩌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데 요수가 자신의 법보를 삼켜 주었으니 뱃속을 찢어 놓는 일은 간단했다.
남롱후가 의식으로 금색 비검 법보를 움직이려 했지만 구렁이의 뱃속에 어떤 금제가 걸려 있는지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본명 법보가 손상되면 그 여파는 엄청났기에 남롱후는 무척 긴장했다.
“제 비검이 구렁이의 뱃속에 갇혔습니다. 평범한 요수가 아니니 주의해야 합니다.”
남롱후가 다른 이들에게 주의를 주고는 손을 뻗어 청록색 반지를 내뿜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로위영은 한립과 남롱후의 보물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서둘러 깃발 법보를 회수했다.
그리곤 몇몇 부적들을 날려 수십 개의 하얀 화염을 만들어냈다.
이에 한립도 저물대에서 상고 시대 꼭두각시들을 풀어 놓았다. 그것은 천정진인에게 교환한 하얀 늑대 세 마리, 붉은 소 두 마리, 푸른 구렁이 한 마리였다.
그런데 거대 구렁이가 흉악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다가 먼저 입을 벌렸다.
쉭!
동시에 비릿한 냄새가 덮쳐왔고 세 수사들은 깜짝 놀라 주변에 보호막을 치고 호흡을 참았는데 독성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이 멈칫하는 사이 구렁이가 빨간 입을 더욱 크게 벌려 주변 공기를 흡입했다. 순간 주변의 돌덩이들이 허공으로 떠올라 미친 듯이 구렁이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세 수사들은 누군가에게 등이라도 떠밀린 것처럼 구렁이의 입 속으로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 중에는 한립의 꼭두각시들도 있었다.
한립은 구렁이의 공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몸의 기운을 북돋아 체중을 무겁게 만들어 구렁이의 입가에 도착한 꼭두각시들을 조종해 공격해 들어갔다.
붉은 소 두 마리가 뿔을 빛내며 네 줄기의 붉은 빛줄기를 구렁이의 입 안으로 쏘아 보냈다.
퍼퍼퍼펑!
혀를 드러내고 있던 구렁이는 붉은 빛줄기를 맞고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그러자 강력한 흡인력이 잠시 사라졌다.
그 순간 통제를 회복한 하얀 늑대 세 마리도 수 촌 길이의 발톱을 휘두르며 거대 구렁이의 머리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녹색 안개가 나타나지 않았지만 늑대들의 발톱은 구렁이의 비늘에 옅은 자국을 냈을 뿐 비늘을 파고들지 못했다.
그 중 두 마리가 바로 방향을 바꾸어 구렁이의 눈을 향해 내달렸다. 유일하게 비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부위였다.
퍽! 퍽!
늑대 꼭두각시들이 몸을 날리자마자 보랏빛이 스쳐지나갔다. 구렁이가 혀를 뻗어 늑대들을 공격한 것이다.
거대 구렁이가 머리를 흔들어대며 늑대 꼭두각시들을 부수려는 순간, 푸른 구렁이가 몸을 부풀리며 덮쳐왔고 붉은 소 꼭두각시도 또 한 번 빛줄기를 쏘아 보냈다.
이에 거대 구렁이가 완전히 열이 받았는지 콧속에서 검은 기운을 뿜어냈다.
그리고 늑대 꼭두각시들이 빠져 나가려하자 검은 기운 속에서 구렁이 머리 두 개가 나타나 그것들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